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홍지에서는 2013년을 여는 첫 전시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발전해오는 가운데 묵묵히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수하며 작업해 온 최병소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최병소는 기존의 캔버스 대신 신문지 위에 연필과 볼펜으로 무수히 선을 반복적으로 긋고 지우는 작업을 통해 낡고 구겨진 검은 양철판 같은 독창적인 화면을 제시한다.
신문지를 아주 정교하게 가로 세로로 접어나가면서 손 안에 들 만한 크기로 접은 후 다시 편다. 그리고는 그 신문지 위에 볼펜으로 선을 그어 기사 하나하나를 지운 뒤, 다시 그 위에 연필로 빼곡히 선을 긋는 노동집약적인 행위를 반복한다. 검게 변한 신문지는 닳을 대로 닳아 아주 얇게, 또는 찢어져 신문지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할 새로운 물성을 가진 어떤 물체로 변한다.
최병소가 사용하는 신문지라는 재료는 단지 일상의 오브제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매일 새로운 기사를 담아내는 신문은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자세히 보여주는 소통의 매체이면서도 때로는 편향된 시선으로 사실을 왜곡하며 외부의 압력에 의해 현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신문의 내용을 지워나감으로써 신문이라는 매체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소해버린다.
이후에도 그는 원래의 화면을 뒤덮어 지움으로써 읽을 수 없는 신문, 내용을 알 수 없는 잡지, 탈 수 없는 비행기 표, 쓸 수 없는 지폐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용도를 폐기하여 새롭게 탄생하도록 하는 작업들을 발표해왔다. 그의 회화는 '그리기인 동시에 지우기이고, 채우기인 동시에 비우기이며, 의미이자 무의미이다.' 선을 그리지만 그것은 결국 글자를 지우는 일이고, 선을 채우는 동안 작가 자신과 본래의 물질은 비워지며, 신문의 글자를 지움으로서 의미를 무화(無化)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미와는 다르다.
이렇듯 최병소는 그간의 단색조 회화 작가라는 단편적인 평가와는 달리 상당부분 실험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단색이라는 이유로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로 분류되었던 그의 작품은 작품의 고유함과 미술사적 중요도에 비해 그간 제대로 된 평가가 거의 없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작가 최병소가 가지는 중요한 미술사적 위치를 재조명할 수 있는 전시로, 그의 대표작인 신문지 작업부터 대형 설치작업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이다. 빠르게만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오랜 시간과 영혼의 깊이를 간직한 최병소의 작품을 통해 아직 남아있는 인간의 온기와 소박함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어둠의 어조語調
이달승 / 미술평론
무엇이 그의 작업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종이(신문지)를 펴놓은 책상으로부터 그를 물러서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손에 든 펜(볼펜)과 연필(흑연)을 놓지 못하게 하는가. 이렇게 물음을 던지면서 우리는 그의 작업이 우리 모두를 끌어 들이는 어떤 위험을 예감하게 된다. 그 위험에 다가설 때 우리는 예술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게 되리라.
그런데 그의 작업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작가의 예술적 집념이나 투지와는 무관하다. 그의 작업이 그의 말대로 “목적도 없고 달성해야 할 것도 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 이르고 무엇을 이룬다기보다는 나아가면서도 자꾸만 미끄러지며 제자리를 맴도는 그의 작업을 보며 우리는 의혹에 잠긴다. 그린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과는 까마득한 것이 아닐까하고.
오랜 작업으로 헤지고, 찢어지고, 심지어 까맣게 타버린 듯한 종이에서 상처로 남은 작가의 비장함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 우리의 안이한 낭만적 대리만족일 수 있다. 수십 년을 지리하지만치 한결같은 어조로 종이를 채우면서도 그는 어디에 이르고자 한 적도, 무엇을 이루고자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수고로 까맣게 채운 종이가 무위無爲로 까맣게 비어있다. 채움과 비움. 그에게 있어서 그리기와 지우기는 원래가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채움과 비움의 수사修辭로 완성되는 정신의 초연함을 말하기에는, 그는 종이와 연필이 나누는, 결실을 모르는 못난 사랑과도 같은, 알뜰한 구속으로부터 잠시도 손을 떼지 못한다. 아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알뜰함이 몰두와 몰입에 대한 최상의 정의定義는 아닐까. 우리가 종이와 연필이 나누는 알뜰한 구속을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어떤 높이에 이르거나 어떤 깊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알뜰한 구속을 따르며, 심지어 무모하다는 핀잔마저 감수하며 나아가야 하는, 하지만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하는, 이를테면 끝날 수 없는 것의 발견과도 같다.
그린다는 것이 끝날 수 없는 것의 발견이라 할 때, 이곳에 끌려든 작가는 자신을 넘어 보편이나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모두를 향해 얼굴을 치켜든 멋지고 훌륭한 그림을 희망하지 않는다. 차마 기억이나 개성에의 미련마저 쑥스러운 듯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도 서명도 남기지 않는다.
날짜도 서명도 없는 작품.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날짜 없는 시간에, 이름 없는 작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알뜰한 구속을 따라 나선 그는, 끝날 수 없는 것의 유혹에 이끌려 날짜 없는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다. 우스개인양 절망인양 그림을 그린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다. 기억을 모르는 시간, 개성의 확인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 그는 더 이상 연필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서명을 남길 수 없는 이름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우리는 이 말의 지향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한 개성으로서 이름을 지닌 작가가 발음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작품이 있는 곳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작품이란 자신의 능력의 보증인양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작품을 염두에 두고서, 엄청난 수고를 작정하고서 연필을 손에 들지 않는다.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 그는 그의 의지로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이 아무것도 새롭게 할 수 없는, 연필을 들려고 하는 순간 이미 연필을 들고 있는 그로 되돌아와 있는, 그래서 끝내 작업을 멈추지 못하는 그이다.
그렇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린다는 그 알뜰한 구속을 따르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의 능력도, 권한도 아니다. 능력을 포기하고 권한을 거절하고 들어선, 마치 타버린 재와도 같은 소멸과 삭제의 지점에서도 여전히 시작도 끝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다. 그는 이미 어느 누구가 아니다. 그린다는 것, 그것은 마침내 작가 스스로가 멈춰지지 않는 그리기의 말없는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아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작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미술의 모든 표현가능성에 대해 침묵해야 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그의 그림 속에서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색에도, 질감에도, 선에도, 필치에도, 화면의 균형에도, 그 무엇에도 그는 무지하다. 무지. 그러나 오해는 말자. 그는 결코 미술의 모든 표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실제로 그림의 슬기로운 표현 가능성들이 말없이 흩어지고 뿌려진 채 묻혀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 미술이 잊고 있었던 예술의 의미에 관한 한 훌륭한 증언을 만난다.
미술의 또 다른 가능성은 부정을 통한, 의미의 부정을 통한 무의미로의 비상飛上이 아니다. 너의 부정이 나라면, 그 때의 나는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오히려 의미가 다하고 소진되어 더 이상 말하지 못할 때, 그 침묵마저 긍정할 때, 아무 것도 긍정하지 못하는 긍정이라 하여도 그 끝나지 않는 것을 긍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의미를 만난다. 모든 표현 가능성에 침묵하고서 벼랑에 선 미술을, 그 벼랑에서 그 기원을 되묻는 미술을 만나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그는 여전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가, 연필과 종이가 서로에게 몸을 내어주어 함께 닳으며 들려주는 간단없는 메아리에 귀 기울일 때, 지금(NOW) 여기(HERE)는 이미 그 어느 곳도 아닌 곳(NOWHERE)으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은 그럼에도 여기이다. 여기가 아무것도 드러내주지 못하고 다만 끝나지 않는 것의 긍정에 불과하더라도.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의 작품은 여기 어둠에 잠겨있다. 그의 작품은 그렇게 시간의 부재를 물들이는 어둠의 어조마냥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멸되기 위해 기울인 알뜰하면서도 무모한 노력으로 놀랍도록 빛나고 있다. 재처럼 무한의 어둠으로 사라지면서도 말없이 빛나는 부동의 광물처럼. 여기서 작품이 그 이상을 드러내주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그리고 그것이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배반하면서 이해 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오해를 숨기며 불안스레 서성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Untitled_신문지_볼펜_연필_110x240cm_2008
최병소
1943 대구출생
1974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85 계명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13 SPACE HONGJEE, 서울
2012 대구미술관, 대구
Gallery IBU, Paris
P&C 갤러리, 대구
2011 아소갤러리, 대구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09 갤러리 육공사, 부산
한기숙 갤러리, 대구
2008 가인갤러리, 서울
봉산문화회관, 대구
2006 갤러리 M, 대구
2005 IBU 갤러리, 파리
2003 시공 갤러리, 대구
2002 Space 129, 대구
1997 시공 갤러리, 대구
1979 무라마츠 화랑, 동경
1978 서울 화랑, 서울
1975 시립도서관 화랑, 대구
단체전
2012 이인성미술전 수상자전, 대구미술관
단색조의 회화2, 공간퍼플, 헤이리
2011 대구미술관 개관특별전 ‘기가 차다’, 대구미술관
2009 5인전, 아란야, 대구
이명미와 최병소, yfo갤러리, 대구
Pulse New York, Hudson Fiver Park, 뉴욕
2008 겹, 갤러리 소소, 헤이리
그림의 대면, 소마 미술관, 서울
2007 무-로부터, 문화예술회관, 대구
2003-05 KIAF / 시공갤러리, COEX, 서울
2002 지우기와 그리기, 신 갤러리, 청주
사유과 감성의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2000 정신의 풍경, 갤러리 M, 대구
뒤죽박죽, 토탈미술관, 서울
1999 한시대의 연금술 엿보기,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한일 현대미술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1998 New York 국제아트페어, 시공갤러리, 뉴욕
1997-02 FIAC / 시공갤러리, 파리
1997 한중일 현대미술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1996 한국 모더니즘의 발전, 금호미술관, 서울
대구 아시아 미술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1981 Korean Drawing NOW, 브룩클린미술관, 뉴욕
1980 국제 Impact 예술제, 교토시립미술관, 교토
1979 상 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1978 한국 현대미술 20년 동향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7 한국 현대미술전, 역사박물관, 타이페이
한국 : 현대미술의 단면, 센트럴미술관, 동경
1776-79 에꼴 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5-79 서울 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4-79 대구현대미술제, 계명대학교, 대구
1974 한국실험작가전, 대백화랑, 대구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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