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의 근작들: 'Liquid Crystal' 연작의 의미
홍지석 |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미성의 근작들은 모두가 'Liquid Crystal'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이름은 내 관심을 끄는데 왜냐하면 ‘흐름’, ‘액체상태’를 뜻하는 ‘Liquid'와 ‘결정(結晶)’, ‘고체상태’를 뜻하는 ‘Crystal'의 공존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이 작가를 따라 다음과 같은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호박(amber)속의 곤충: 호박은 나무의 수액인 송진이 뭉쳐서 굳은 보석이다. 그리고 호박 속 곤충은 그 곤충이 송진(흐르는 액체) 속에 갇힌 순간을 응결시켜 보여주는 고체(보석)다. 그렇다면 ‘호박 속 곤충’은 액체와 고체의 동시적 공존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비커 속의 물: 비커 속에 담긴 물은 고체인 얼음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액체와 고체의 동시적 공존을 생각할 수 있다. (‘비커 속의 물’이라는 비유는 이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서문에 등장한다)
3) 물(物) 기척: 이것은 이 작가가 기획했던 전시의 제목이다. 기획 글에서 이 작가는 사람을 닮은 석고상에도 인기척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물건이 풍기는 살아있는 듯한 존재감을 이 작가는 ‘물(物)기척’이라 칭한다. 물기척은 정적인 것(物)과 동적인 것(기척)의 동시적 공존을 지시한다.
물론 1), 2), 3)의 사례는 액체/고체, 동적인 것/정적인 것의 동시적 공존을 실현하기보다는 다만 지시 내지는 암시할 따름이다. 따라서 사례들에서 ‘Liquid Crystal'은 아직 개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아직 개념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여 가시화하는 일이 가능할까? 예컨대 겉은 정적이고 속은 동적인 상태, 또는 고체와 액체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가상의 물질을 가시화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이 바로 미성 근작들이 기초하고 있는 근본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작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새로운 물질을 빚어내거나 가시화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희망은 사실 미성의 것만은 아니다. 가령 우리는 모든 사물에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거의 모든 문명권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사원(성당)의 석재 기둥이나 벽면을 인물형상(figure)으로 장식하는 관습은 많은 문명권에 존재하는데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돌을 단지 건축 재료로 보지 않고 다른 어떤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분수대나 화분, 그릇에 새겨진 인물형상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인물형상들은 형(figure)을 취했으나 아직 동(動)을 얻지 못했기에 여기서는 아직 애니미즘이 믿음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 인물형상들에 움직임(動)을 부여하면 어떨까? 미성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 작가는 그릇의 손잡이, 받침대, 또는 귀걸이, 목걸이에 장식된 춤추는 정령들(인물형상들)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여기서 3-D 영상작업은 정적인 것에 동적인 것을 결합하는 최선의 방식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여기서 움직임의 궤적은 그것이 속해있는 사물의 전체형태를 따라 진행되기에(즉 정령의 행동이 물체 형태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사물의 전체 형태 또한 변함없이 유지된다. 여기서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전화(轉化)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난다. 첫째, 정적인 인물형상은 움직임(춤)을 얻게 된다. 둘째, 전체 형상(그릇, 목걸이, 귀걸이 등의 형상)은 외관상 변함없이 일관되게 유지되나(靜), 그 변함없는 것은 내부에 움직임을 간직한다. 여기에 더해 외관상 단단해 보이는 그릇이 실은 가변적인 디지털 이미지라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요컨대 미성의 근작들에서 겉은 ‘정적이고 속은 동적인 상태’가 여러 방향으로 가시화된다. 이런 방식으로 애니미즘은 믿음의 차원에서 현실의 차원으로 구현될 것이다.
이쯤해서 그 인물형상을 지칭하는 영단어가 피규어(figure)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왜 영어에서는 피규어라고 명명할까?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배경(ground)에 대해서 돌출해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 소위 ‘형상-배경의 법칙(figure&ground law)’이 그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figure)을 주목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ground)은 적당히 뒤로 물리는 능력은 유기체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경으로부터 형상을 끄집어냄으로써 평면적인 것(2-D)이 입체적인 것(3-D)으로 된다. 피규어는 수사학에서도 사용하는 단어다. 수사학에서 이 단어는 통상 문채(figure)로 번역된다. 쥬네트(Gérard Genette)나 코앙(Jean Cohen) 같은 현대 수사학자들은 문채를 표준(norm)으로부터의 일탈(deviation)로 규정한다. 단어는 일상의 표준적인 문맥으로부터 일탈되었을 때 비로소 문채를 갖게 되고 문채의 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시적인 것이 작동된다. 요컨대 심리학에서든 수사학에서든 피규어는 분리 내지는 일탈과 더불어 출현한다. 그리고 피규어의 출현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는 ‘입체적인 세계’, ‘시적인 세계’를 말할 수 있다. 미성의 피규어는 어떨까? 이 작가의 피규어들(인물형상들)은 눈앞의 사물을 사물로서 보지 않고 다른 것-영(靈)으로 보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D를 3-D로 전화시키는 작업방식, 'Liquid Crystal'에서 보듯 일상의 어법에서 벗어난 단어사용은 이 작가의 작업이 ‘분리’, ‘일탈’을 전제로 하는 피규어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렇게 피규어의 관점에서 작업하는 작가에게 고민은 죽은 피규어들이다. 배경으로부터 항상 동일한 형상만을 끄집어내는 지각,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단어를 표준으로부터 일탈시키는 시작(詩作)은 죽은 피규어들과 함께 있으며 새로운 입체, 새로운 시를 생성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죽은 피규어들을 소생시켜 생동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일을 미성을 따라 정적이고 속은 동적인 상태, 또는 고체와 액체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가상의 물질을 창안하는 일이라 지칭해도 좋지 않을까? 리쾨르(Paul Ricoeur)의 표현을 빌면 일탈은 감각될 수 있을 때 낡은 의미에 새로운 의미들을 채워 넣는다. 그는 이것을 ‘감각된 일탈(sensed deviation)’의 창출이라고 지칭했거니와 나로서는 'Liquid Crystal'을 그 구체적 실천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