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4-08-29 ~ 2014-11-30
유료
02.737.7650
로컬리뷰2014: 강화發, <분단의 몸-박진화>
로컬리뷰는 성곡미술관이 지난 2013년 <부산發>을 시작으로 국내지역미술에 대한 미술관 차원의 관심을 제고하고자 마련한 연례전이다. 특정 지역의 당대미술을 이슈중심으로 소개하는 로컬리뷰는, 지역미술을 관성적으로, 혹은 대도시 중심으로 소개했던 기존 시각과 관심으로부터 탈피하여 크고 작은 중소 시, 군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이어나갈 것이다.
지역작가들을 기존 관행대로, 지명도 중심으로, 가능한 많은 작가들을 모둠 형식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미술은 물론, 사회, 정치, 역사적 현실/과거 이슈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다. 이는 성곡미술관이 지난 5년 동안 주목해온 중견중진작가 집중조명프로그램, 잊혀진 작가 재조명프로그램 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당대미술이 놓치고 있는 현상과 흐름, 이슈를 주목하고자 하는 미술관 차원의 노력이다.
소명(召命)의 눈, 이행(移行)의 몸
1.
강화는 대단히 자립성이 강한, 독립적인 곳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外侵)과 부침(浮沈)이 강화를 스스로 그러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연륙교(連陸橋)가 설치되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만조(滿潮)를 기다렸다가 버스를 배에 싣고 건너갔다. 역사적으로 이런저런 상흔이 많은 지역이요, 전략적 요충지이며 나아가 미래의 교두보이기도 하다. 지금도 몇몇 상흔은 읍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북쪽의 물이 자연스레 흘러들어 남과 섞이는 곳 강화. 생태, 환경적 중요성과 함께 분단의 현실을 가까이 목도할 수 있는 곳으로 자연 환경과 외세의 변화에 늘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나 짐짓 평온하기 그지없는 묘한 매력의 땅이다.
강화읍 대산리, 민통선 내 한적한 마을에 자리 잡은 박진화의 작업실. 북녘이 바라다 보이는 굵은 철책을 마주하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온 그만의 산실(産室)이다. 1991년 무심코 찾으면서 시작된 강화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렇듯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지금의 자리에 작업공간을 새로 마련했으니 한 곳, 한 작업실에서만 20여년을 보낸 셈이다. 박진화의 이른바 강화시대는 이렇듯 우연처럼 시작되었다. 남도 끝자락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서북단에 별다른 무리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곳 모두 바다를 끼고 있다는 점과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곡창지대라는 점, 그리고 북녘이 거짓말처럼 가까웠다는 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 낯설지 않은 지역적 동질감이 안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의 분단, 대치현실을 바라보는 그동안의 막연한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겠다는 작업의지와 그에 따른 성취동기가 내심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그림을 통해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보여온 박진화에게 강화는 제2의 고향처럼 다가왔다. 무엇보다 작업실이 자리한 주변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번잡하지 않은 조용한 분위기와 함께 완만하고 부드러운 산과 평야가 많은 넉넉한 지형과 흙내음, 바다내음 등 삶의 진솔한 정겨움은 눈과 몸으로 느끼는 분단현실과 긴장감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박진화를 불러들였다.
강화와 대산리에 이어 마니산이 박진화를 불렀다. 운명과도 같은 피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 눈과 몸으로 응답했다. 듣고 보고 만났다. 산의 속살과 속내를 지속적으로 만나고 접하면서 그의 삶과 그림은 다시 열린 세상처럼 새롭게 시작되었다. 눈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는 이로서, 이 땅을 살아내는 필부로서 눈의 소명을 생각했다. 이때 깨우치고 가졌던 소명의식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안보이던,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외부 현상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예민하게 바라보던 직설적 시선이 차츰 내부로 향하면서 세상의 본원(本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고 글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고 강화 곳곳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눈과 몸이 다시 열렸다. 속 깊이 뜨거운 울림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현실인식에 있어 새로운 계기로 작용했다.
강화의 역사적 부침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분명한 현실인식은 꽉 막힌 듯 했던 작가의 기존 사고와 작업에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 내지는 해법으로 작용했다.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작용했다. 응답한 것은 현실참여라기보다는 외면할 수 없는 분단 너머의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 그림그리기로서의 실천, 내적 성찰과 사유였다. 박진화는 세상의 행간을 파헤치는 눈, 현상 너머의 것을 읽어내는 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것을 ‘눈의 권리(權利)’라고 칭한 바 있다. 눈의 권리에서 비롯되고 발휘되어야 하는 일, 그것이 작업이요, 그림이요, 화가의 몫, 생리, 역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
이번 전시는 박진화의 강화 20여년을 갈무리한 전시로 그동안의 작업성과와 성가(聲價)를 압축했다. 드로잉을 포함하며 80여점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지난 30여 년 간 작가로서 천착한 세상살이와 인간에 대한 고민과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박진화는 대작(大作)과 다작(多作)의 작가다. 물론 그림이 크거나 그 수가 많아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진화는 드물게 진정성을 담보하며 꾸준하게, 정말이지 꾸준하게 매일처럼 작업하는 작가다. 흔히 만나는 작가가 아니다. 여기저기 끝까지 눌러 짜고 버린 수많은 물감 튜브들과 두터운 퇴적층을 보이는 팔레트의 물감 덩어리, 치열한 드로잉, 수북한 연필과 지우개 가루, 라면 봉지 그리고 서재에 가득한 인문서적들이 밤낮 없는 치열한 작업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박진화의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강화시절 이전의 작업도 몇 점 소개한다. 90년대 이후의 작업, 또는 근작과의 차이와 다름, 혹은 변함없는 청년 박진화의 작업지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붓하나로 맞선 세상은 온통 절규와 외침, 울부짖음으로 화면을 채우게 했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화가로서, 인간으로서의 무기력함과 당대 폭압적 현실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했던 통곡의 세월이었다. 굴하지 않고 사회와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워 나갔다. 무기력한 자신의 한계, 침묵, 갈등, 고민 등과 같은 것들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걷잡으려는 절박한 기운으로 그림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1전시장에 초입에 전시된 그림들은 당시 그러한 작가의 심정을 반영한 작업들이라 하겠다.
16세기 서구 ‘매너리스트(mannerist)’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당시 그의 화면은 온통 죽음과 상처, 울부짖음, 난세에서의 구원을 갈망하는 희구, 염원 등을 담고 있다. 인물들은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으며 어둡고 무거운 색조로 현세구복적 기운과 암울한 현실을 담아낸 박진화식 기록화라 하겠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울부짖음과 분노의 감정, 무력감 등은 그림으로 대신해서 울부짖는, 이른바 ‘대곡자(代哭者)’로서의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격하게 토해낸 감정과 우울하고 어두운 화면은 당시 청년작가로서 바라본 사회현실과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심리적인 갈등과 불안한 마음, 분노의 기운을 강하게 몸밖으로 거칠게 분출하던 시기의 작업으로 절박함과 어두움, 무거움, 거친 질감이 특징이다.
강화 안착 후 박진화는 현실에 대한 내적 감정을 가감 없이 토로하던 초기 그림과는 달리 그것을 육화(肉化), 체화(體化)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함께 곱씹으며 집단초상 개념으로 풀어내는 작업에 주목했다. 단일 초상으로 등장하던, 집단으로 등장하던,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그의 자화상으로 이해된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이른바 수신(修身)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분명한 형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다. 의도적으로 인물을 익명화하려는, 본성을 감추려는 시도로 기존 인물의 왜곡, 변형태가 줄곧 유지되고 있다. 이 시기의 그림에 있어 중요한 것은 주변의 분위기나 색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세나 배경 등에 의해 그림의 지향을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손끝의 모양이나 그것들이 향하는 바, 혹은 손동작과 몸짓이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개인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환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이다. 익명화되어 있고 특별한 얼굴 표정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비슷해보이는 이들은 모두 당시의 사회성과 이슈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분명한 당대인물들이다. 사회적인 그물망, 관계망과 같은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으로 얼키설키 엮인 현세태를 반영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개체성에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물의 인물됨을 개별적으로 파고들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일부 분명한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때론 사라지듯 나타나고 나타나듯 사라지는 형국으로 화면 내에서 명멸한다. 개인을 익명화시키고 소멸시킴으로써 개인을 강조하고 다시 드러내는 역설적 형국이다. 세상의 이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3.
박진화에게 있어 다른 그림, 이를 테면 풍경화 등과 같은 그림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강화의 들녘을 페인팅으로, 드로잉으로 휘리릭 담을 법도 하련만 그는 인물 중심의 삶의 풍경을 고집한다. 풍경과 인물이 결합된 그림 정도로 이른바 풍경을 건드리고 있다. 환갑이 넘으면 자연풍경을 그리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풍경이 다가오고 있음일까. 박진화의 최근 집단초상은 인물들 개개의 구체적인 묘사나 성격을 부여하기보다는 전체 대중들이 가지는 공동체적인 바람, 소망, 삶의 풍경,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 공동체적인 삶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림과 삶의 자연스런 흐름, 이행, 변화의 기운이 필요함을 강조하되, 인물들을 특정 표정을 빌어 나타내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언설이나 주장, 세상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기보다는 사회나 공동체, 세상살이 전체에 대한 사유가 강조된 느낌이다.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인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순간순간 담아내었다. 인물들의 구체성, 혹은 특정 감정과 시점에서의 주장이나 의지를 주목하기보다는 흐름이라는 커다란 변화의 기운, 역사적인 흐름이나 서사적인 기운 속에 녹였다. 의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런 기운으로 인물을 드러내면서 전체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강화시절 작업의 특징 중 하나다. 세상살이에서 경험한 분노와 격정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던 박진화는 그것을 화합과 통합, 네오내오 구분 없는 평화와 안식의 터전 속에서 하나된 모습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다. 흡사 종교적 기운까지 감지되는 그의 그림은 현세구복/극복에의 바람을 하나의 커다란 물결로, 흐름으로, 몸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초대형 화면은 마치 웅장한 메시아를 듣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된 몸으로, 하나된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장관으로 연출하고 있다.
4.
개인(자신)의 내면의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으로서의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던 박진화의 그림은 전체(공동체)의 맥락에서 개인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의 몸으로 응답하는 그림으로 이행되고 있다. 박진화는 1993년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수백점의 드로잉을 이어 왔다. 지난 2012년 겨우내 140여점 이상의 렘브란트의 성화드로잉을 복기(復棋)하며 인간의 문제, 인간의 조건을 탐색한 경험은 인간은 물론 미술을 새롭게 이해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종교에 대한 개인적 관심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종교를 떠나 필부로서의 인간의 삶, 인간의 조건,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인간의 원죄 그리고 원죄의식, 인간의 나약함, 인간의 사악함, 야누스적인 것으로부터 오욕칠정(五慾七情)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 등에 대한 성찰이 이어졌다. 최근 어르신들의 초상을 많이 그려낸 것도 그들과 마주보며 자신과 더불어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그림과 관심이 사람에서 비롯되었고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있고 여전히 사람을 향하고 있음이다.
박진화의 화면에는 많은 사람만큼이나 많은 색이 등장한다.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을 주조로 빚어내는 화음이 이채롭다. 이들은 색의 삼원색이기도 하지만, 인간 감정의 삼원색이기도 하다. 사회현상이라든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정도 이들 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색의 의미, 지시성은 달라진다. 중재, 화해, 치유의 개념으로서의 노란색, 이념적인 오명을 벗고 국민의 색으로 거듭난 붉은색, 민주와 평화의 상징인 푸른색 등이 그것이다. 이분법적인 대립의 시대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푸른색, 첨예하게 마주하는 사회적 대립각 속에 절충, 혹은 조정이라고 하는 부분으로서의 노란색도 필요할 것이다. 사회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색으로 언급하고 중재하려는 박진화의 노력을 만날 수 있다.
박진화의 그림은 인물들의 춤추는 듯 자유로운 몸짓과 삼원색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화음, 부족함과 지나침이 없는 표면질감, 인물을 넉넉하게 품어 안는 배경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우렁찬 울림으로 출렁인다. 논리적이고 이념적인 문제 등을 벗어나 함께 크게 출렁일 수 있는 그림을 지향하고 있음이다. 함께 그 울림을 받아들이고 하나된 몸과 맘으로 크게 일렁이는 미래, 건강한 기운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림을 지향한다. 최근 대부분의 이야기가 커다란 화면에서 시작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옥죄던 작업굴레로부터, 세상살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전략적 인간관계로부터, 경직된 이념의 굴레로부터 진정 자유롭고자 했던 저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있음이다.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강화는 그에게 새로운 그림과 치유의 가능성을 동시에 선사했다. 천 번 이상을 오른 마니산 등정, 작업실과 집과의 10리길을 눈비를 마다않고 걸어 다니면서 축적된 심신의 체력도 한 몫을 했다. 그에게 체력은 곧 화력(畵力)인 셈이다.
지금까지의 강화에서의 작업이 부름, 응답, 이행의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작업은 성찰, 즉 속 깊은 내면화 과정을 통해서 이런저런 대내외적 갈등과 대립, 분단의 현실을 그림으로 승화시켜나가려는 ‘대속자(代贖者)’로서의 성찰과 수행을 이어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성찰과 수행은 앞서 언급한 수백장에 달하는 그의 드로잉에도 잘 나타나 있다. 최근 박진화는 전시를 위한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작업이 개인과 전체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넌지시 시사한 바 있다. 개인의 내력과 개인의 역사성 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생각된다. 어르신들의 초상을 많이 그리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시간의 깊이와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그 무엇, 마음의 문신, 개인의 내면의 파동 등을 따라 들어갈 생각이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또다른 이행, 승화의 세계가 기다려진다.
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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