상세정보
• Who - 여행자
전영근, 그와 지역의 선후배로 알고 지낸지 어느덧 십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를 생각하면 불쑥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여행길”이다. 그의 사는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여행길을 가는 사람처럼 산다. 여행길에 익숙해진 사람은 바리바리 등짐 가득 자신의 욕심을 채워가기 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짐을 내려놓으며 여행길을 간다.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긴 호흡을 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그는 늘 그런 모습이다. 결국 이러한 여행길 같은 그의 삶의 방식은 그의 고유한 작업 전개 방식의 유래처(derivation)가 된다.
• What - 존재성과 타자성
현대미술은 전통적으로 설정된 형식적 한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삶의 내용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조형 언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순기능적인 측면이 있음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오늘날의 미술에는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미술이라는 것이 형식을 통한 승화(sublimation)임을 무시한 채 내용의 표출 그 자체로만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와 무의미한 형식 파괴 혹은 반미학적 파괴에서 끝나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마치 낯선 이미지 채집증 환자들처럼, 기발함을 찾아
떠나는 어설픈 발명가들처럼, 패러디(parody)와 패스티시(pastiche)의 가벼움, 모호한 이미지와 언어로 포장된 카오스(chaos)적 미술경향은 결국 현대미술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미술경향에서 전영근은 순수 회화가 제시 할 수 있는 시각적 가능성을 집요한 추궁하며, 그 의미를 탐미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영근이 탐미하는 작품세계를 견인하는 주요 개념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성과 타자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레비나스의 존재성은 욕구(besoin-존재론적)와 욕망(desir-형이상학적)을 구분한다.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욕구는 존재의 주체인 자신의 존재 유지를 위한 이기적인 노력이지만, 형이상학적 욕망은 타자로부터 비롯되며, ‘나(ego)’에 의해 소유되고, 향유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이다. 그리고 존재론이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고(思考)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세계에서 떠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향한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해 레비나스는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의 우위를 말하며, 존재론의 전체성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의 무한성을 강조한다.
타자가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관계없이 그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연을 맺을 때 ‘나’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단지 공존해야 할 ‘다른 자아’가 아니라, 주체인 ‘나’의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는 무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적 존재론”에서)전영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물건(정물)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존재성과 타자성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그와 관계를 맺고 있다. 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나를 그린다.” 고 그는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단순히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물건(정물)들의 의인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건들이 자신의 일상속에서 맺어진 인연에 기초한 타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도구가 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How - 그리다
“헤게모니(hegemony)시스템”이 현대 문화 예술의 구조라고 했을 때,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예술가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 어법을 찾아가고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만의 조형 어법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인 동시에 다른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 할 수 없는 불가지한 세계의 질서와 그 전모를 이해 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은 해독의 즐거움이 수반되는 조형적 진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영근의 조형적 진술 방법(How) 의 특유성은 무엇일까? 그의 작업의 조형적 특성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회화노동의 신성성(神聖性)”이다. “나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리는 일에 집중한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그리는 것” 즉 회화 노동이 주는 신성성을 매우 중요한 표현 요소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마치 "of the paint, by the paint ,for the paint"처럼, 그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줄 곳 그리는 행위를 고집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고집은 단지 고집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화면 안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채워지고 있다. 둘째는 “자아 확인적 예술행위”이다. 그는 “나는 나의 그림 속에 나 자신의 일상의 삶이 투영되고 있다고 믿는다. 나의 작업
에는 내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일상의 물건(정물)들은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사물의 고유한 언어적 속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그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친근해진 페이버릿(Favorite) 물건들이라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물건들을 정성스럽게 화면 등장시킨다. 이러한 자신의 일상의 삶을 투영시키는 “자아 확인적 예술행위”는 그에게 피톤치드(Phytoncide) 효과처럼 심리적 안정을 주며 그의 작품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작업에는 내가있다.”라는 그의 말이 흥미롭다. 그는 물리적 혹은 존재론적으로 그의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작업 안에서 자신을 늘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업의 ‘내적 진정성’, ‘내적 필연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형식의 변화”이다. 2003년도에 발표한 그의 초기 작업에서는 화면에 등장하는 물건들이 작가의 중심 시선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물건들은 ‘별 의미 없는 한 공간’에 던져 놓여져 있을 뿐이고, 작가는 무심하게 공간속의 물건들에게 “별 요구 없이 한 공간”을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물건 시리즈>와 <여행 시리즈>작품들 속에서 그는 매우 강압적이고 의도적으로 물건들은 “비현실적으로 구조화”하고, “비의태적으로 양식화”하고 있다. “관계는 구조와 형식에 의존한다.”는 ‘유사의 법칙’처럼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곧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관계의 변화 기저에는 작가자신의 삶과 일상의 변화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반응의 변화가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그 변화가 무엇인가에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 변화의 반응이 작업에 투영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성과 타자성의 개념 안에서 언제나 오늘의 그를 그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기에 내일의 그가 기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 Epilogue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온다.”는 말처럼 앞으로 그의 화로(畵路)가 꽃을 피우며 봄을 맞이하는‘여행길’이 되길 기도한다.
김병호 | 조형예술학박사, 백석대학교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