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3-10-25 ~ 2013-11-16
무료
02.741.6030/1
주태석 ‘타블로’ 화법: 극사실주의를 넘은 시차의 세계
정연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기획/비평)
I. 지난 30년간 주태석의 작업을 설명할 때는 ‘극사실주의’ 논의가 늘 따라다녔다. 1970년대 후반에 제작된 <기차길>의 경우, 돌과 나무, 철로 등은 꼼꼼하게 처리되어 정연해 보이는 화면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캔버스 여기저기에는 페퍼민트 껌 통이나 바람에 나뒹구는 잡지, 신문 조각, 음료수 캔 등이 아주 우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당시의 제작 기법은 확실히 극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자연·이미지> 모티프로 작가의 관심이 이동하면서 세부를 마이크로 렌즈로 끌어당겨 부분을 확대하는 카메라 렌즈를 사용한 듯한 사진적 ‘타블로’ 형식(photographic tableau form)을 취하고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사진의 렌즈가 흔들리는 것 같은 회화적 타블로 형식(pictorial tableau form)을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후반, 극사실주의 화풍에 단초를 연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특정 소재와 주제를 이끌어 온 작가 주태석에 대해 이번에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을 이용해 조금 달리 살펴보도록 하자.
II. 먼저, 2000년대 제작된 주태석의 <자연·이미지>를 보자. 그의 풍경화들은 나무 한 그루가 캔버스 한 폭에 모두 들어가기 보다는, 나무의 하단과 상단이 모두 크로핑(cropping)된 것 같으며, 많은 풍경화들이 수평 구조를 갖추고 있다. 주로 가로가 길게 제작된 <자연·이미지>들은 깊이 있는 공간감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보다는 중첩된 나무 이미지에 집중하게 한다. 특히, 뚜렷한 실루엣과 형태를 갖춘 전경의 나무 둥지와 달리, 희미하게 쏟아있는 나무줄기들은 뚜렷한 빛의 출처도 그림자의 출처도 알려주지 않는 부유하는 이미지 형상 같아 보인다. 빛은 어느 곳에서 나오는 듯 하다가 곧 사라지고 만다. 실재의 자연에서는 부재하는 자연-이미지이자 풍경화인 것이다. 즉, 키아로스쿠로 기법에 어울리는 붓 처리를 마주치다가도 이내,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지 않은 ‘낯선’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주태석의 작업에 등장하는 중첩된 나무(주로 플라타너스) 이미지들은 내가 보고 있는 나무와 실제로 지각되는 이미지로서의 나무라는 두 이미지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경의 나무는 그림자 실루엣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는 ‘사실적인’ 풍경화를 ‘재현’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초기의 극사실주의 회화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의 풍경화는 이미지(나무)를 보는 행위, 읽는 행위, 지각되는 행위 사이의 미끄러짐(slippage)이 지속적인 긴장감과 감정의 이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타블로는 고요하고 청명한 숲에서 초록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환상과 일루전을 느끼게 하고, 색채라는 시각적 행위는 청각적이고 감각적인 센세이션을 순간, 순간 치환시킨다. 보는 것은 시각이나 지각적 행위와 직결되었을 뿐 아니라 감각으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전경의 나무와 그림자의 나무가 서로 불일치하고, 그림자의 실루엣 등은 스푸마토 기법의 효과처럼 사물의 경계를 뚜렷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초록색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초록색 기운이 도는 언캐니한 풍경화이다.
이러한 주태석의 이미지들은 조금 낯설면서도 계속해서 기억에 맴돈다. 또한 부유하는 이미지로서의 나무들은 “우리가 보는 건 원래가 허상”이라는 작가의 고백을 계속해서 되받아쳐주는 메아리이자, 기호이다. 그의 작품이 때로는 컬러풀한 고화질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스틸이미지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초현실주의자의 무의식적인 에너지를 표출하는 이유도, 일러스트레이션의 플랫(flat)한 느낌을 주는 이유도 이러한 작가의 미학적 태도에 기인한다.
III. 주태석의 회화는 가로, 세로가 크지 않은 작품들도 다수 있지만, 작업실이나 개인전에서 소개되는 대형 작업(<자연·이미지>: 100x200 cm; 100x360 cm. 등)들은 시간성을 느끼게 해주는 매체적 특징을 띤다. 그의 작업에서는 재현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면서도 이를 완만하게 거부하는 이미지의 반작용이 타블로의 스케일과 함께 조화롭게 작용한다.
이제 이 글의 제목인 시차(視差: Parallax)로 돌아가자. ‘시차’는 관측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물체나 사물의 위치를 일컫는 말이다. 고대 천문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이 사용했던 용어이면서 최근에는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변적 철학적 논고를 떠나, 주태석의 작품에서 ‘시차’는 대상(그것이 어떠한 이미지이든)의 형태와 형식에 상관없이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본질과 일루전을 교차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젊은 시절 스스로의 눈과 지각을 믿으며 자연과 일상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수년간 작가로서의 실행은 (혹은 수행은) 보는 행위에서 지각하고 사고하고 생각하는 행위로 전환된 것이다. 눈으로 ‘자연의 소리’를 듣고, 손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본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실제로 작품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하기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러한 감각의 확장이자 자연 본연의 상태와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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