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을 자신과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게끔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개성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인습과 싸우고 있다는 확인이다. 이것은 불가해한 삶을 이해하려는 작가의 끈질긴 노력이 그 정서적 대응물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순옥의 작업의 주된 대상물인 배추는, 작가의 어떠한 육체적,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다. 배추의 풍만한 모습들은 햇빛에 몸이 팅팅 불은 모습일 수도 있고, 들판이나 도시는 풍요를 제공해 주는 대상이 아니라 수탈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근본적인 결핍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
결핍으로서의 존재는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게 절실한 의미를 갖고, 그 의식의 세계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는다. 결핍을 사랑하거나 그 결핍에 경도된다는 것은 욕망이 드러나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에 의미를 주고자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 애씀의 과정들은 현실과의 화해는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유발한다. 즉 현실과 관념의 단속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불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순옥의 작업들은 현실의 연속성을 인지하는 그 순간 불연속성을 발견한다. 청춘과 노인의 차이는 어느 부분에서 구분되는지, 도시와 교외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모호하다. 그러므로 뿌리박힌 것들과 떠도는 것들, 정착과 유랑의 경계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인순옥의 작품세계의 안쪽에는 ‘파란 슬픔’으로 부를 수 있는 파토스(Pathos)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노드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제시했던 것처럼 이러한 시선은 여성성이 주된 정서이다.
또한 이것은 동양적 사고의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세계관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인순옥은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 대상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주된 오브제인 배추에 나타나는 표정들이 그러하고 도자기에 표현된 웃음들의 형태가 그러하다. 슬픔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유머이지만 그것은 발현되고 나면 다시 좀 더 엷은 형태의 슬픔으로 존재하므로 이것을 희석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머가 가지는 긍정적인 힘을 재차 믿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허황된 반복을 요구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인순옥이 다루는 배추에 치장을 한 얼굴들이 웃으며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여, 인순옥은 배추에 대한 모노그래퍼(monographer)이다. 배추의 파토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그 개념들을 화석화 시키는 순수 논리의 맹목성을 경계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은 얼굴의 모습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카이로스(kairos) 즉 과녁이 된다. 배추에 얼굴이 드러남으로 해서 헤어밴드라는 장치에서 보이 듯 묶여있고 뿌리박힌 것들의 슬픔은 재해석되어 화장이나 장신구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저지르곤 하는 ‘경멸 섞인 관대함의 한 형태인 주의 깊은 배려’의 위선성에 대하여 통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