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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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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섭 원초의 풍경
2014.12.20-2015.2.1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회화의 시원(始原), 그 참 풍경

황유정 |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1. 전시를 개최하며
깊은 산 나무들은 미련 없이 우수수 잎을 떨구며 나목(裸木)이 되어간다.
1년의 시간동안 발아와 성장, 결실을 끝낸 숲이 또 다른 생장을 기약하는 시점이다.
무성한 몸체가 사라진 뒤, 생의 근간이 되는 최소한의 지체(肢體) 만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다. 삶을 잇게 하는 원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나무는 사시사철 많은 배움을 준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중견작가 초대전은 ‘강렬한 창작력’과 ‘두드러진 작업역량’으로 지역미술계의 중심을 이룬 작가를 초대하는 전시이다. 2014년, 중견작가초대전 작가에 선정된 김유섭은 지독한 사유로 나목(裸木)이 되어가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광주와 독일을 오고 가면서 이룬 학업과정만 보아도 얼마나 치열한 정신으로 고민하고 실천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방대한 현대미술의 장에서 독자성으로 구별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세상의 패러다임에 수긍하지 않는 김유섭은 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국제미술계에서도 인정받는 화업을 이루어내고 있다.


Stromland, 200x180x4cm, acrylic on canvas, 2011


희망 die Hoffnung, 2011, 200x180cm, Acrylic on canvas



for J.B., 120x120cm,mixed media on canvas, 2014



2. 학업의 길
1980년대, 김유섭은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다니면서 임직순․진양욱 교수 등 지역미술계를 이끄는 작가들의 지도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아낌을 받으면서 학생 시절을 보냈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굳어져간 오지호 화맥의 틀, 유행이 되어버린 하이퍼리얼리즘 등등.. 시대적 조류로 몰고 가는 화단의 형태는 답답함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림 작업의 불분명한 부분들에 대한 욕구가 고조됨에 따라 김유섭은 작업 이전에 철학적 바탕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1984년 철학의 본고장인 독일로 떠났다. 

당시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어 있던 독일은 신표현주의가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쟝르적인 신미술의 우상이 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바젤리츠 등 독일 현대미술 거장의 소식을 전시나 신문지면을 통해 접하면서 김유섭은 문화충격에 빠졌다. 바젤리츠(Georg Baselitz) 는 ‘새로운 그림’을 목표로 내세웠다. 새로운 그림만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전시회에서 힘 있는 붓터치, 뚜렷한 색채, 두터운 물감층으로 ‘모티브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바젤리츠의 그림을 보고 강하게 매료당했다. 바젤리츠는 모티브를 거꾸로 뒤집어 놓음으로써 회화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김유섭은 이곳에서 자신의 회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보았다. 1986년, 바젤리츠에게 수학하기 위해 베를린 예술종합대학교(Hdk)에 입학했지만, 바젤리츠는 베를린대학을 떠난 직후였다. 바젤리츠가 전통 회화에 기초한 화풍을 유지한 반면, 김유섭의 은사가 된 볼프강 페트릭(Wolfgang Petrick) 교수는 실험성 강한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 팝아트의 기수인 짐 다인(Jim Dine)의 지도까지 받음으로써 현대미술의 신경향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동베를린 미술대학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한 판화와 드로잉을 수학하였는데, 이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가 정치적 체제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도 경험할 수 있었다.


Drawing, 85x115cm, 종이 위에 연필 목탄, 2001


Drawing from Project, 90x110cm, 종이 위에 연필 목탄, 1998-2001


김유섭의 유학 시점인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독일은 두 체제의 공존 및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현대미술의 급물살을 일으키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욱이 백남준의 실험적 미디어아트의 등장은 미술표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시각예술이 주는 효과는 평면이 주는 효과보다 파장이 훨씬 강력했다. 김유섭은 일찍부터 전자매체와 친근했다. 조선대학교 재학시절, 무선통신국(HAM)을 설립하고 무선통신으로 외국의 회원들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자유로운 교신을 했다. 많은 단파의 잡음 속에서 주파수를 맞추고 해독해야 하는 무선통신 활동으로 소리에 민감하게 되었다. 전자매체에 익숙해 있던 김유섭은 자신의 작업영역에 사운드의 삽입, 활용으로까지 생각을 확장시켜 갔다. 

창작의 초기 단계인 드로잉은 최초의 아이디어(개념)을 끄집어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유섭이 90년대 중반에 작성한 전시공간에 대한 계획 도면을 보면, 그림이 바닥에 깔린 ‘회화의 밭’에 각국의 언어로 말이 흘러나오는 ‘사운드 스프링클러(sound sprinkler)'가 설계되어 있다. 사운드 스프링클러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는 많은 잡음이 섞여 있다. 소음과 원하는 사운드에 둘러싸인 회화가 어떻게 상호관계를 형성 하는가 등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김유섭이 이처럼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촉매가 된 독일 미술계의 분위기는 작업에 대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다양한 경험과 모색을 통해 얻은 확신으로 김유섭은 현대미술의 매체적 개념에서 ‘회화의 종언’이 대두 했던 시기에 오히려 ‘회화의 근원’을 향해 나아갔다. 회화의 근원을 추적해 가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작업을 대표하는 ‘검은 그림’의 이론적 토대를 확립시켰다.
 

Schwarze Malerei, 180x135cm, mixed media on canvas, 2004 


Schwarze Malerei, 150x200cm, mixed media on canva, 2005


3. 검은 그림 
김유섭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회화의 발원점을 향한 끝없는 사유를 시작했다. 첨단 매체미술의 등장으로 전자 테크놀로지의 접목이 현대회화에 유행처럼 번지면서 회화에 대한 회의(懷疑)가 지배적이 되었음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회화의 종말을 논의하기 보다는 다시 회화의 역할에 대한 철저한 점검으로 회화의 바닥까지 침잠해 보고자 했다. 이것은 회화가 살아남기 위한 시도로써, 최소한의 요소 이외의 불필요한 형식이나 습관들의 모호함 등을 제거하고 색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그가 모든 군더더기를 지우고 다다른 곳은 태초의 암흑과도 같은, 분화를 시작하기 직전의 덩어리였다. 사람들이 김유섭의 <흑색회화 (Schwarze Malerei)>작품을 맞닥뜨릴 때,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김유섭의 조선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지켜 본 박정기 교수는 김유섭의 검은 그림을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를 향한 새로운 실험’이라고 평했다.

작가 스스로 ‘흑색회화(Schwarze Malerei)`라고 부르고 있는 현재의 그의회화는,그가 이러한 내면적인 성찰과 모색 끝에 마침내 회화가 종말을 고한 이후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지점으로 회귀하려는 ‘극단적인 실험’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검은 색은 ‘진부한 물리적인 색의 혼합의 결과가 아니라,다시 원점, 즉 태초 시작 전,‘빛이 있어라’ 직전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앞으로 무엇이... 어떤상태로 태어날 것인지를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유섭의 ‘새로운 풍경-회화의 동산’ 평론 글(2001) 발췌
                                 박정기 | 전 조선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검은 그림의 거친 표면은 역동적이면서 거침이 없다. 두꺼운 흑색의 물감 층은 물리적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강렬한 생명력과 태초의 원시성을 구사한다. 켜켜이 쌓인 층은 가끔 베일 듯 날카롭기까지 하다. 어떤 의식적인 애매모호함도 제거된 불안정한 원형질이며, 새로운 분화 직전의 긴장감이 잠재한다. 김유섭은 회화의 시원(始原)을 향해 가는 동안 자신의 삶에 응축된 감정의 덩어리들을 부려놓고 검정으로 덧칠해 감으로써 거대한 검은 흐름을 만들어 놓는다. 집요한 철학적 자성(自省)으로 결과 된 검은 그림이다.

독일에서 김유섭의 작품을 아끼고 후원했던 슐츠갤러리 관장 미하엘 슐츠(Michael Schultz)는 김유섭을 경계인이라고 부른다. ‘한국과 독일’이라는 삶의 근거지가 그랬고, 회화의 ‘종말’과 ‘시원’을 탐색한 작업의 화두가 그랬고, 서독과 동독이라는 두 체제를 경험하고자 했던 의식이 경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인은 의식이 안주하지 않으며, 현상에 대한 의심과 사유가 가능하다. 김유섭의 인식 태도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자유인’의 것과 동일했다.


 
Energy Field - for R. (Rembrand), 180x135cm, mixed media on canvas, 2003



Energy Field II -10,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11 


Energy Field II -12,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11


4. 유색 그림 
검은 그림에 차츰 유색의 색들이 섞여 들었다. 검은 기운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붉고 푸르스름한 색상들이 비어져 나왔다. 이 시기의 작업이 <Energy Field >시리즈로, 언뜻 검은 그림이 변화하는 중에 있는 작업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나, 검은 그림은 항상 회기 할 수 있는 뿌리 같은 존재이며, 유색 그림은 좀 더 적극적으로 빛 에너지를 주입하여 창조 영역의 가시화를 시도한 것이다. 김유섭은 원색 덩어리를 검은 덩어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영역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투입시킨 구성체로써 설명한다. 태초의 빛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명멸하는 수많은 이슈와 쏟아지는 개념의 홍수, 치열한 경쟁과 선택 되어진 몇몇 ‘주류’미술의 흐름을 눈 여겨 보며 내 그림 스스로에 대한 검증과 확신으로 시작 한 것이 ‘검은 그림’ 이었다 
‘검은 그림’ 시리즈를 통해 회화본질에 대한 성찰과 의미, 그리고 회화표현에 대한 다른 가능성들을 제기하는 실험이었다면 두 번째 시리즈는 ‘검은그림‘ 뒤에 매달려 마치 ‘디옥시리보오스(deoxyribose)’처럼 그림형체를 이루어가는 영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에너지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창조의 영역에 관한 이해와 비어 보이지만그것들에 대한 접근으로 빛을 투입하고 쌓아 세상에 보여 지게 만들려고 한다. 헤 쳐 나가는 이정표로 작품 “For R.(Rembrand)” 를 세우고 블랙홀처럼 화면에 흡수 시켜 보는 것이다.
시리즈 “ Energy Field ” 대한 소고 /김유섭

2008년 이후 김유섭의 작품은 밝은 원색의 화면으로 바뀌었다. 검은 빛이 물러가고 화려한 빨강, 파랑, 노랑의 색상들이 섞이고 퍼지면서 황홀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세 번째 시리즈 <Piece of Paradise> 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기운의 흐름이 색으로 발광 했다. 빛이 세상에 가득 차면 어둠에 잠긴 형상의 윤곽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작업이 추상회화로 보여 지지만 회화의 복귀를 위해 이루어지는 진행형 작업이며,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기 때문에 추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작업 역시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서있음이 느껴진다.


A Piece of Paradise 33 50x50cm acylic on canvas 2009



A Piece of Paradise 51-Blue, 120x120cm, acylic on canvas, 2009


r+b+w, 80x80cm, acylic on canvas, 2012


5. 끝나지 않은 그림
김유섭의 ‘회화의 복귀’를 위한 실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그는 멈추지 않고 사유하고 탐구하는 태도가 작가의 의무라고 여긴다. 사운드를 회화와 접목시키는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 일찍이 퍼포먼스 작업으로 사운드 드로잉을 시도한 적도 있다. 그의 몰입은 우리에게 시원(始原)의 사운드를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어둠에 잠긴 ‘검은 그림’은 계속해서 여러 촉수를 뻗어 볼 것이다. 그 끝으로 감지된 존재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로 세상과 만나게 되고, 창조영역의 또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 같다. 회화의 부활을 꿈꾸는 김유섭의 사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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