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와 멀티미디어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회화의 현실을 살펴보는 전시이다. 회화는 인간과 함께해 온 가장 오래된 예술 매체로, 인간의 현실 인식을 가장 민감하게 수용하고, 새로운 세계관이 도래할 때마다 그 한계에 도전하는 자기 부정과 정체성의 재정립을 무수히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처럼 ‘보는 눈’의 역사를 축적해온 회화는 오늘날, 상대적 가치와 다양한 관점을 공유하는 다원주의의 원리 속에서 재현, 반재현, 재현의 재현 등 다양한 층위의 표현 영역과 함께 장르나 매체, 매제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표현 방식을 공유하면서 그 외연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또한 방대한 정보 매체를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멀티미디어 환경으로 전환된 문화 현실은 또 한 층의 ‘보는 눈’의 변화를 주도하고 예술 표현의 다차원적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시대의 눈-회화 : Multi-Painting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최정주
회화는 인간의 내적 작용을 구체화 하는 기제 중에서도 인간과 함께해 온 가장 오래된 예술 매체로, 창작 행위의 중심을 이루며 미술의 가치와 역사를 대변해왔다. 돌이켜보면 회화의 여정은 인간의 현실 인식을 가장 민감하게 수용하고, 새로운 세계관이 도래할 때마다 그 한계에 도전하는 자기 부정과 정체성의 재정립을 무수히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것은 회화가 태생적으로 ‘보는 문제’를 담당해온 매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 문화, 생활환경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응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특수성을 고스란히 투영하면서도 항상 유동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의 과거는 미술계의 주도권에 대한 이해관계의 면에서 부침의 역사로 기록되어 왔다. 줄곧 예술의 중심축을 차지해 왔던 회화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자존에 대한 염려가 시작되었고, 점차 스스로의 구조와 체계를 잃어버린 채 그 존재 가치에 대한 의심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방황해왔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회화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관점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결과론적으로 회화는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회화는 19세기 중반까지 ‘위대한 재현의 시대’를 완성하며 영광과 권위를 누려왔다. 이 시기에 원근법, 명암법, 단축법 등과 같은 표현 수단의 진보가 모두 이루어졌으며, 당대의 사회적 주체가 요구하는 공증된 주제와 이야기 구조를 수용하면서 회화는 줄곧 각광받는 매체로 존재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산업사회로 진입한 이후 사진, 영화, 인쇄, 복제기술이 대중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눈에 대한 오랜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회화의 재현적 역할과 기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간에 축적되어 왔던 회화의 내적 질서와 뿌리가 크게 흔들린 점에서 이 시기는 분명, ‘위기의 시대’였다.
이후 모더니즘 시기에 회화는 2차원의 평면성만 남고 모든 재현성과 이야기의 흔적이 홀연히 사라진 추상의 상태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면서 자존의 길을 찾아 나섰고 이와 같은 ‘반재현성의 추구’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분명한 선택적 행보로 여겨졌다. 그러나 추상회화가 반세기동안 물성과 같은 형식적 요소에만 집중하는 사이, 내러티브나 환영적 요소와 같은 회화 안에서의 오랜 가치와 특성들은 타 매체들의 언어가 되어갔다. 게다가 후기모더니즘 시대의 ‘반미학적, 반회화적 눈’을 통해 회화의 모든 관습적인 성향들이 부정되는 가운데 급기야 ‘회화는 끝났다’고 회자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은 물론 회화의 모든 양상을 대변한 것이라기보다 오랫동안 미술의 중심을 차지했던 모더니즘 시대까지의 상황과 논리에서 비춰진 회화의 위상 변화에 대한 추적일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는 시대의 변화에 대처해 온 회화의 자생적 가능성을 보여준 지난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즉, 19세기 말엽에 찾아온 회화의 위기 앞에서 화가들은 색채, 형태와 같은 조형적 요소를 비롯하여 시점과 같은 표현 수단이나 재료 등의 형식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그때까지 일구어온 회화의 고전적 자산들을 과감히 포기하거나 재해석하는 등, 변화된 시대에 따른 ‘보는 눈의 변화’를 거의 혁명적으로 수용하고 발산하면서 회화의 지평을 넓혀 놓은 바 있다.
이후에도 회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형식의 문제와 형식 너머의 문제, 개념의 문제 등, 이전 시대에 경험하지 못했던 갖가지 표현적 방법론과 이론적 체계를 접하고, 그것을 회화 안으로 수혈하면서 스스로의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다져나갔다. 이처럼 골조마저 무너뜨린 철저한 자기 해체의 과정을 겪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실험적 모색을 반복하는 고군분투(孤軍奮鬪)의 여정 속에서 회화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진단과 달리, 오히려 시대와 호흡하는 예술 매체로서의 본질에 더욱 다가설 수 있었다고 본다.
또한 다원주의의 시대를 맞아 우리 주변의 어떠한 것이라도 예술의 영역에 포괄할 수 있게 되면서 회화는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 듯 보였으나 기존의 유산을 다시 호출하여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고, 타 장르와의 연계나 방법적 공유를 시도하면서 좀 더 유연하고도 열린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는 회화라는 장르의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의 끝이자 새로운 출발점에 들어선 순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시기에 회화는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접근을 통해 모더니즘 시대 전후에 타 장르에게 내주었던 조형적 요소, 표현 방식, 재료, 내러티브와 같은 오래된 회화의 틀을 되찾아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각 시대를 거치며 습득한 다양한 층위의 회화적 형태, 즉 개념적, 매제적으로 확장된 모습으로 귀환하여 이전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지만 이미지 생산자라는 측면에서 회화는 장르에서나 매체에서나 그 영역과 규모를 계속 확장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를 꾸준히 반영해온 다양한 경험의 층위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위기설’은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이는 일견, 회화 스스로가 모더니즘 이후에 발견된 균열을 이렇다하게 수습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견해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문화 환경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환경으로 진입하면서 다시 한 번 일대의 혼란과 함께 미경험의 진통을 겪을 것이라는 예측과 기류를 감지한 언급이라고 본다. 실제로 멀티미디어 환경이 시작되었을 때의 회화는 19세기 말 사진의 등장으로 위축되었던 회화의 위기 상황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회화의 수작업의 성격을 대체하는 편리함과 재현성을 넘어서는 리얼리티의 면에서 유사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우리 사회는 대중문화, 소비문화의 확산과 함께 영상매체, 정보 네트워크의 급증으로 문화 지형에 일대의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도 급속히 늘어난 멀티미디어와 디지털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문화적 현실이 되었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적용되어 미디어 아트와 같은 장르가 널리 공유되고, 미디어 환경을 이용한 예술 창작의 방법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시대의 눈-회화 : Multi-Painting> 展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만연된 다원주의의 논리 속에서 다면적이고도 다차원적인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회화적 현실에 주목하고, 그 중에서도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문화 환경적 특성에 친화하는 회화의 한 현상을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과 이념, 목표 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의 원리는 개인이 모든 것의 단위이자 결과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하고,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 ‘다수’의 ‘여러 가지’ 관점을 양산하게 했다. 또한 멀티미디어 환경은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영상, 음성, 문자 따위와 같은 다양한 정보 매체를 ‘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으며, 예술의 표현 형태도 그만큼 ‘다차원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전시에서 명명한 ‘Multi-Painting’은 ‘Multi-’로 대변되는 우리 시대의 환경과 특성이 회화의 영역에서 ‘다층적, 다면적’으로 발화되는 양상을 함의하는 별칭이다.
오늘날의 회화는 그야말로 다원적이다. 재현, 반재현, 재현의 재현 등의 다면적인 범위가 공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르에 있어서나 매체 활용에 있어서나 경계 없이 무한 확장하듯 멀티플한 양상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또한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습득과 재생산의 방식은 우리의 사고방식의 체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무제한의 정보를 큰 수고 없이 취사선택하여 수집할 수 있게 된 점은 예술 창작의 모티프를 선택의 문제로 나아가게 했으며, 가상세계 속의 무한 확장성의 경험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물리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해체하거나 변용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재구성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미지를 추출하는 방식에서도 필요한 이미지를 몽타주 형식으로 파편화하거나 분절해서 서로 중첩, 병치하기도 하고 연속과 불연속을 통한 시각적 혼융을 자유자재로 시도하는 점은 회화적인 표현 방식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다면적인 양상들 때문에 오히려 이 시대의 회화가 회화적 특수성이 희박하다고들 한다. 또한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이나 새로운 표현 방법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회화의 발전적 행보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보면 이 시대의 환경은 회화적 발현에 더 없이 좋은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회화의 고전적 자산 층이 두텁게 축적되어 있고, 타 매체들과 회화적 원소들을 공유했던 친연적 경험으로 인해 표현의 영역이나 방법에서 자유로워졌으며, 거기에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익숙해진 새로운 창작 태도와 조형적 방법론이 더해져 ‘보는 눈’의 변화가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다.
이 전시에 초대된 9명의 작가는 모두 멀티미디어 환경에 친화적인 세대로서 회화 고유의 매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Multi-Painting’의 현상을 관통하는 회화적 발언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현대 회화의 다양한 지류 중 한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작가마다 예술 언어의 새로운 단위를 형성하면서 회화의 활로를 열고 그 지평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부단한 활동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박진아는 자신의 일상을 카메라로 찍은 후 그 이미지들을 캔버스 위에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순간들이 사진기라는 타자의 눈을 통해 객관화된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같은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상황들이 한 화면에 중첩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같은 인물이며 서로 다른 시․공간의 층위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긴 이야기를 한 화면에 효율적으로 표현한 동양화의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작가는 약간의 시간차로 4개의 장면이 찍히는 로모(Lomo) 카메라의 특성을 한 화면에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화면 속의 중첩된 시․공간은 낱낱의 순간이자 그것의 연속성을 제시하는 다면적인 시점을 보여준다.
허수영은 한 화면에 1년이라는 시․공간의 풍경을 담는다. 즉, 어느 한 장소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들을 연속적으로 겹쳐 그리는 방식을 통해 1년간 진행된 시․공간의 파노라마를 중첩해 놓은 것이다. 각각의 계절별 화면은 시점이나 원근이 살아있는 낱낱의 현실 풍경을 재현한 것이지만 화면 위에 다른 층위가 계속 중첩되면서 결국 시점도 원근도 사라진 비현실적 추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가의 신체적 움직임과 감성들이 쌓여 일기와 같은 내러티브가 함축되어 있으며, 이는 마치 아코디언의 커튼처럼 촉각적 물성 사이사이에 정지된 공간의 순간들과 각각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접혔다 펼쳐지는 연속성을 유추하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동식물 사진집의 수많은 이미지를 한 화면에 계속 나열하고 중첩하면서 보태어 그려나간 초기의 시도로부터 발전해온 것인데 시간과 공간과 상황의 파편들이 중첩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박미나의 ‘딩벳 회화’는 디지털 환경의 소통 방식과 수단을 활용한 그림이다. 딩벳(Dingbat) 폰트는 자판의 문자 배열에 약호와 그림 문자가 대입되어 있어 글자를 치면 그림, 즉 컴퓨터 이미지로 치환되는 기능을 한다. 작가는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딩벳 폰트를 임의대로 골라 화면을 구성하는데, 이미지들은 서로 뒤섞이면서 변형되거나 해체되기도 하고 색채가 개입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에는 폰트가 가진 본래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 등은 배제되어 있으며, 작품의 제목 또한 전체의 의미를 찾는 데에 뾰족한 단서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작가는 이 시대의 정보를 패턴화한 딩벳 폰트를 새롭게 조합하고 변형, 혼합함으로써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수시로 바뀔 수 있는 현대적 언어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가의 주관을 개입시키기보다는 그러한 패턴의 교차 속에서 새로운 의미들이 자생되기를 제안하고 있다.
강서경은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분절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시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회화의 원론적 가치를 더욱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즉, 캔버스, 그리고자 하는 대상, 빛, 주제, 내러티브와 같은 회화적 요소들이 낱낱이 해체되어 물리적인 공간 속에 배열된다. 회화의 형식을 구성하는 캔버스의 경우, 내용을 담아 전달하는 앞면에는 내용의 핵심적인 키워드만 남겨두고, 캔버스 옆면만 보이도록 겹겹이 쌓아올린 캔버스 오브제를 통해 내러티브의 중첩과 시간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캔버스의 비어있는 틀을 그대로 노출하여 회화에서의 여백의 존재와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 외에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캔버스 밖으로 나와 오브제로 설치되어 그 존재를 다면적으로 살펴보게 하고, 빛은 그 형상을 액면 그대로 드러내 회화에서의 빛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작품의 제목 또한 내러티브의 핵심을 함유하게 하는 등 각각의 설치물들과 텍스트는 저마다 분업화된 회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결국 모든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했을 때 하나의 회화 작품이 완성된다고 하겠다. 작가는 회화와 공간설치의 호환적 특성을 아우르는 자신의 작업영역을 ‘페인톨레이션(Paintallation)’이라고 명명하면서 회화의 영역을 보다 유연하게 넓혀나가고 있다.
공시네는 그동안 마음에 떠오르는 형상을 3차원의 오브제로 만든 뒤 오브제들이 이루는 상황들을 다시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이는 작가의 내적인 상상과 서사로부터 출발한 무형의 형상이 조각이라는 신체적 활동을 거쳐 구체화되고, 작가의 감정이 투사된 오브제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연극적인 상황과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면, 이것이 정물화처럼 회화의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되고 재현되는 장면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업의 출발점을 회화로부터 시작한다. 화면 안의 상황들은 특정한 내러티브가 있는 듯 객관적인 시점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그림 속의 오브제에 대한 궁금증을 화면 밖으로 끌어내어 살펴보는데 오브제 그 자체의 형상이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듯 펼쳐 내부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이는 평면으로 귀착된 이전의 작업 과정에서 한 단계 더 진척된 면모인데, 하나의 층위에서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 객관화된 정보를 확인하는 듯한 태도는 단순히 회화의 구조를 다층화 하는 것을 너머 이 시대에 통용하는 공감각적인 관점이 반영된 또 다른 차원의 언어적 진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배윤환은 높이 2m, 가로 50m에 이르는 캔버스에 다양한 내러티브들을 가득 수록했다. TV, 인터넷, 스마트폰 등으로부터 넘쳐 나오는 사회적 이슈와 정보들을 비롯하여 작가 자신의 일상과 의식을 지배하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내러티브의 주된 소재다. 이 파편적인 이야기들은 작가의 내면과 만나 은유와 상상, 풍자가 더해지고 동일한 표현 방식으로 조율되어 판타지 세계의 에피소드처럼 안배된다. 그런 점에서 전개된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 망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형 캔버스는 롤 형식으로 말려 있어 이야기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끝없는 이야기’의 구조를 띤다. 이와 같은 내러티브의 활용과 전개방식은 매순간 방대한 정보량을 불연속적으로 흡수하고, 불연속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미디어 환경의 습성과도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는 회화의 내러티브의 형식을 확장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안두진은 이미지이자 물질인 대상을 취급하는 회화의 속성을 분석적으로 고찰한다. 그는 이미지(Image)의 ‘이마(Ima)’와 물질의 최소 단위인 ‘쿼크(Quark)’를 합성한 ‘이마쿼크(Imaquark)’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어 이미지의 형식적, 물질적, 개념적 의미의 최소단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기초로 조형 세계를 구체화한다. 각 풍경들은 이마쿼크들의 직조를 통해 독특한 패턴을 보여주는데, 이마쿼크가 집합적 배열을 이루면서 하나의 ‘원형’이 완성되고, 그 원형들 간에 충돌과 대립이라는 극도의 긴장관계, 즉 작가의 언어로 ‘특이점’이 형성되면서 드라마틱한 서사와 유기적 구조가 완성된다. 논리회로처럼 다단계로 구성된 조형 이론과 현란하게 조합되어 있는 강렬한 형광색감, 낭만과 숭고미가 가득한 풍경에서 그의 회화는 논리 모순이겠지만, 감성과 물성을 갖춘, 노동집약적인 디지털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회화의 조형적 요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분해하여 그 단위를 다시 설정하고 현실과 초현실을 아우르는 내러티브를 펼쳐내는 창작의 태도는 작가만의 독자적인 언어로 펼쳐져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정수진은 인간의 의식이 관여하는 다차원의 구조를 회화적으로 가시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의 그림의 외형은 다양한 형상들이 무작위적으로 등장하는 복합적인 구성을 띠며, 몽타주처럼 독립적인 낱낱의 형상들은 원근법을 무시한 듯 파편화된 채 나열되고 병치되어 있다. 언뜻 보면, 각각의 형상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경험과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이들은 회화의 기본 요소인 색채와 형태가 결합된 질료적 의미망에 머물면서 인간의 의식을 다차원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시각적 단서들로서 작용할 뿐이다. 결국 그의 2차원의 화면은 의식과 무의식, 물질과 비물질,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같이 서로 다른 차원들이 넘나들고 투과하는 무대가 되어 ‘본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회화가 컴퓨터의 모니터처럼 다차원의 무한한 층위를 오가는 중간계라는 관점과 내러티브 너머의 내러티브를 불러온다는 인식은 작가만의 독특한 언어 영역이자 회화의 외연을 넓히는 시도라고 하겠다.
차혜림은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억압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잔혹극이라는 설정을 통해 다중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작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러티브는 우리의 인식 체계에 저장된 규범과 개념을 흔드는 각종 심리적 기제들이 가득한데, 이는 인터넷 뉴스와 같은 동시대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를 수집한 뒤 그와 연관되거나 또는 전혀 새롭게 창작된 내용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짜여진 이야기는 완벽한 구조를 정해놓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불확실한 단서를 끼워 넣어 전혀 다른 결말로 탈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열린 구조의 작업은 문학, 연극, 영화, 미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이야기의 연결 과정과 다면적인 구조를 노출하며 진행된다. 즉, 중간 단계의 상황과 이야기들이 공간 속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셈인데, 이들은 마치 게임을 풀어나가는 과정처럼 각 단계마다 정보를 조합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게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각 단계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함유하면서 전체 이야기의 인터페이스(접속 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디에서 시작해도 무방한 백과사전식 작업 방식을 통해 파편적 이야기는 다시 연속성을 가지게 되고 내러티브는 쌍방향으로 무한히 자가 증식하는 독특한 결과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 시대의 회화는 분명 다면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회화 작업에 매진해온 위의 9명 작가들이 선보이는 회화의 내용과 형식은 저마다 이 시대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시도들을 수용하여 각각 개성적인 언어로 발화하고 있다. 색채와 형태의 구성, 시․공간의 개념, 시점의 원리, 내러티브의 전달 방식 등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운용 방식에서 조금씩 벗어나 서로의 채널을 조합하고 새로운 층위로 도약하는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회화의 과거가 더 이상 고고학적 무게로 작용하지 않고 각 시대마다 축적해온 표현 영역의 경험적 키워드가 회화의 표층에 나란히 펼쳐져 있다는 것, 멀티미디어 환경으로 인해 저마다의 인식 체계가 다차원적으로 전환되고 ‘보는 눈’의 변화가 예술의 저변에 확대되어 있다는 것 등에서 목도하는 회화의 현실일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회, 문화, 예술의 가치가 동등한 거리에서 개인의 선택을 기다리고, 그래서 개인이 단위가 되는 이 시대의 언어적 특성이 회화의 외연을 다면적으로 펼쳐나가는 데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보는 눈’의 역사를 대변해온 회화의 여정에서 이 시대의 회화는 그토록 우려했던 위기‘설’과는 다른 지점에서 더욱 단단한 매체로 거듭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