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 OCI미술관은 우리시대의 감성과 미학이 담긴 한국 현대 동양화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진경, 眞鏡> 展을 9월 1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약 6주간 개최한다.
○ <진경, 眞鏡> 展은 오늘날의 동양화가 지니는 다양한 표정 중에서도 현대의 풍경과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자유로운 표현 방식으로 펼쳐나가는 양상에 주목한다.
- 오늘날의 동양화는 지필묵연(紙筆墨硯)을 뛰어넘는 재료 선택에서부터 일상 및 사회 문화적 현상에 밀착하는 소재의 선택, 평면과 입체, 영상 등이 혼융하는 형상화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 양상이 매우 다층화 되어가고 있다. 즉 동양화 고유의 특성뿐만 아니라 서양화의 영역까지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 이처럼 우리시대의 눈높이에 맞춘 친근한 동양화의 양상은 ‘내 주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조선시대 진경(眞景)의 개념에 닿아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좀 더 다가가 ‘거울에 비춰진 지금 이 시대의 진짜 풍정을 다룬다’는 현대적 진경(眞鏡)으로 번안될 수 있을 것이다. ‘진경(眞景), 眞鏡’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토양 위에서 자라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 이처럼 동양화가 지나친 관념성과 정해진 조형적 방법론을 벗어나 우리시대의 눈높이에 맞춘 친근한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 직접적인 징후는 1990년대 중반의 사회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과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 글로벌 문화 환경으로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동양화의 신세대 작가들은 고답적인 전통의 틀에서 빠져나와 스스로의 경험과 자유로운 발상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층적인 표현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 그 중에서 김선형, 유근택, 박병춘, 박종갑, 임택, 김민호 등으로 구성된 동풍(東風) 그룹의 활동은 단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들은 동양화의 운필론(運筆論)을 대표하는 지필묵(紙筆墨)을 재료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면서 개인의 내면에 근거한 일상의 감정과 사물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시도했다. 이처럼 동시대의 삶과 문화 현상의 리얼리티를 담아낸 성과는 이후의 동양화단에서 보다 자유로운 태도와 확장된 언어를 통해 발현되었다.
○ 이번 전시는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되었다. 일상의 어느 한 순간이 전해주는 깊은 울림을 기록한 ‘서사의 순간’, 보행의 의지를 담아 풍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체험하는 ‘움직이는 풍경’, 보편적인 삶 속에 내재된 상상의 언어를 통해 현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상과 환영 사이’가 그것이다.
- 또한 참여 작가는 동풍 그룹의 일부 멤버를 비롯하여 이 시대의 미감을 깊이 있게 다룬 동시대 작가 총12명이 함께 했다.
- ‘서사의 순간’ 섹션에는 유근택, 정재호, 이영빈, 양유연의 작품을 통해
- ‘움직이는 풍경’ 섹션에는 박병춘, 임택, 김민호, 김보민
- ‘일상과 환영 사이’ 섹션에는 김정욱, 이진주, 서은애, 손동현
○ <진경, 眞鏡> 展은 이 시대와 공감하는 동양화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데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의 풍정과 리얼리티가 담긴 작품들은 전통에 대한 방기나 절연이 아니라 동양화 고유의 정신성과 조형성을 우리 시대에 유통되는 다양한 미학과 미감 속에서 수렴하고 발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동양화의 본질과 정체성은 결국 동서양의 경계를 논하는 지점이 아니라 융합 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바로 지금,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완결되는 예술 언어로 자생해 나갈 것이다.
서사의 순간
유근택은 1990년대 후반부터 동양화의 관념성을 현실로 끌어내려, 나와 나를 둘러싼 일상의 소소한 정서적 교감에 주목해왔다. 이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거대 담론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역사의식의 소명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계기로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의 축적이 결국 역사를 형성한다는 인식으로 방향전환 된 데에 연원한다. <분수>는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수대의 장면이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물을 뿜어내는 광경은 순간에 대한 포착이면서도 영원히 지속되는 서사의 단초를 전해주는 듯하다. 초현실적 분위기의 <어떤 실내>는 시간의 무게와 에너지가 응집된 사물들이 자아내는 심상의 풍경으로, 일상 속에 축적된 사물과의 정서적 교감을 담고 있다. 그 외에도 미국에서의 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기와도 같은 작품, <코끼리>를 비롯해서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이 지니는 낱낱의 표정과 의미가 역사의 서사로 이어지는 순간을 담고 있다.
정재호는 유년기를 보냈던 옛집에 대한 단상을 좇아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낡은 아파트 형상을 화폭에 채록해 왔다. 한때는 일상의 중심에서 함께 호흡하면서 삶의 체취를 나누었지만 사회 변화와 경제 논리 속에서 차츰 뒤안길로 사라져 간 낡은 건물들은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를 모두 함축하고 공유하는 생물학적 매개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구호>, <심장>은 재건축 직전의 노화된 건축물의 쓸쓸한 풍경을 덤덤하게 포착한 것으로, 노스텔지아에 젖어 과거를 추억하는 흐릿한 시선이 담겨있는 듯하다. 또 쓰러진 낡은 지프차를 옮겨온 <봄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구식 유선 전화기를 부각한 <회귀선>은 다사다난했던 현대사를 함축한 아이콘으로 다가온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기록은 개개인의 추억과 역사의 층위가 쌓여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영빈은 정체성의 형성, 혹은 그것의 해체와 재형성의 과정 속에 있는 자아를 타자화 하여 들여다보는 회화적 표현에 몰두해 있다. 이는 일상 속에서 혹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면서 세상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면모라고 하겠다. <한옥>은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상징하는 한옥 내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문 밖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체감한 수양과 치유의 필연적인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양유연은 성장기에 겪은 아픈 기억을 신체 부위의 물리적 상처의 흔적으로 더듬어보고 마음의 잔상들을 치유하고 정화하고자 한다.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부각되어 있는 <상처>, <멍>, <입병> 등은 은유이든 서사이든 개인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또 <그 때>는 흉물스러운 낡은 건물을 통해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조심스럽게 진술한다. 작가는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이 곧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임을 부각하고 있는 듯하다.
움직이는 풍경
박병춘은 전통적인 진경산수를 현대적 풍경으로 번안하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그는 조선시대의 진경산수가 실재하는 장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화가의 경험이나 주관성이 반영된 독특한 풍경화라는 점에서 현재성, 현장성, 자율성을 추출하여 이를 공유하고 확장시키는 태도를 보여준다. <흐르는 풍경>은 현장에서 스케치한 풍경을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와 자신이 경험한 추억 속 모티프들을 덧붙이고 특유의 구불구불한 필법(라면준)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고아한 절벽 위에 패러글라이딩이라는 엉뚱한 조합의 풍경은 이로써 작가의 기억으로 치환되고 기억은 주체를 구성하는 유기적인 인자가 되어 풍경 속에 흘러 다닌다. 진경 속으로 들어간 나, 혹은 진경을 불러낸 사유의 혼재를 경험하게 한다.
임택은 산수풍경을 아예 공간 밖으로 옮겨온 경우에 해당한다. 전통적 의미의 산수화가 산수를 체험하는 공감각적 교류를 전제로 하듯이 작가는 관람자가 산수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종종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거나 오브제를 이용한 입체 산수를 설치하여 내러티브를 완성해왔다. 이번의 신작 <점경와유(點景臥遊)>는 바닥 전면에 이끼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나무 오브제가 안배된 독특한 풍경을 제시한다. 보는 이에 따라 때로는 아늑한 정원 풍경으로, 때로는 숲이 우거진 섬 풍광 등으로 다가온다. 이는 자연을 유람하는 개인의 경험과 상상이 투영되어 감성적 교류를 나누는 확장된 개념의 인터렉티브 풍경이라 하겠다.
김민호는 인터넷을 통해 서울시 도로 곳곳에 설치된 CCTV 속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 담긴 도시인의 흔적들을 재구성한다. 감시와 관리를 위한 CCTV의 시선은 우리 삶의 단편적인 모습들을 관찰하면서 도시 전체의 조각 그림을 제공한다. 수많은 시점 속에 포착된 낱낱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늘상 만나는 장소를 나열하고 있지만 그곳을 지나쳤던 사람들의 생각과 표정, 상황에 대한 플롯이 함축되어 있다. 움직이는 도시의 표정들 위에 저마다의 기억과 경험이 인자로 작용하여 살아있는 도시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도시의 다리 풍경을 추적한 <Flow the City>는 시간의 연속성을 분절된 시각과 공간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제시한다.
김보민은 겸재(謙齋) 정선(鄭歚)이 우리 국토의 풍경을 다루었듯이 현대의 도시 풍경을 파노라마식 시선으로 펼쳐 보인다. 서울 풍경을 다룬 <한강>, <선유>, <가회도>는 어느 한 장소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근경, 중경, 원경의 장소 이동으로 경험한 확장된 시선을 반영하여 그 장소를 온전히 감상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따라서 친근하게 다가온 풍경들은 현실의 장소이면서도 허구의 장면이기도 하다. 보는 이의 경험과 기억이 요소요소에 닿으면서 동적인 풍경이 종합적으로 완성된다.
일상과 환영 사이
서은애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전통 산수화의 미학에 투영하여 시공을 초월한 이상 세계를 펼쳐 보인다. 새와 어울려 노니는 <조우가(鳥友歌)>, 꿈속인양 환상적인 그림자 풍정이 어른거리는 <몽롱지경(朦朧之境)>은 일상에 가득한 온갖 욕망을 떨쳐내고 자연과 혼연일체 되어 행복을 노정하는 모습들이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염원했던 인간의 태생적 욕망과 환상을 반영한 것이며 보편적 삶과 병치되기를 희망하는 인간의 영원한 꿈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손동현은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 속 캐릭터들을 동양화의 특성에 맞춘 초상화로 번안하는 작업을 비롯하여, 서양의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동양화의 문자도(文字圖)로 바꾸어 놓는 등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양의 팝 문화 현상들을 동양화의 전통적인 조형성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는 신선한 유머와 위트로 다가오면서도 현대의 문화 현상을 절묘하게 배합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Robot>는 영화 속 로봇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6m 길이의 화첩이다. 인간과 로봇의 공존은 인간의 오랜 꿈이었고, 이제는 친숙한 가상세계이자 어느 정도 현실화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유쾌한 공감대를 자아내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진주는 마음 저편에 유폐시킨 오래된 상처와 기억들을 다시 불러와 불편한 진실을 명징하게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맨들>, <앞집>, <Tears>와 같이 수채화처럼 맑고 차분한 화면 속 세상은 기묘하고 낯선 상황 설정, 분절된 신체, 파편화된 사물들이 초현실적인 꿈의 형식으로 재현되어 불안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편린들의 종합과 재구성은 작가에게는 덮어둔 상처에 대한 치유이자 위로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대변하면서 희망의 이식을 꿈꾸는 설정극과도 같은 것이리라.
김정욱은 강렬한 형상을 띤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다룬다. 제목조차 달려있지 않은 어두운 화면 속 인물들은 한없이 깊고 커다란 눈망울을 띤 채 삶을 초탈한 듯 혹은 삶을 직시하는 듯,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등장한다.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애잔하게, 때로는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인물들은 과부하에 시달리고 고독 속에 자폐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겠다. 화면 속의 비현실적 존재들은 무언의 메시지를 통해 이 시대의 병증을 위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에너지를 전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