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4-07-17 ~ 2014-08-13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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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연 : 정상과 표면
정상적인 인간의 질병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까? 무지한 인간만이 현명해질 수 있듯이 정상적인 인간만이 병들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아니다. 감기나 두통 또는 기침이나 복통 같은 가벼운 우연적 증상, 즉 증후로서의 가치가 없는 모든 우연적 증상,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닌 주의신호로서의 증상이 평정상태나 균형 상태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교란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도 아니다.
미셸 푸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서문 ; 죠르주 깡기옘, <정상과병리>, 도서출판 인간사랑, 33-34쪽.
오늘날 정상(正常)은 가느다란 선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만들어내는 배타적 특성들로 이루어진 좁은 영역을 가리킨다. 문화나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과거에 정상이었던 것들은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려운 목표들이 된다. 예컨대, 교육적 수월성의 기준은 점점 더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으며,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회성의 리터러시는 정보, 데이터, 검색 등의 더욱 더 복잡한 기술들을 요구한다. 한 집단에서 당위적인 것들은 다른 집단에서는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들이 된다. 정상이 되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세계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비정상의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의 상태에 놓여있는 다수가 배타적 정상성과의 접점에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긴장감을 우리는 공공영역에서 발견한다. 공공영역에서 사람들은 정상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 복잡한 행동과 태도의 코드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광기나 도발, 나아가 테러, 교란, 공격성, 반사회적 행동, 일탈, 위반 등과 연관된 의심이나 처벌을 초래할 수 있다. 정상은 강박과 편집증의 형식을 띤다.
남혜연은 이천 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한국과 서구사회 사이에 가로 놓인 문화 혹은 사회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간극들을 작업에서 다루어 왔다. 특히 주류문화인 서구문화가 지배하는 글로벌한 공간 속에서 소수성에 속하는 아시아계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된 퍼포먼스 및 미디어, 영상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였다. 2006년에 발표한 4채널 비디오 작품인 <자화상>은 작가 자신이 일상의 생활을 부적절한 도구와 방법들을 영위하는 힘겨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막대기로 음식을 먹고 밑 빠진 유리잔에 주스를 담아 마시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남혜연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명백히 비정상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소극적 일탈은 지배적 정상성의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좁은 범위를 떠올릴 때 그 경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미세한 간극들을 떠올린다. 이러한 간극의 표시는 미국의 주류 관객들이나 비주류 이주민들에게 있어 모두 현실과 정상성을 가로지르는 ‘바깥’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뉴미디어아트라고 불리는 장르의 경우,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자동성과 상호작용을 통한 관객의 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혜연의 2013년 작 <Hooray!>는 일렬로 벽면에 설치된 수많은 인형들 각각이 관객이 접근하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소시민들의 집단적이고 강박적인 두려움을 ‘인사’라는 행동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사회 속에서 감지하는 무작위적이고 감정적인 복종의 강요 혹은 자기 검열에 대한 반어적 표현을 볼 수 있다. ‘감정 노동’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직무활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특정한 사실이나 인물에 대해 ‘호의’ 내지는 ‘호감’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 이러한 왜곡을 우리는 권력에 의한 ‘힘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남혜연의 작품에서 이러한 관계는 역시 가장 미세한 차이들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얼굴 위에 나타나는 표정, 그 중에서도 ‘웃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번 전시에서 상영될 비디오 <Cheeeeese>는 작가 스스로 5분 동안 웃는 자신의 얼굴을 입을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노 요코의 1966년 작 <Smile>을 연상시키는 이 작업은 전자가 몇 초 동안 일어난 표정의 변화를 초당 500 프레임으로 고속촬영하여 길게 보여주는 작품인 반면, 남혜연의 작품은 실시간으로 웃는 표정을 최대한 길게 유지하기 위해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는 표정을 유지하는 퍼포먼스로 이루어져 있다. ‘불편함’이 극대화될수록 그것은 자연스러움(natural) 속으로 편입된다. 사회적 관계들은 모두 이렇게 극대화된 불편함과 그 안에 내재된 권력의 관계들을 중립적인 형식들로 표명하고 당위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최근의 키네틱 작업인 <E-Motor>는 이러한 힘의 관계들을 탄성을 지닌 얇은 고무 레이어와 그것을 잡아당기는 다수의 모터들로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나이든 여성의 얼굴은 각각 표정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지점들에 연결되어 모터의 연결축이 움직임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면서 미묘한 감정적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얼굴’의 표면이 의미와 긴장들에 의해 영토화 된 힘의 장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얼굴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접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들은 마치 얼굴의 표면을 통해 필터링되어 이미지화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얼굴은 ‘웃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웃음이라는 기본 원칙 위에 다수의 힘들이 서로 점유와 전유의 전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웃음은 동시대 사회가 강요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상성의 범주다. 웃지 않는 인간은 그곳을 떠나거나, 혹은 스스로 소외되어야 한다. 이미 남혜연은 2011년에 <Please smile>이라는 인터랙티브 작업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기를 요구하는 수많은 손짓들을 시각화 한 바 있다. 관객들이 접근하여 웃으면 수많은 손들이 환대의 제스추어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사회적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인사와 호의의 교환을 일종의 자동적 기호로 대치하고 있다. 벽면에 나열된 손들의 기계적 반응은 웃음을 요구하는 주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벽 밖에 없다는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에서 신생아들의 웃음이 생존을 위해 진화한 자기방어기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웃음은 성인이 되고나서, 심지어 죽을 때까지 사회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배타적이고 선별적인 정상성의 기제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혜연의 작업은 비정상적 범주의 행동들을 반복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상성의 비좁은 그림자를 보여준다. 정상성이 분열적 층위들을 빠르게 오가는 것으로 밖에는 선취될 수 없어 보이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정상이란 예외적이고 복합적이며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투쟁의 장이 된다. 예술은 반대로 끊임없이 정상성의 범주를 넓히고 비정상을 내부 혹은 경험과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분투한다. 나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러한 미션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매우 흥미로운 예측과 기대를 하게 된다. 미국에서 그가 경험한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 보다 강력한 테마와 시각적 도전으로 이어지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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