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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돌로 생각하다전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14-05-27 ~ 2014-06-10

  • 참여작가

    김병규, 노준진, 김희용, 김경훈 김원근, 김성은, 김재호, 김정희,김성복, 노승옥, 민복기,박근우, 박성하, 이행균, 이호철, 이명훈, 이서윤, 이선화, 이혜영, 이명섭, 이진희, 임호영, 양계실, 유지혜, 윤수현, 손인환, 장성재, 장수빈, 최하나, 하이얀, 황빛나

  • 전시 장소

    갤러리일호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02-6014-6677

  • 홈페이지

    http://www.galleryilho.com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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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점·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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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뷰어

 

 




 

 




<전시 소개>

돌로 생각하다


  돌의 속성은 ‘단단함’과 내구성에 있다. 현생인류 이전부터 지상에 존재하는 공기, 물, 불과 같은 기운들이 집약되어 형성한 돌은 표면부터 내부에 이르는 그 균일한 ‘단단함’으로 존재를 규정한다. 가볍고 따뜻하며 유연하던 이전의 생생한 시간들은 응축(凝縮)이라는 망을 통해 시간의 벽을 넘어 현재의 물질로 대면케 한다. 돌, 그것은 물질화된 시간인 것이다. 이 개념의 현물화는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존재원리의 가장 가장자리, 그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위치한다.

돌조각,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서양건축에서 조각이 독립한 것은 르네상스 때였다. 석조건물의 부속 장식으로부터 독자적인 장소를 점유한 예술로 위치한 그 화려한 부활의 시대 중심에 미켈란젤로가 있었다. 오늘날 시스티나 성당 천장벽화에서 <노아의 홍수>를 비롯한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회화를 만날 수 있지만 정작 그는 교황 율리우스2세가 프레스코화를 그리라고 명하자 거부했었다. 자신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기 전에 캐내어진 엄청난 크기의 대리석이 당대 유명 미술가인 두치오에게, 다시 로셀리노에게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도 조각상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미켈란젤로에게서 형태를 찾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리석에서 천사를 발견하고, 그 천사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조각을 한’ 결과 그 거대한 대리석상은 다비드상으로 현현하였다. 찡그린 미간, 잔뜩 긴장하여 터질 것 같은 손등의 핏줄에 이르기까지 순간의 집중과 긴장을 극대화하여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다비드의 승리는 비단 종교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 되었다. 덩치만 큰 우매함에 대한 날카로운 지성의 승리는 바로 인간 의식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함을 미켈란젤로는 보여주었던 것이다.
‘돌 안에 깃든 형태를 찾아내 생명의 드러냄’은 예술에서의 신화이자 조각의 본질이다. 피그말리온이 완벽한 여자의 형태를 물체에서 끄집어낸 이후 조각가는 물질에서부터 생명을 창조하는 이로 각인되었다. 가장 단단하고 불변하는 돌에서부터 길어 올려진 형태는 생명의 근원지인 흙에서 싹트는 모든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은유이다. 신라시대에 석탈해가 죽자 그의 뼈를 바수어 흙과 함께 섞어 소조상을 만들었다거나 원효가 죽자 또한 그의 화장한 뼈를 바수어 흙과 섞어 소조상을 만들어 안치하였는데, 그의 아들 설총이 와서 인사하자 고개를 돌려 보았고 그 상태로 있다는 기록을 전하는 『삼국유사』에는 “유가종(瑜伽宗)의 조사(祖師) 고승(高僧) 태현(太賢)은 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 그 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 태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태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전한다. 신체를 고스란히 물질로 재현한 소조상이 아닌 돌로 만든 불상에도 그 성격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소조상과는 확연히 다른 돌 그것도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에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굳이 신체의 일부를 넣지 않아도 돌 안에 이미 불성(佛性)이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시아 3국에서도 중국은 소조불, 일본은 목조불인데 한국은 ‘석불의 나라’,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돌탑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은 견고한 재료인 돌을 다루어 무언가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지형, 지질학적 이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새로운 재료를 자재로이 구할 수 있는 현대에도 여전히 ‘돌’을 재료로 할 뿐만 아니라 표현의 방식으로 삼는다는 것은 한국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나아가 미켈란젤로처럼 돌 속에서 끄집어내는 형태에 대한 오래된 도전을 지속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 한국 조각계에서 ‘돌’은 이전과는 분명 다른 위상인데, 그것은 장르를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복합성에도 있겠지만, 작가의 노동에 대한 가치변화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내부에 든 형태를 감정을 통해 끄집어내려면 일단 정을 들고 망치질을 해야 한다. 말 그대로 돌가루 날리는 노동의 현장에 오롯이 존재해야 하는 석조에 대한 작가의 부담은 노동에 대한 부담이다. 그리하여 ‘도안’을 제공하고 이태리 돌 공장에서 숙달된 장인의 손을 통해 땀땀이 세밀하게 조각해져 보내져온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현대 작품의 생산시스템의 일부로서 당연한 것이다. 사실 과거에도 심지어 르네상스에도 작가들이 모두 망치를 들어 조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외교업무로까지 엄청 바빴던 화가 루벤스의 수많은 작품들이 모두 루벤스의 작품인 것처럼, 굳이 작가의 생산시스템을 부정할 일은 아닌 탓이다. 그럼에도 장인적 노동이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 예술가가 갖는 숭고한 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망치를 들어 돌을 다듬는 조각가를 만나는 일이 가슴이 뛰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31명의 작가들이 ‘돌’을 주제로 전시를 한다. 그저 돌이라는 재료 그 자체가 작품의 질료가 되는 전시이다. 견고한 돌을 앞에 놓고 그들은 ‘돌로 생각하다’라는 명제를 붙였다. 재료인 돌에 천착하는 이 명제는 작가마다 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혹은 어떻게 접근하고 다루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지난해에 이어 연속적인 전시의 형태는 이들 작가들이 ‘돌’을 탐구하는 조각을 지속할 것을 천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영원히 신성한 것들에 대하여
김성복의 도깨비방망이, 걸어가는 인간, 호랑이들은 역사적 맥락에 위치하여왔다. 그것은 민담 혹은 민화의 도상을 차용함으로써 전통의 해학을 담보한 것이기도 했다. 도깨비방망이 형태를 한 꼬리의 해치 세 마리가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작품은 특유의 해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부드러운 모델링, 상호 유사하지만 크기에 따른 근육의 미세한 차와 형태 그리고 이들의 쌓인 구조는 마치 한 가족과 같다. 동물 형태에 인간세상을 은유하고 반복을 통해 강조를 하는 그의 돌조각은 한없이 부드러우며 따사로운 형태 이외에 다리 사이를 깎아 새기는 표현과 등어리의 미묘한 연관선 속에서 깔깔한 화강암 조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한편 김성은은 잘라낸 형태 속에서 동물을 유추하게 하는 형태를 보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것과도 같은 형태와의 결합은 심리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평화로우며 안락한 이미지 속에서 강하고 딱딱함은 무장해제되고 땅과 공기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준진은 화강암을 비롯한 몇 종의 돌을 결합하여 거대한 뿔이 난 네 다리의 동물을 보여준다. 굵고도 장엄한 뿔과 굵직한 다리와 기다란 몸체의 동물은 귀여운 얼굴에서 사슴을 떠올리면서도 그 휘어진 웅장한 뿔에서 고대 신화 속 거대한 툰트라를 헤치며 지나는 사티로스를 떠올리게 된다. 반면 박성하의 곰인형은 재료의 물성을 넘어선 표현의 자유로움을 만나게 한다. 돌로 만든 곰인형의 불편한 봉합은 세상사에 대한 은유라 하겠다.
귀여운 캐릭터의 사용은 전통성을 담은 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의외성을 느끼게 한다. 이명훈의 캐릭터는 말랑말랑하고 유동적인 일본 애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가 견고한 돌로 새겨져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친근감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견고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일깨운다. 김병규의 강아지 모양은 마치 여성의 팔찌 끝에서 달랑거리는 AGATHA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물론 정확히 그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절단된 돌의 어떤 실루엣을 강아지 모양이라 생각하는 순간 광고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될까에 대해 진지한 물음이 제기되는 순간이다. 컵을 붙잡고 있는 듯한 이선화의 개구리를 보며 결코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 다양한 표현에 열려 있는 돌조각 앞에서 견고한 전통의 조각적 개념은 말랑말랑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입을 벌린 악어를 생각하게 하는 장수빈의 실루엣은 조각의 모델링을 기본으로 하는 돌조각의 일상성을 넘어선 지점을 보여준다. 그 유연함은 하이얀의 고양이 조각과 상대편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질의 것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낸 물체로서 고양이는 어느 순간 우레탄폼과 같은 가볍고도 몽실몽실한 볼륨감을 보인다. 괴체와 선, 색 없음과 색 이 모든 것이 돌에 있기도 하고 그 속성이 아닌 것이기도 하다.
현대들이 처한 생활에서 만나는 다양한 전통의 동물과 만화 속 캐릭터 혹은 옷에 수 놓여진 어느 상품의 로고와 같은 동물의 형태들은 현대적 토테미즘의 세계를 조우하게 한다. 그 동물들의 신령스러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에서 소비되는 이미지 혹은 어느 상징으로서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극히 가벼운 개념적 존재들을 돌에 담음으로써 견고해지고 동시에 개념으로 인하여 돌의 견고함을 무화시키는 상황을 연출한다.

욕망의 법칙
이번 전시에 참여한 몇몇 작가들은 도시생활의 일면 혹은 생활에 대한 어떤 시선을 보여준다. 김재호는 도시의 아파트를 드러내면서 그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주거지로서의 아파트, 한구사회에서 가장 안온한 가정의 상징이자 자본의 표상이 된 아파트는 젊은이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이다. 그 하단을 가로지르는 어떤 물결은 유영하는 물고기 같기도 하고 질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가득한 도로 같기도 하다. 도시를 유영하는 꿈을 꾸면서도 욕망하는 이중적인 삶의 법칙 아래 작가의 고민이 배어 있는 것이다. 이진희의 폐허가 된 도시 혹은 오래된 어느 작은 성을 상상케 하는 이미지들은 둥근 원탁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 영역의 한계성은 삶의 거처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진실을 소박하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문과 같은 물결이 가득한 반달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김희용의 작품은 밤의 꿈, 안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파동의 줄무늬들은 사람들의 지문을 떠올리게 하고 그 욕망의 움켜쥠을 떠올리게도 한다. 파동의 이미지는 장성재의 둥근 오석 표면에서도 물결친다. 그것은 불균형하고 스쳐 지나는 색으로 이루어져 붓질의 행로를 연상시킨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형태들은 돌을 부드러운 존재로 변화시키고 공들여 깎아낸 표면을 칼로 척척 쳐낸 부드러운 나무토막 같아보이게 만든다. 이호철의 부드러운 시계도 초현실주의의 시간의 기억처럼 물성을 넘어선 시간의 개념을 가미함으로써 단단한 물질이 꽃처럼 화사하고 부드러운 표면이 되게 하였다.
윤수현은 물방울이 공기중에서 떨어져 흘러 바닥으로 흘러 변하는 형태를 6단계로 표현한 듯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거칠거칠한 돌의 질감을 드러낸 물방울은 견고한 형태로 아래부터 보면 솟아나는 탑과도 같다. 가장 변하기 쉬운 물질과 가장 견고한 것의 결합은 이질적이지만 물방울로 바위를 뚫는다 했으니, 은유의 가시화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름다운 꽃무늬가 물결처럼 쌓아올려져 탑을 이루고 상층부에는 로케트가 자리한 민복기의 작품은 만화적 상상력에 더하여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늘로 쏘아올린 그 꿈의 실체를 돌로 만든 로켓으로 만나면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명섭의 돌쌓기는 돌 자르기와도 같아서 외형적으로는 탑과 다를 바 없지만 그 황금률의 적용은 미니멀리즘적 물질성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그것은 집적(集積)이기도 하고 절단(切斷)이기도 한 어느 지점으로서 공업적 물질로서 돌을 상상케 한다. 공업용 파이프를 연결한 듯한 김경훈의 작품은 다양한 색을 가진 돌들의 조합으로 이른 것이다. 다른 물질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연물인 돌에 의거한 의외성에 더하여 파이프의 어느 부분이 막혀 부풀어오르고 있어 조절의 시기를 놓치면 터져버리고 말 욕망의 실체 혹은 과부하를 보여준다.
팽만한 식물의 이미지를 담은 양계실의 작품은 생명성의 표현이라는 오래된 욕망을 드러내 보여준다. 외부와 내부에서 밀고 당기는 그 단단한 힘의 접촉지점의 얇은 막은 돌을 넘어선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 힘은 쇠의 무서운 날이 한갓 깃털에 무뎌져버린 낭만적 상태를 재현한 이서윤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다. 황빛나의 새는 부드러운 날개를 하고 귀여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환하게 한다. 돌로는 만들어오지 않던 것, 그것과의 조우는 의성을 담아 미소를 불러일으킨다. 영원히 부드러운 것,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고양시키는 것에 대한 오마주를 만난다.

반추하는 삶
이행균이 보여주는 어린왕자의 빛나는 별은 잃어버린 장소처럼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인간의 회귀처와 삶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한 번 읽은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수많은 경구로 이루어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드러낸 그의 작품은 문학적 의미를 담은 낭만주의 미술의 영역에 있다. 그림 속 인물을 돌에 새겨 빛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은 돌의 한계를 넘어선 표현에 대한 열망의 결과이다. 돌과 빛을 동시에 이용한 또 다른 작가 박근우의 속이 빈 타원의 형태 안에서 마치 대지가 균열되듯 갈라진 틈에서 빛을 내뿜는 작품은 대지의 생명, 태초의 힘을 보여준다. 그 균열의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표현은 견고한 돌의 속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김정희의 서체추상 같은 이미지의 표면과 그 속의 드러냄을 보여주는 작품은 돌에도 내부와 외부가 존재함을, 그것이 피부와 진피층 같은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돌에 채색한 김원근의 여인상은 흔히 돌조각에서 대면하는 여인보다 낭만적이어서 그림책에서 툭 튀어나온 존재 같아 보인다. 삶의 한 자락, 어떤 특정인물을 보여주는 것일 그의 화면은 돌에서부터 찾아내 드러낸 형상을 보여주는 노승옥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돌에 숨어 있는 형체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오래된 돌조각의 법칙 아래 관념화한 여인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형태들은 그냥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스며들었던 존재인 양, 돌에 물방울처럼 얹혀 있기도 하고 흙에 있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융기하기도 한다. 유지혜의 얼굴은 마스크의 일부처럼 비정형으로 부유한다. 단단한 돌의 속성을 넘어서 부분으로 존재하는 얼굴은 가장 부드러운 피부와 닮아 있다. 최하나의 여인 상체에는 기압골이 표시되어 있다. 다소 직선적이긴 하지만 부드러운 그녀의 머릿결이 살랑이는 미풍임을, 그 단단한 돌이 유동하는 구름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손인환의 대리석에 새긴 얼굴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많은 일들과 사물들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돌의 속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들 속에서 이혜영과 임호영은 단단한 인체를 통해 돌조각의 인물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은 돌로 만든 것이다’라는 주장처럼 형태는 단호하고 표면에는 수많은 자잘한 정질의 자국이 들러붙어 있다. 오래된 인간상을 만들어 기록하는 돌조각의 전통 아래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 형태들은 현대조각의 현란함 속에서 오히려 육중해 보이고, 또한 순박해서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돌조각은 재료의 선택만으로도 전통과 인내, 인고를 담보한다. 작가의 노동력을 아끼지 않은 이들의 작품에서 돌이 그저 돌임을 본다. 그들은 손안에 돌 하나 깎아내고 다듬어 형태로 만드는 것, 그것이 조각가의 본분임을 담담히 말하는 듯하다. 담담하고 소박한 형태들 속에서 석공의 잔재주가 아닌 예술에의 치열함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 작가를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땅에 파묻어 오래되어 보이는 조각상을 가지고 와서 골동품이라고 팔아넘기려 했을 때, 전통이라 하기에는 새로움을 숨길 수 없는 형태를 알아보고도 기꺼이 대금을 지불했던 그 마음 말이다. 전통을 파악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위대한 조각가의 손끝에서 만들어낸 세상, 율리우스 교황의 묘지에서 그는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소박한 형태에서 답보상태에 빠진 돌조각을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돌’에 대한 탐구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 작가와의 조우는 진정 이 세상에 새로울 것도, 그리 오래된 것도 없다는 삶의 진리를 만나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멈출 수 없는 시간의 속도와 재원과 시간 대비 결과물에 대한 금전적 계산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자본의 시대에 진정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실행에 옮기는 작가들이 있음을 무한히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조은정(미술평론가)



<참여작가>

김성복, 김정희, 김재호, 김병규, 김성은, 김경훈 김원근, 김희용, 노준진, 노승옥, 민복기,
박근우, 박성하, 이행균, 이호철, 이명훈, 이서윤, 이선화, 이혜영, 이명섭, 이진희, 임호영,
양계실, 유지혜, 윤수현, 손인환, 장성재, 장수빈, 최하나, 하이얀, 황빛나(총 3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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