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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희 : 식탁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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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정경 위로 부유하는, 꿈꾸는 사물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사람들은 꿈을 꾼다. 꿈은 억압된 현실의 침전물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흔히 허무맹랑한 꿈을 개꿈이라고 한다. 이런 개꿈이 없지 않겠지만, 대개 꿈은 억압된 현실을 반영하고 이상을 반영하고 욕망을 반영한다. 그렇게 꿈은 현실과 연동된다.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현실과는 다르게 반영하는 만큼 꿈속에 반영된 현실감도 다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만큼 시간에 대한 감각도 공간에 대한 감각도 다르다.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하고 현실이 재편되는, 마치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꿈은 어쩌면 몸이 기억하고 있을 가상현실 내지 대체현실의 원형인지도 모른다. 원형적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의 자궁일지 모르고, 그 기억이 상연되고 상영되는 원형적인 극장일지도 모를 일이다. 


유진희는 그런 꿈을 그린다. 꿈 자체를 그린다기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소회를 그리고 일상인으로서의 소박한 이상이며 희망을 꿈결처럼 그린다. 꿈꾸듯 몽몽한 일상을 그린다. 식탁 위의 꿈, 바로 유진희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부친 주제 그대로이다. 말 그대로라면 식탁 위에서 꾼 꿈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정작 꿈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꿈은 무슨 의미이며 더욱이 식탁 위에서의 꿈은 무슨 의미인가. 식탁이란 알다시피 생활인으로서의 여성주체와 관련이 깊다. 실생활에서 실제로 식탁을 차려내는 일의 정도와 의미비중과는 무관하게 여성주체의 자기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되는 장이며 세계다. 성적 정체성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남성 주체의 체스와 바둑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 자체 세계의 축소판이랄 수 있는 체스판과 바둑판이 이해 타산적이고 계산적이고 전략적이라면, 식탁이 펼쳐 보이는 세계는 무조건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온건하고 호의적이다. 그래서 식탁은 어쩌면 생명을 품고 있는 자궁의 또 다른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상을 차려내는 일이 곧 생명을 양육하고 사랑으로 보듬는 일과 통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식탁은 이렇듯 생명을 매개로 자궁과 만나지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생명을 품고 양육하는 식탁을 그리고 있었고, 식탁이면서 일종의 미시세계이기도 한, 꿈이면서 현실이기도 한, 여기에 기억이면서 일상이기도 한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두 세계가 차이를 넘어 하나로 삼투되는, 그런 경지며 차원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지며 차원이 열어 보이는 의미세계는 아마도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에 연유한 생활감정이며 생활철학에 일맥상통한 것일 것이고, 일상성과 일상 사회학에 연동된 것일 터이다.
  


이처럼 작가는 식탁을 그린다. 그래서 그에게 식탁은 화면이면서 그림 자체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식탁이며 그림 위로 식탁 위에 있을 법한 것과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사물들을 올려놓는다. 이를테면 무, 오이, 고추, 피망, 아스파라거스 같은 야채들이며 과일을, 기린, 코끼리, 거북이, 낙타, 곰, 얼룩말, 코뿔소와 같은 동물들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세발자전거와 자동차 모형이나 로봇과 같은 장난감을, 각종 주방용품이며 소파와 같은 일상용품을 그려 넣는다. 나아가 아이며 가족 그리고 작가 자신이 그림 속 한 요소로서 호출되기도 한다. 작가의 일상과 주변머리로부터 취해온 소재들이며, 기억의 층위로부터 되불러낸 소재들이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캐낸 소재들이다. 이 소재들이 호출된 식탁 위는 그대로 하나의 작은 세계며 미시세계를 이루고, 그 자체 일종의 가상현실이며 대체현실에 해당한다.
그 세계의 준칙은 현실세계의 그것과는 다른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 우와 열이 없고, 모티브와 모티브 사이에 경과 중이 없다. 모든 사물이며 모티브가 똑같은 비중의 의미를 부여받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게 그려진다. 작가에게는 모든 사물이며 모티브가 하나같이 의미 있고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한눈에도 평면적이다. 평면 위에 똑같은 강도와 밀도로 사물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똑같은 강도와 밀도로 그려진 사물들이 마치 부유하듯 화면 여기저기에 포치하는데, 그 꼴이 무슨 무중력 상태 같다. 무중력 상태의 평면 위를 부유하는 사물들 같다고나 할까. 작가의 그림에선 이처럼 사물들의 위상이 재정의 될 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며 현실 자체가 재편된다. 무슨 말이냐면, 식탁은 식탁이면서 식탁이 아니다. 식탁은 때로 일상이 되기도 하고 기억이 되기도 하고 이상이 되기도 한다. 추억을 되살리고 회상에 잠기는 장이 되기도 하고, 꿈의 정경에 그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동물원인가 하면 식물원이기도 하고, 자연이며 공원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거실을 보여주다가 불현듯 물속 정경으로 옮아가기도 한다.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세계며 변태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세계와 세계를 가름하는 경계는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삼투된다. 바로 가상현실이며 대체현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그림이며 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의식(아님 무의식)을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이처럼 식탁이라는 한정된 타블로 위에 일상을 불러들이고 현실을 불러들여 세계의 패턴을 짜고 있었고, 현실과 기억, 현실과 이상을 각각 날실과 씨실 삼아 일상이라는 식탁보를 직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식탁보에는 아마도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계기들이며 삶의 편린들이며 일상의 소회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질 것이었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요소며 성질이기도 한데, 이런 사물이며 모티브들이 또렷하지는 않다. 사물이며 모티브 자체를 부각하는 대신, 특유의 색감이며 질감이 만들어낸 분위기 속에 침잠된 사물이며 모티브를 보는 것 같은, 때론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모티브와 분위기가 일체를 이룬, 그리고 그렇게 사물보다는 분위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런 그림이다. 마치 촘촘하게 짜인 비정형의 망을 보는 듯 얼금얼금하고 얼기설기한 질감이 화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 바탕 사이사이로 모티브들이 포치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애매한 느낌이 감지되는, 그리고 그렇게 질감이 만들어준 서정적인 분위기가 강조되는, 그런 그림이다. 


작가의 그림은 식탁 위의 꿈을 그린 것이며 일상의 소회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질감이며 분위기며 서정적인 느낌은 다름 아닌 일상의 소회를 녹여낸 정서적 앙금이며, 그 정서적 앙금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작가는 꿈이 아닌 꿈꾸는 일상을 그린 것이고, 일상이 아닌 일상의 소회며 감정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런 질감이며 분위기며 서정적인 느낌을 어떻게 우려내는가. 화면에 모티브를 그려 넣는 전후에 그 위에 호분으로 붓 터치를 부가한다. 주로 모티브를 그리기 전에 바탕의 질감을 먼저 만들고 조성하는 편이지만, 때로 모티브 위에 덧칠하기도 한다. 붓 터치를 일률적으로 반복하는 식의, 중첩된 붓 터치를 점층적으로 쌓아나가는 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한지의 스며드는 성질 탓에 모티브가 배경화면 안쪽으로 침잠하기도 하고, 밑층에 그려진 모티브를 붓질로 덮어서 가리기도 한다. 그렇게 그려진 화면이 섬세한 문양이며 패턴 위에 귀얄을 이용해 되는대로 쓱쓱 그은, 그렇게 붓 자국이 여실한 분청이나 청화백자의 색감이며 질감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그렇게 그림 속에 층을 만들고 결을 만들고 레이어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레이어는 삶의 지층이며 시간의 단층에 해당할 것이고, 모티브를 덮어서 가리는 붓질은 베일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작가의 그림에는 그렇게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베일은 일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며 심리적 장치랄 수 있겠다. 그 때문에 그림이 흐릿해 보이기도 하는 베일은 기억의 속성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사물이며 일상 자체보다는 사물과 일상이 남긴 흔적을 그린 것이며, 기억으로 침전된 정서적인 앙금을 그린 것이며, 그 앙금이 남긴 여운과 잔상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식탁을 그리면서 사실은 세계를 그리고 있었고, 꿈을 그리면서 정작 일상을 그리고 있었다. 비록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그림이지만 작가에 한정되지는 않는, 개별적인 그림이지만 보편성을 얻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의 소회며 생활감정이 여운과 잔상으로 남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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