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소피스트의 오브제
황대열 작품전
정용도 / 미술비평
BC 5~4세기 그리스 지역에 존재했던 소피스트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었다. 그들의 지식은 현상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을 향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은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것에 있었고,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 이후 정착되어온 철학적 진리의 탐구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 선과 규범이나 지식의 본질이 아니라 지식의 유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식이 유용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 어떤 차원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신의 역사에서 지식의 문제는 철학의 차원이고, 철학은 지식을 가지고 어떤 한 체계를 구성해 인간의 정신 작용과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철학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이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체계화 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삶의 유용성과 관련된 정보들을 정신의 과제로 상정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소피스트적인 지식은 이 세계의 현상과는 대립되는 자연적, 인공적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드는 결과들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피스트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정신적 지향성이 지식의 문제를 삶의 문제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세계와, 이 세계의 현상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 합리성을 지향하는가 아니면 구체적인 행위나 자연적 과정의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세계를 어떻게 추론하고 대응하는가의 문제는 분명히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정제된 오브제의 생산자로서의 작가에게는 모방과 은유의 차원에서 혹은 재현과 상징의 차원에서 다시 새롭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황대열의 작품에서 해체된 신체를 본다. 그리고 그 신체들은 각각이 보편적 추론의 세계로 도피할 수 없는 표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표정들은 뒷모습, 혹은 엉덩이 같은 것들로 제시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이런 물질적인 상황을 그의 시를 통해 다시 정신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킨다.
“당신
내 꿈속으로 오려거든
싼띠아고의 종처럼
빛으로 오세요”
추론해 보면 작가는 이 시에서 그의 예술적인 여정을 ‘꿈’에 비유하고 있고, 예술을 ‘싼티아고의 종’에 비유하고, ‘빛’을 자신이 도달해야 할 예술적 여정의 최종 목적지로 상정한다. 그의 시를 통해 본 그의 예술은 사랑과 사랑의 관계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이다. 작가가 시를 쓰고 많은 것들을 물질적으로 표현을 하지만 그의 글 속에서 그런 물질적 관계들은 자신의 고독과 삶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방랑자의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 특히 그가 여행을 하면서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들과의 직접적인 혹은 은유적인 관계들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점점 물질적인 흔적으로 재현할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소피스트들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으려 여행을 다녔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작가에게는 예술이 소피스트적인 활용성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모여 살면서 도시라는 걸 만들었지.
도시는 모든 종류의 더러운 것 악한 것을 갖고 있어
어떤 면에서 작가에게 인간의 삶 자체는 예술을 통해 지양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도시의 악은 인간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그는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 인간의 도시를 항해한다. 그에게 도시는 개발된 곳과 낙후된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 그의 삶은 낙후된 도시에서 보이는 쓰레기가 쌓여있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가 발견하고 싶은 순수함이 존재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에게 이방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오지만, 그는 그들에게서 아직 타락하지 않은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고 다가간다. 여기서 여행을 통해 예술을 부정하는 과정이 존재하고, 타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부정된 예술을 삶으로 종합하려는 과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종합은 아직 순수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통해 그것을 종합하려 하는데, 그에게 섹스는 종교처럼 일상화되어 있고, 예술의 종교적 기원이 세속화의 과정을 걸어왔던 것처럼 그의 삶의 세속적 특성은 사랑을 하나의 오브제처럼 섹스로 범주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존재한다. 그는 그런 과정들을 경험으로 고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요유」에서 장자의 태도처럼 삶의 경계들을 무너트리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장치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경계들은 기록을 통해 텍스트화 되었고, 인간들은 텍스트를 통해 경계와 구분들에 합리적인 체계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배제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범주적 경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은 합리적인 추상을 통해 지시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기의적인(signified) 의미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표현한다:
우리 모두들 너무 급하게 시간을 써 버렸나봐!
얼마 남았나 계산도 하기 전에 말이야!
이제라도 남은시간을 계산해도 늦진 않을 것 같애!
그에게 문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우리 인간에게 다가온, 그가 연옥처럼 반길 수 없었던 문명의 테두리는 그를 어느새 타자화시키는 장치가 되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다시 ‘남은시간’을 자기 삶으로 가지고 들어와야만 한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삶은 예술적인 깨달음의 세계이고, 스스로 이 세계와 대결할 수 있거나 아니면 이 세계에 순응할 수 있는 역동성을 내재하고 있는 시간을 지닌 삶이 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예술은 유사성의 차원에서 맥락의 차원으로 전이되어 간다. 여성의 전신상이나 단순히 몸의 부분들로 표현되었던 그의 경험적 작품들이 여인들의 뒷모습(엉덩이 부분으로 해체된)을 통해 감각적 직접성을 지닌 기표의 세계로 복귀하고 있고, 작품의 기표적인 특성들은 작품이 하나의 완전한 몸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의미, 예술적 의미가 보편화되어 있는 정신의 지표적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에게 몸이라는 오브제는 부정에 의해 스스로 해체되어야만 하는 감각적 대상이지만,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그의 삶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면 또한 의미의 차원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필연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작품의 보편적인 의미들은 맥락의 세계로 종합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대열의 작품에서 본질적인 것은 예술도 아니고 삶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해 삶의 진리를 전달한다거나, 삶의 진리를 예술을 통해 표현해야한다는 플라톤적인 설명이나 헤겔식의 예술에 대한 목표지향적인 공리적 주장들은 더 이상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미술을 설명해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비본질들을 부정하고 있는 과정이고, 미시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비규정성 안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이라면, 그에게 예술과 삶은 이론적인 개념들을 통해 포장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도시의 작은 구석에선
사랑이 피어나고
때론 사랑이 증오를 낳고
증오는 자신을 분해하고
그 분해된 증오는 연민을 낳고
다시 연민은 사랑을 낳고.......
의미의 수사학이 아닌 삶의 체험에서 비롯된 의식의 규정,즉 현실은 헤겔의 말처럼 이성적인 것이다. 그에게 현실은 예술적 형식의 규정성 안에 존재하는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 사유와 그에 따르는 존재 형식의 물화된 현상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황대열의 작품에 헤겔의 현실과 이성을 변증법적으로 혹은 계기적인 부정성을 적용한 관점이다.)
황대열에게 여성의 전신 좌상 등의 조각상들이 예술의 성질을 질료에 담아내는 것이었다면, 최근 작품(엉덩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들은 예술을 질료와 형식의 직접성으로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 작가는 전신상에서 예술을 존재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전신상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성들은 예술이라는 개념에 의해 매개된 이념의 잔상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이 있음과 없음, 혹은 일인칭과 삼인칭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 이전의 어떤 순수성에 관한 질문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경험적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개념들에 의해 매개되지 않음으로서 비규정적이면서도 스스로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 헤겔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궁극적인 의지나 정신 혹은 자유일 것이다.
탄생과 소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개념적인 몸(순수성 자체의 표상으로서의 예술에 비교할 수 있는)은 이 세상에서 기술과 문명의 범주를 다 표용할 수 있는 궁극의 매체일 것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기술이 유기적인 인간의 몸을 닮은 형식(인터페이스)을 찾으려고 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 존재의 특성들에 의해 매개될 수 있는 기술을 찾기 때문인 것이다. 황대열의 작품에서 유기적인 인간 존재의 특성들은 삶을 통해 의식의 형식적 경계들을 지워 나아가는 과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경계들을 지워 나아가는 행위는 본질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본질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태도는 다분히 물질적이다. 그의 <커다란 엉덩이 작품>에서 원시시대의 조각상들에서 보이는 생략과 직관적인 차원에서의 의식의 부정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통해 그는 예술을 비매개적인, 말하자면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의거하지 않는 차원으로 열어놓는다. 여기서 그의 예술의 부정의 과정 시작된다. 이는 예술적인 노동에 의한 예술의 부정을 통해 예술을 예술가적인 의식의 무한한 자유로 해방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술의 무한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예술을 무한의 상태로 열어놓는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적인 것, 직관적인 것, 예술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되고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자기 예술의 정체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질로의 지향을 통해 작가는 예술적 형식의 규정과 존재성을 예술적 행위의 운동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본질을 지향할 뿐 본질이 목적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질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그의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내적인 타자, 즉 의식의 규정안에 작용하고 있는 미학적 의식, 개념적 구별, 본질로의 복귀라는 형식적인 반성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예술을 운동 상태 그 자체로 변화시킬 수 수 있는 것이다. 배제와 대립의 미학에 무관심과 우연성을 포함시키고, 삶의 모순들조차 예술적 전체를 존재의 관계성으로 순환시키는 운동의 상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한성을 예술의 인과성에 비유하여 어느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존재성에 개입하는 과정의 다양한 형식적 요인들을 운동을 통해 유기적 생명의 과정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본래 자연으로서의 기원을 갖는 형식, 말하자면 예술적이라고 전제되는 요소들을 변화의 유기적인 과정, 운동이라는 유기체의 본질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관점을 지닌 객관적인 규정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본질이 스스로 변화를 겪고 있다면 거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정신의 내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운동 에너지들을 통해 현실로 드러나야만 한다. 예술이 직관이라고 한다면, 황대열은 직관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고, 최소한 직관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자신의 삶으로 복귀시킨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예술에 대한 반성이 수반되는 부정의 과정이 발생한다. 부정을 과정을 겪으면서 황대열과 같은 예술가는 진리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 자신의 삶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 하는 이 세계를 향해 예술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소피스트적인 연금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적 표상의 형식들을 의미나 개념이 아닌 구체성을 지닌 운동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싼티아고의 종처럼 빛으로”라는 그의 표현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예술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직접적인 현실들에 관한 반성과 실천의 형식이라는 것이 그의 작품을 통해 혹은 그의 언어적인 시구들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황대열에게서 예술이 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는 계기는 그가 자신의 작업행위를 순환의 운동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사랑과 증오 역시 해체되는 것이고, 삶의 지난한 과정들이 스스로를 다시 관조적인 삶의 운동으로 지향시키는 계기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 혹은 예술 오브제들은 지식이나 진리를 찾아가는 객관적 대상들의 형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재생산하는, 말하자면 이미 의미된 것들을 자신의 삶의 운동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욕망의 주름들이 되고, 의지의 개연성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소피스트적인 실천의 차원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술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예술을 정신적인 ‘과정’으로 변화시키고, 다시 삶으로 승화시키는 해체와 운동의 변증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과 예술은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변증법적인 운동 상태 자체의 현현에 가까이 있고, 그래서 가능해지는 세계인 비규정적인 예술의 세계가 탄생하고, 그로 인해 그의 예술작품은 현실의 세계에서 수많은 자유의 계기들을 내포한 소피스트의 오브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