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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의 회귀, 그리고 삶과 생명의 예찬
문옥자 회고전에 부쳐
윤진섭 |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문옥자의 조각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비롯해서 가족, 생명, 기다림, 삶과 죽음, 희망, 에로티시즘(性愛) 등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서정적인 율조가 짙게 깔려있다. 인체 조각을 위주로 작업을 해온 그는 자기만의 뚜렷한 조형 언어를 구축,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이제 정년을 맞아 작가활동 40여 성상을 마감하는 회고전을 준비한다.
이번에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리는 문옥자의 회고전은 작가 본인에게는 물론, 그를 아끼고 사랑해 온 미술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매우 뜻 깊은 전시다. 그것은 첫째 한편으로는 교육자,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로서 평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자리라는 점이며, 둘째는 이 전시가 끝이 아니라 사실은 정년 이후에 찾아올,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신진작가’로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전기(轉機)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만큼 그가 이번 전시에 임하는 각오와 성의는 막중한 데가 있다.
같은 직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지켜봐 온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문옥자에 대한 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품이 곧고 자존심이 무척 강하지만, 그 강함 속에는 부드러운 여성의 미덕 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로 요약된다. 이 여성적인 내면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문옥자의 조각이다. 겉보기에 그의 조각은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흐르는 선적 구성과 여체의 터질 듯한 볼륨감으로 인해 유미적으로 보일 소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작품이 주는 첫 인상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문옥자 조각의 여성적 특징은 그 안에 내장된 강렬한 남성적 속성의 파열을 예고한다. 그것이 발화(發火)하는 시점을 나는 이번 전시 이후로 예견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또한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 동안 그를 가두어뒀던 온갖 터부와 스스로 설정한 한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실험정신이 그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을 나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Ⅱ. ‘점례의 초상’이란 명제는 문옥자 개인에게 있어서 고향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다. 점례란 옛스런 이름은 작가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순수’의 등가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마음의 고향이자 상징’이며, ‘영혼의 영원한 쉼터’이다. 고향이란 영원회귀의 터전이 아니던가. 상처받은 영혼이 돌아갈 거처인 고향은 그래서 비단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문옥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고향인 ‘점례’는 상상력의 원천이자 사회비판적 시선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가령, <점례의 초상-꿈의 나날>(31x21x65cm, Bronze, 2007)은 순결한 신부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점례의 초상-당신의 안락의자>(58x22x46, Bronze, 2007)는 한낱 남성의 노리개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깔고 있다. 이 작품에 이르러 문옥자 특유의 에로티시즘은 만개하고 있거니와, 안락의자로 은유되는 은밀한 성애(性愛)가 실은 ‘점례’가 상실한 순수성, 즉 고향에 대한 보상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작가가 청년기를 보낸 50년대 말에서 6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은 사회사적으로 볼 때 근대화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 기간에 많은 시골 처녀들이 상경, 도시화의 과정을 겪었다. 점례의 변모된 모습은 곧 도시화의 단면이랄 수 있다. 그것은 60년대의 여성의 초상이기도 하면서 성형미인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옥자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타자화(他者化)된 여성의 이미지를 극히 상징적인 수법을 통해 그것이 굴종의 태도에 다름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순박했던 시골 처녀 점례의 변모된 모습을 통해 순수에 대한 인간 내면의 원초적 향수를 일깨우고 싶다.”고 말한다.
문옥자의 이러한 고향 상실에 대한 테마는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선보이게 될 설치작품 <삶 -인연의 틀>에 이르면 더욱 구체화된다. 부모님이 거주하던 옛 한옥의 문짝을 이용해 구성될 이 작품은 근대화로 인해 파괴되고 해체된 ‘가족’의 의미를 묻고 있다. 중앙의 완자창을 중심으로 양쪽에 격자창이 앞이 약간 벌어진 ‘ㄷ'자 형태로 놓여지고, 그 앞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 설치돼 있다. 중앙에 있는 완자창의 창구멍은 빛바랜 가족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문옥자가 이 설치작품을 통해 묻고 있는 것은 시간성의 문제이다. 즉,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 특정한 시기의 시공간을 점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유한한 인간이 가족이란 제도를 통해 사회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자아(自我)의 프리즘을 통해 가족적 사건(어머니와 오빠의 긴 투병 생활과 죽음 등)을 어떻게 내면화하는가 하는 문제를 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세계의 외부적 투사가 바로 작품일진대, 문옥자의 이 <삶-인연의 틀>은 작가 개인의 개별적 사건을 통해 근현대사라고 통칭하는 한국의 보편적 역사를 증언하는 하나의 단편이 아닐 수 없다.
<점례의 초상>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계열에 속하는 하나의 완곡한 표현술이다. 문옥자가 이번 전시에 출품하게 될 또 하나의 <점례의 초상-애완녀>는 애완견의 신세로 전락한 현대 여성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여기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인 여성의 모습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개와 인간의 합성처럼 보인다. 퍼머 머리를 한 여성이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고혹적인 포즈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유혹할 때 ‘꼬리를 흔든다’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도 여성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그런데 그 꼬리는 개의 꼬리처럼 보인다. 마치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여성이라는 강한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여기에 하나의 반전(反轉)이 장치돼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점례의 순수성, 즉 잃어버린 고향의 상징으로서 점례의 처녀성이 꼬리에 붙은 한 송이의 꽃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다.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열린 [열풍 변주곡]에 출품한 <젊은 오빠의 초상> 역시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푹신한 솜으로 가득 찬 전시장 바닥에 대좌가 놓여있고 그 위에 중후한 모습의 중년 남자가 벗은 몸으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그 주변에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귀엽고 예쁜 바비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마치 예쁜 여성들의 유혹을 물리치기라도 할 듯 부처님처럼 초연한 자세다. 그러나 내면에는 치열한 전쟁이라도 치르는 듯한 기세다. 작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중년 남자의 조각상에서 보이는, 부처님이 악귀와 대항할 때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에서 엿볼 수 있다. 문옥자는 이 작품을 통해 성(性)의 상품화를 향해 치닫고 있는 현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Ⅲ. 9년 간에 걸친 어머니의 긴 투병 생활과 죽음, 사랑하는 오빠의 갑작스런 암 발병과 죽음 등 연이은 가족사적 사건은 문옥자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한 요인이다.<삶-부활을 꿈꾸며>는 목조로 된 설치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옆으로 길게 누워있다. 남자의 거칠게 다듬은 벗은 몸은 시신을 연상시킨다. 남자의 두 팔은 마치 염할 때처럼 앞으로 공손히 모아져 있다. 그 몸이 마치 나무에 꿰인 것처럼 하단부에 부착돼 있다. 나무는 신목(神木)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데 그 가지들은 여기저기서 모아 조합한 것이다. 이 작품은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영속성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룬 것이다. 죽음에 대한 강한 파토스가 신체 전면을 통해 강하게 풍겨 나온다. 이 작품은 망자(亡者)의 영혼이 나무를 통해 저승으로 승화되는 장면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국인의 사관(死觀)이 잘 나타나 있는데, 망자는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중간단계에 떠도는 존재, 즉 중음신(中陰神)으로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서 산 자들은 진도의 씻김굿에서 보듯이 베가름과 같은 의식(儀式)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지상에서 약간 떠 있어서 마치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중인물의 위치 설정은 이의 한 상징처럼 보인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문옥자의 작품세계는 삶과 죽음, 생명, 에로티시즘 등 폭 넓은 주제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철사를 이용한 선조 작업을 통해 보다 더 첨예하게 구체화되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문옥자 작업의 개화(開花)는 지금부터 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면화된 강한 열정의 소유자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뭔가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그 열정과 힘이 어느 날 지표면을 뚫고 분출하는 순간 우리는 작가로서 문옥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가노트 - 내 삶의 여정과 작품
유년시절 내 기억의 시작은 마당 장독대옆 채송화와 봉숭아, 펌프식우물, 아담한 한옥 기둥 사이사이에 미장된 흰 회벽이다. 이른아침 가게로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다섯살이된 나를 돌봐 주셨던 숙모의 눈을 피해 연필 크래용 등 도구를 찾아내서 하얀 회벽에 낙서같은 뭔가를 마구 그리는게 가장 흥미로운 나의 놀이이자 일과였다. 일터에서 돌아오신 부모님께 심할땐 회초리까지 동원돼 야단맞는게 내 일과의 끝이 되었는데 결국 어느날 아버진 내몫의 크래용과 도화지를 한묶음 사오셨고 점차 마당안의 모든 것들은 내 그리기의 대상이 되었다. 유치원 학예회 장래희망 노래자랑에선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될테야 될테야 화가가 될테야”라고 소리내 불렀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신 부모님께서는 일찍부터 여러 사업에 부지런히 종사하셨다. 덕분에 생활에 부족함은 없었고 오빠와 남동생 사이의 외딸인 나는 아들을 중시하신 부모님의 관심을 비껴갈 수 있어서 초 중등학교를 거쳐 미대에 입학할 때까지 뭐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결석하고 집근처의 극장에 어른을따라 딸인양 몰래 들어가 영화를보던 재미가 나쁜 습관이되어 공부보다는 영화, 만화, 소설을 좋아하고 동네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는 취미만은 여전했다.
여고시절 천경자작품에 매료돼 잠시 동양화가를 꿈꾸던때, 국전에서 큰상을받아 지역신문에 실린 희재 문장호선생을 보게되었고 무작정 찾아가 초면에 당돌하게도 제자가 되고 싶다며 결국 육개월 넘게 사군자를 배우기도 했었다.
평소에도 인물스케치나 만화등 나름의 그리기는 지속됐고 수업중 몰래 그리기 외에 분필에 깍거나 껌을 재료로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얼굴을 만들어 쉬는시간에 보여주면 깔갈대며 즐거워해 만들기에도 재미를 붙였다. 학교수업시간엔 주로 한눈을 팔아 당연히 성적은 좋지않았고, 워낙에 오래동안 제멋대로 그려와선지 미대 입학을 위한 입시생들의 의례적 배움터인 화실도 적응이 않돼 포기했다. 그냥 집에서 내가좋아하는 유일한 석고상인 쥬리앙과 정물들을 내 방식대로 몇번 그려본게 전부여서 규격화된 화실그림의 세련된 솜씨엔 못미쳤다. 1969년 다행히 문제로 쥬리앙이 출제돼 집가까운 지방대학교 사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후에도 화가의 꿈은 늘 무의식속에 잠재해 있었다.
학과의 전공은 형식상 동.서양화와 디자인 조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당시 조소 담당교수는 홍대출신으로 인체소조를 제작하셨던 조용한 성품의 조재현교수 이셨다. 조소실은 실외 조각실습장 시설은 아예 없었고 실내 소조실만 그것도 4층에 위치해 있었다. 1973년 갑자기 대학을 퇴임하신 조재현교수 후임으로 전임이된 양두환선배는 국전에 큰상들을 수상했으나 다음해에 아깝게 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는데 당시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는 주로 학교밖 개인 작업장에서 목조에 열중해 신입생인 나로선 고작 한두번 마주쳤고 그외 선배도 한두명에 불과해 자주 볼수 없었다. 변변한 공구하나 없이 소조만 할수있는 작은 실기실은 수업외 시간엔 거의 비어있어 횡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인지 운명인지 왠지모를 친근감의 점토와 소조는 마치 절대 적성을 찿은듯 나를 열중하게 했다. 졸업할 즈음 계속 꿈꿔왔던 화가의 꿈은 까맣게 잊은체 나는 점점 예비조각가가 돼가고 있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의 사업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기울기 시작했고 하필 그 시점에 직장을 그만두게된 남편과 결혼, 변두리 작은 단칸방에 비키니 옷장과 소형라디오가 유일했던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결혼 한달후 벽지에 위치한 중등학교 미술교사 발령, 임신과 출산 등 1973년의 초봄부터 겨울까지 결코 만만치않은 내삶의 여러가지 변화가 한꺼번에 행해졌다.
자유롭고 별반 부족함없이 마냥 꿈꾸며 살았던 내게 현실은 너무 버거웠다. 소조를 할수있는 공간과 재료, 전기시설마져 없는 벽지시골학교 생활에서의 작품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나마 방학중에 광주 친정집에 머물며 어렵게 소품 한점을 완성해 초대전에 출품한게 활동의 전부였었다.
1978년 교직생활 5년만에 광주에서 한시간반 정도 출퇴근이 가능한 시골학교에 전입되어 다시 광주에서의 단칸셋방 생활이 시작되자 먼저 한평이 못되는 담벼락옆 공간을 확보했다. 휴일과 틈새를 이용, 심봉과 회전롤러가 없는 상태여서 기다림을 주제로한 120㎝크기의 작은 여인 입상을 석고로 완성해 그해 국전에 첫 출품하였고 결과는 입선으로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으로는 꽤 희망적이었다. 다음해 국전에는 출 퇴근과 살림살이 육아 등 여러모로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었으나 좀더 노력을 기울려 등신대크기의 모자상을 제작 출품했으나 낙선되었다. 뭐든 아니다 판단될때 포기가 빠른 성격인데다 대학재학중 순조롭게 지방공모전 성과로 졸업하던해 지역공모전 추천작가가된 후 조각가로서 처음 맛보는 좌절은 출품작품을 반출해 서울역에서 깨어 버리고 하광해 더이상의 국전출품을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무엇보다 내게는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내집마련을 위한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때문에 교직은 내게 유일한 수입원 이어서 도시근교로의 전입을 기다렸고 대학에 몸담고자하는 기회도 기다려 중등교직생활 12년만에 운좋게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더불어 조각가로서의 작업도 겸할 수 있게되고 은행융자를 얻어 변두리에 작은 내집까지 마련 셋방살이도 면하게 됐다. 뭐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나름 열심히 살았기에 삶에 필수적 기반을 갗춰졌으나 여전히 삶은 팍팍했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늘 가슴속에 있었다.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나역시 일찍이 사랑과 행복은 영원성이 없다는걸 께우쳤으나 현실을 부정하며 힘든 삶에 희망을 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듯 언젠가는 닥아올 이상적인 사랑과 영원한 행복을 위해 늘 노력하고 기다렸으며 모든 바램들도 함께 꿈꿨다. 이같은 바램은 나의 작품에 끈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형상으로 드러났다. 어쩜 그것은 의도적 표현이라기보다 나의 내면에 잠재된 관념적 여체형상과 더불어 삶의 이런저런 바램이 무의식적으로 융합돼 기다림이란 모티브로 귀결돼 오랫동안 작품으로 표출 되어졌다.
대학에 몸담은지 3년째인 1988년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은 여체의 일상적 형상미와 내면의 바램처럼 주로 기다림을 주제로한 나름의 형식을 추구해 보려는 작품들로 발표 되어졌다. 1990년 서울전과 이후의 개인전 작품들은 자연과 여체의 동화된 이미지와 순수한사랑, 가족, 기다림 등을 주제로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되 전시되었다.
여행중 봐 왔던 세계의 기념비적 조형물들은 내게 많은 느낌과 감동을 주었다. 주먹크기의 작은 작품도 보는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조각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 주어진 주제에 예산 걱정없이 규모있는 기념비적 모뉴먼트를 소신껏 창작해 남기고 싶은 강한 욕구는 내게 또 하나의 커다란 바램이 되었다, 어느날 모 건축가의 당선 프로젝트였던 광주학생독립기념관의 대형상징탑 계획에 부수적으로 계획된 인물군상과 부조작품들의 구상을 의뢰받은 나로서는 늘상 굼꾸던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3미터 이상의 인물 43인군상을 구상 계획했고 길이 9미터규모의 좌우부조 2면도 함께 구상한 대형 프로젝트 였다. 1992년 당선된 프로젝트인데도 발주처인 광주시청의 예산문제로 10년의 긴 기다림 끝에 2002년 제작설치의 기회가 왔으나 25억의 예산이 깍이고 깍겨 10억으로 줄어져 건설하청업체에 전자입찰 되었다. 사실 큰규모 작품의 최소한의 기본적 제작비만 남은 상황이었다. 되도록 원작자에게 의뢰토록한 광주시청의 요구를 무시한체 자회사에 득을 좀더 남겨보겠다는 업체의 줄다리기에 의해 결국 예산을 8억으로 낮춰 제작해 내겠다는 후배조각가에게 낙찰되었다. 오랜 꿈이였던 직접적인 나의 제작기회는 하루아침에 거품이되어 멀어졌다. 대부분 인물군상들의 등부위를 작품중심에 있는 바위에 붙여 예산을 줄이는 방법으로 나의 구상안은 아쉬운대로 후배작가에 의해 제작 재현되어 설치되었다.
그외 상무지구에 5,18조형물 공모에도 다른 작가들과의 컨소시엄으로 연2회에 걸쳐 응모했으나 두번 탈락된 후 큰 규모 프로젝트는 포기하게 되었다. 허나 작은규모의 공개공모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도전해 일부 당선되 설치됐고 건물앞의 조형물들도 의뢰받아 설치했다. 이와같은 작품들의 제작은 그간 주로 여체를 대상으로한 작품에 몰두해있던 나를 다른 관점의 조형작업에도 몰두하게 만들었다.
1993년 나에겐 뜻밖의 큰슬픔과 정신적 위기가 닥쳤다.
내가 유독 좋아해 가슴에 묻은 40대중반을 막넘어선 친정오라버니의 갑작스런 암발병, 투병과 수술, 사망. 그전에 먼저 뇌출혈로 쓰러지신 친정어머니의 9년간의 긴투병과 부모님의 생활부양, 이 모두에 필요했던 적지않은 비용부담에 대한 절박함과 남편의 여의치않는 사업 등은 나로하여금 조형물프로젝트를 따내기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않게 했고 사실상 그로 인한 수입은 치료나 부양, 생계유지에 큰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
1994년 4회 개인전은 피붙이인 오라버니 사망의 슬픔을 떨쳐내기위한 돌파구의 일환으로 갖게되었다. 이후에 다음 개인전을 개최하지 못했으나 생각과 관점의 변화로 작품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시도가 계속 되었다.
2000년이후 나의 작품들은 성적 욕구와 관련된 설치적 작품인 “젊은 오빠의 초상”을 제작하기도 하며 “이브”등 세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워낙에 익숙한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선인 성격인 나는 나날이 급속도로 디지탈화 되어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반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대해 왠지 아름다운 감성들의 사라짐 같은 안타까운 느낌이 있었다. 더불어 우리사회 가치기준의 빠른 변화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외적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이 인간평가의 우선적 척도가되어 구분이 않될 정도로 정형화되가고 있는 현실과 돈으로 인간이 인간을 애완견처럼 소유하려 하거나, 돈이라면 스스로 애완견을 자처하는 상황들이 보편화 되가는 모습들이다. 이같은 현실는 우리들의 영혼마져 기형을 초래할것 같은 기분에 나를 수시로 빠트렸다. 때문에 그것들은 내 가치관의 기반이였던 과거 순수시대의 향수와 그리움, 가능하다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본능적 바램과 교감되어 “점례의 초상”시리즈를 시작으로 나의 작품들은 영혼의 원초적 향수를 일께우려는 의도를 품기 시작했다. 오로지 아름다운 외모의 실현을 위한 일관된 집착을 성적으로 상징적인 부분만을 모아 강조하고 목과 눈을 생략하여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듯한 무의식적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서 그것들은 영혼없는 육신만으론 결코 진정한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어린시절부터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열망은 삶의 여정에따라 내 의지와 달리 평생을 교직에 몸담게 되고 말아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지금 이순간 작가와 교육자 어느쪽에도 충분하지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나름 능력의 한계내에서 교육자로서 노력했고 조각가로서 쉴틈없이 노력했음에 후회는 없다.
내게있어 정년퇴임은 신진작가로서의 새로운 시작이며 그간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온갖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로운 작품으로 소박한 바램을 계속 꿈꾸고 싶다.
숨막히게 뜨겁던 여름의끝자락, 빈물병 가득쌓인 작업장에서
2013.8.26 文 玉 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