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3-07-03 ~ 2013-08-13
무료
02-725-0040
최승희 (崔承喜, Choi Seung-hee, 1911 ~ ?)
최승희는 우리나라 최초로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하고 공연한 인물이다. 경성에서 태어나 숙명여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발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무용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어 일본에서 사사한 뒤 무용단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1929년 서울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잇따라 신작 발표회를 가졌다. 또한, 이 시기 전통무용을 익혀 자신의 창작무용에 응용했다.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해 일약 조선 무용계의 대표적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나아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재입문해 일본에서 공연한 <에헤야 노아라>가 대성황을 이루어 점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6년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해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중남미 지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1938년 개최된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정도였다. 하지만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무용가인 그녀에게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일제의 강요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고 일본 전통무용을 소재로 삼아야 했는데, 그런 행위 때문에 광복 후 친일파라는 오명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최승희는 20살이 갓 넘어 결혼한 남편 안막(安漠)과 함께 북한으로 가 1946년 평양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의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고 나서 무용가로서 그녀의 삶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급기야 1967년에는 그녀 역시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최승희는 사망 이유와 그 시기가 불분명하다. 북한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지만 이견이 없지 않다. 주요 작품으로 《인도인의 비애》, 《초립동》, 《장구춤》, 《거친 들판에 가다》, 《승무》, 《칼춤》, 《반야월성곡》, 《춘향전》, 《유격대의 아들》, 《조선의 어머니》 등이 있다. ‘동양의 무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던 그녀는 무용 이론 연구에도 매진해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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