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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준,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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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준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2013.12.18-01.30
전시오프닝 2013.12.18(수) 18:00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 동물, 감정, 감각, 여러 사물과 사건들, 내 주변에 있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지, 왜 존재하는지 하는. (작업노트)


이세준의 화폭은 무수한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그것은 오로지 색으로만 표현되고 있어서 시각적인 일렁임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늘과 숲, 물 등 자연물로 이루어진 풍경에는 동식물들이 복잡하게 엉켜있고 곳곳에는 인체들이 정육점에 매달린 양처럼 핑크빛을 띤 채 속속들이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도 하고, 풍경과 섞여서 모습이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칠해진 붓자국이 섬세하기도 하고, 때론 그 붓자국 자체만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쉽게 눈치 챌 것 같이 익숙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화면 전체가 혼란스러워서 낯설고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이야기 같으면서도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의 그림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는 데 화면구성이 구조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가능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다가 오직 색만이 존재하는 세계처럼 표현되어서 무엇보다 회화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의 작업을 보면서 고갱의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위대한 작품을 연상하였다. 숲이든 인체든 색채든 구도든, 닮은 요소들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세준은 “그는 왜 낙원만 그렸을까”라고 말한다. 그는 낙원과 나락이 같이 있어야 세계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분히 실존적이다. 그는 우리를 포함하지 않는 외부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고 지금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이성으로 세계를 구성하려고 했던 기획이나 종교적으로 세계에 종속되기 위한 시도 보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림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세상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무진장할 것이다. 그러한 무한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하고서 화폭에 담으려고 하니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근법을 적용해 광경을 포획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한정지어진 화면에 세계를 담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세준의 그림에서 이미지나 형상보다 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그가 시도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색은 변하기에 생생하고, 선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색보다는 형태를 중시하였다. 근대미술비평의 장을 연 로제 드 필(Roger de Pile)이 예술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구도, 드로잉, 표현과 함께 색채를 포함시키면서 색과 선의 논쟁이 시작하였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루벤스가 푸생을 제치고 최고점을 받았다. 그는 색채주의자인 티치아노를 라파엘로보다 높이 평가했다. 색채로 형태를 드러내는 그림은 일단, 알베르티의 원근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원근법은 색을 가두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는 선으로 실제하는 색을 표현하려다보니 세계를 완벽하게 묘사하려던 의도와 달리 오히려 세계의 생생함을 제거한 채 표면만 남은 박제로 만족해야 할 뿐이다. 색을 기준으로 그림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것은 사뭇 유치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를 기점으로 고전과 현대회화의 논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 당시 무척 중요한 문제였고 그의 의견이 살롱들을 통해 힘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건, 현대의 회화가 원근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만큼 색채를 존재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색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보는 자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며, 회화는 색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에 세계를 오직 색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서 온전히 색으로만 자연을 표현한 세잔의 후예처럼 이세준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화가로서 색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자연을 되살려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색채뿐이네. 선들은 색조들을 마치 죄수들처럼 가두고 있지, 나는 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어. 나는 떠도는 것들을 손에 잡으려 한다네. 왼쪽, 오른쪽, 여기, 저기 어디서든 그것의 톤과 빛깔과 뉘앙스를 포착해 결합시키는 거야. 그것들은 선이 되고,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물이 되고 바위와 나무들이 된다네, 그것은 부피를 가지고 밝기를 지니지. 만약 이 부피와 밝기가 캔버스에 들어맞고, 내 감성에 들어맞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구도와 배색을 갖춘다면 그걸로 된 걸세.”(세잔) 이는 세잔이 젊은 시인인 조아생 가스케에게 한 말이지만, 이세준의 작업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기도 하기에 마치 이세준에게 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세잔이 풍경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했다면, 이세준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사건들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 회화 안에는 일상과 미디어에서 발견한 이미지들, 그리고 의미의 추적이 불가능한 모호한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다양한 관계를 이루며 화면에 배치되고, 각각의 독립된 사건들을 이루는 주체가 되며, 화면 안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작가노트)

이세준은 객관화될 수 없는 세계를 화폭에 담기 위한 방법으로 기억과 형용사를 사용한다. 그의 그림에는 색을 통해 자연이 보인다기 보다, 색으로 인해 일렁이는 사건들이 보인다. 색들이 서로를 넘나들려고 하면서 긴장감을 형성하고 그러다가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루이스캐럴의 <이상한나라의 엘리스>에는 웃음짓는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고양이가 사라지고도 웃음만 남아있는 묘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형용사가 존재하고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구체적일 수 있을까. 색이 형용사 자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선을 통해 형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재된 색들로 인해 형상들이 드러나는 표현이라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이 이세준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도록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가 세계를 담기 위해 표현하고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낙원과 나락이 혼재하는 무정형의 세계에서 말이다.
 
박순영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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