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내용
20여 년간 고요함 속의 응시를 표현해오며 명상성을 모티브로 작업해 온 박항률 작가의 개인전(2013. 12. 6– 2014. 1. 4)이 가나아트부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 동안 전시를 통해 보기 힘들었던 70년대 수채화 작품 10여 점과, 90년대 틈틈히 작업해 온 브론즈 작품, 펜과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 작품과 아크릴화까지 박항률 작가의 청년기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세계를 구석구석 엿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다.
박항률 작가의 작품은 명상적, 서정적 화면 구성을 통해 보는 이에게 따뜻한 신비로움과 평화로운 모성의 가슴을 제공해 준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 속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통해 작품 속 인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서로 교감하고,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오프닝에는 박항률 화백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정호승 시인이 함께 참여하여, 서로의 작품세계를 공유하는 “시와 그림의 동행” 대담회도 준비되어 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시집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서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으며 좋은 파트너로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전시서문
인간 내면의 고독한 아름다움
정호승_시인
나는 때때로 박항률 화백의 그림 속 인물이 되고 싶다. 박화백의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을 볼 때마다 혹시 내가 저 그림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그만 내가 박화백의 그림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적인 행보해질 때가 있다.
어느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날, 꽃들이 만발한 산속에서 꽃바구니를 무릎 위에 얹어놓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은 어쩌면 전생의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디 소녀뿐이랴.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비둘기를 꼭 껴안고 그 동안 아무한테도 말 하지 못했던 내 삶의 이야기를 그 비둘기에게 고백하고 있는 듯하다.
박화백의 그림에는 꽃과 새가 많이 등장한다. 그는 이 세상의 많은 꽃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많이 그린다. 아마 매화가 지닌 고매한 인고의 순결성을 닮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꽃의 특징을 섬세하게 살려가며 그린다기보다 꽃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그린다. 그래서 그의 화폭에서 피어난 꽃들은 모든 은유의 꽃이다.
나는 박화백의 그림 중에서 젊은 여인의 머리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늘 숨이 딱 멎는다. 인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저 새는 바로 내 영혼의 구체적 모습이다. 만일 내 영혼의 모습이 날카로운 돌멩이거나 구겨진 지폐라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가. 내 영혼이 한 마리 새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오늘의 내 삶이 맑고 순결해야 하나 그렇지 못해서 박화백의 그림 앞에서 늘 내 심장은 멎는다.
나는 또 박화백의 그림 속 인물과 새가 서로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저 새와 소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잔뜩 귀를 기울이며 나 나름대로 무한한 상상의 대화를 엿듣는다. 그러다가 그만 내가 그림 속의 인물이 되어 그 새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한번은 나도 모르게 그 새에게 "난 너를 사랑해!"하고 말한 적도 있다.
박화백에게 새는 인간 영혼의 존재다. 그는 "사람과 가장 가깝고 친근한 새이기 때문에" 참새와 비둘기를 가장 많이 그린다.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노트르담 성당에서 모이를 가진 한 중년남자 주변으로 새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고 그는 인간과 새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 중앙광장에서 비둘기떼들이 인간과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것을 보고 인간과 새의 영혼이 서로 교감하는 일체된 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박화백이 새를 그리게 된 것은 대학생 때부터다. 처음에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많이 그렸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에서 대학생 박항률은 '참나'를 찾아가는 구도적 자기 탐구의식이 발로되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새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라는 그러한 인식은 지금도 그의 그림에서 주조를 이룬다.
박화백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새를 많이 그린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박화백이 그림으로 드러내고 싶은 자신의 내면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새와 꽃은 내 인생의 동행자이자 동반자의 의미를 지닌다"는 그의 말 또한 자연적 존재야말로 인간이 동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새는 항상 인물이나 사물의 끝에 앉아 있다. 그는 인물의 머리 위나 손가락 끝에, 또는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새를 그린다. 심지어 한 마리 나비나 잠자리조차 대금이나 풀잎의 끝에 앉아 있게 한다. 왜 그럴까. 그러한 가장자리의 세계, 끝의 세계, 그 절정의 세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화백은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솟대 끝에 앉아 있는 새의 이미지를 빌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 고독의 극단을 의미하는, 절대고독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박화백은 인물을 그리되 여러 사람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군상(群像)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화폭에는 항상 단 하나의 인물만 등장한다. 이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인물은 다른 사람을 모델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그리는 것이다. 내 존재에 대한 다양성을 드러내고 비쳐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내 속에는 소년도 있고 소녀도 존재한다. 그림 속의 인물이 조용히 앉아 있지만 실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 속의 '고요한 동적(動的) 인물'에서 나는 외로움보다는 고독을 느낀다. 그의 인물은 항상 고독한 존재다. 고독은 상대적이고 사화적 의미를 지니는 외로움과 달리 절대적이고 존재적 의미를 지닌다. 절대자와 인간인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부분, 그런 절대고독의 모습이 그의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이다.
오늘은 "사람은 때때로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그의 그림 속 인물을 통해 묵상해본다. 절대고독의 영역에 있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성찰해본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가장 아름다워지는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고독한 성찰의 세계에 머물 때 가장 아름다워진다. 박화백의 그림 속에 앉아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을 살게 된다. 박화백의 그림을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그림 속의 인물과 내가 하나가 됨으로써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박화백은 "내가 그림 속의 인물을 보기도 하지만, 그림 속의 인물 또한 나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객체와 주체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고독한 영혼의 교감을 통해 서로 영원한 일체감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림에서든 조각에서든 내 작품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나는 박화백의 그림 속의 인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 현생의 삶을 사는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쁘다. 특히 이번 부산 개인전에서는 박화백의 청년기 때 그림과 평소 보기 힘들었던 조각까지 볼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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