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박수근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박수근미술관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시작으로 ‘특별전 <미석 박수근>’, ‘학술심포지엄<박수근 예술세계의 재조명>’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박수근 파빌리온’까지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박수근 파빌리온’은 건축가 故 이종호 선생의 유작으로 평소 박수근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경의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파빌리온(Pavilion)이란 거대한 건축구조물의 분절부나 그에 속하는 경미한 정원 건축을 일컫는 건축학적 용어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대 자연에 새겨진 파빌리온은 박수근미술관의 건축 철학을 이어가며 내면의 정체성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파빌리온은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개의 전시공간에서는 그동안 박수근 선생과 박수근미술관을 아끼고 사랑해주신 작가와 후원가들이 기증해 주신 귀중한 작품들 총 100여점이 시대적 구분에 의해 전시 될 예정입니다.
나머지 한 공간은 박수근 선생의 ‘아뜰리에’로 박수근미술관의 지성소와도 같은 공간입니다. 선생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던 전업화가로서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화실 하나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 선생이 붓과 파렛트를 들고 날마다 그림을 그렸던 곳. 바로 창신동집 마루였습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지나가는 기름장수가 걸터앉아 수다를 떨다 갔으며 외국 대사관 부인들이 신발을 신고 올라와 선생의 작품을 사 갔던 바로 그 곳. 선생의 화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뜰리에에는 붓을 들고 서서 아들과 아내를 바라보는 자상하고 인자한 표정의 선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는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며‘인간 박수근’, ‘화가 박수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한 현대작가 조덕현의 회화 설치 작업입니다.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박수근 선생의 이미지는 작고하기 불과 2개월 전에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찍었던 사진 자료라는 것이 유족의 증언. 그것은 결코 진정한 선생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족과 함께 수많은 사진 자료를 검증하고 연구한 결과 찾아낸 선생의 얼굴 사진과 체격이 흡사한 장남 박성남의 몸을 합성하여 왕성하게 작업할 당시의 선생 모습을 재현해 내었습니다.
가족애와 예술애, 그리고 민족애가 삼위일치 되는 순간입니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건축 소재인 익스펜티드 메탈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故 이종호 선생의 유작인 박수근 파빌리온은 박수근 선생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기리는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매김해 나갈 것입니다.
□ 전시개요
○ 기 간 : 2014.12.20. ~ 2015.10.11
○ 개 막 식 : 2014.12.20. 토. 14:30
○ 장 소 : 박수근 파빌리온
○ 참여작가 :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천경자, 조덕현 외 100여명
○ 전시분야 및 작품 수 : 서양화, 한국화, 회화 설치, 판화 등 100여점
□ 전시 내용
○ 조덕현 회화 설치 ; 박수근화백과 아내 김복순 그리고 차남 박성민
○ 박명자 회장 기증작품
○ 현대작가 기증작품
□ 기대효과
○ 비로소 인간 박수근, 화가 박수근에 대한 진정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공개
○ 박수근과 박수근미술관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기증자들의 기증작품들을 늘 감상할 수 있는 기회마련.
조덕현 작가노트
박수근선생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선생이 남기신 얼마 안되는 사진들을 탐독하던 과정은 투명한 환영을 통해 선생 생전의 그 시공간으로 진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선생과 같은 범띠 해에 출생하시고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내 선친의 삶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상상의 이입이 가능하였을 터이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연속되는 가난을 딛고 가신 그 치열하고도 질박한 삶이 사진 곳곳에서 드러나 그것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뭉클하였다.
사진에 남겨진 선생의 모습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훤칠한 청년의, 어떤 것은 거인처럼 당당한 장년의, 또 어떤 것은 근엄한 대학교 총장의 모습이다. 그러면 그 여러 모습 중 어느 것이 화가 박수근의 진정한 모습인가? 이에 대해 (박수근선생의)장남 박성남은 1950년대 후반 창신동 시절의 그 모습이 바로 그것이라고 명쾌하게 증언한다. 작업을 위해 그 시절의 얼굴 모습을 찾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박성남의 몸을 촬영하였는데 현재의 박성남의 모습은 그 시절의 박수근이 현현한 듯 기시감이 있다. 신비한 일이다.
조덕현 曺德鉉은 1957년에 강원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에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였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 도호쿠 예술공과대학의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뉴욕, LA, 도쿄, 베를린, 리치먼드, 파리, 더블린, 필라델피아, 오클랜드, 야마가타, 홀컴, 경주 등지의 유수한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28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베니스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 이스탄불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 비엔날레의 본 전시와 특별전, 그리고 뉴욕, 런던,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개최된 400여회의 단체전에 초대되었으며 한불문화상(2001),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1995), 동아미술제 대상(1990)등을 수상하였다.
허쉬혼미술관(워싱턴), 휴스턴미술관, 히로시마미술관, 후쿠오카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박수근파빌리온
설계연도 2013
대지위치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건축규모 지상2층
연면적 595.11 M2
준공 및 개관 2014.12
건축가 故 이종호의 박수근 파빌리온 설계노트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을 양구군에서 진행하고자 했다. 기존 박수근 미술관이 생긴 이후 여러 후원자들로부터 다양한 미술작품들의 후원이 있어서 기증작 전시실이 필요했으며 박수근을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처음 양구군에서 요구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은 박수근 화백의 생가 건립이었다. 생가라고 함은 흔히들 위인들을 기리거나 정치적인 요소가 다분한 행위들 이었다. 어쩌보면 전근대적인 유산의 오류라고도 보인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생가의 신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먼저 양구군과의 협의를 통해 박수근 화백을 기념할 수 있는 아뜨리에와 기증작 전시실이 되는 파빌리온 건립으로 가락을 잡았다.
대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박수근 미술관과 그 이후에 건립된 예술인촌 사이 골짜기 상부에 전망좋은 논 위였다. 계획에 앞서 이 장소를 박수근 마을이라 칭하고 전체적인 마스터플랜 계획이 요구되었다. 이 골짜기를 진입하면서 박수근 미술관, 예술인촌, 묘역, 무엇보다도 시골풍경을 만끽하면서 관람한 후 빠져나가기 까지 자연스러운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건축과 전시 이상의 박수근 작품에서 우러나는 그 정서의 공감과 진정한 박수근 마을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이다.
마침,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산림청의 숲 가꾸기 사업, 배꼽 산림 공원 사업 그리고 향후 전개될 것이 유력시되는 생태평화벨트 사업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한 사업들을 통해 박수근 마을이 점차 확장되고 또 새롭게 가꾸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럴수록 사업들간의 연계와 조정은 절대적인 사안이었다. 때로 그 연계와 조정이 원활치 못하여 되돌릴 수 없는 실패가 초래될 가능성 또한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예상되는 사업을 포함하여 과제정리 로드맵을 작성하여 박수근 마을 연관사업들을 순차적으로 검토해 나가는 동시에 발생되는 변수를 관리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박수근 마을과 적합하지 않는 배꼽 산림 공원 사업이 계획 도중 진행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또한 파빌리온 위쪽 골짜기로 계획될 전원마을 도로는 지극히 엔지니어링적인 작업으로 도로가 나고 말았다. 이 땅의 가치를 깨부수는 폭력적인 도로가 생긴 것이다.
이미 몇해전 박수근 미술관과 예술인촌을 잇는 바닥 포장을 전혀 이 땅과 어울리지 않는 재료와 패턴으로 시공해 항의를 한적도 있었는데 또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행정상의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먼저, 박수근 마을 관람의 큰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첫 진입한 후 주차장에서 내려 보행으로 박수근 기념미술관을 관함하고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골짜기 능선을 따라 묘역으로 이어진다. 그 이후 골짜기 능선을 내려와 논자락 한가운데 있는 박수근 파빌리온을 관람 후 다시 2층계단으로 내려와 논 위에 산책로를 따라서 예술인촌을 관람하고 관람을 끝낸다. 이 동선은 골짜기의 능선과 논 위에서 거닐면서 마주하게 되는 박수근의 작품들과 기증작을 관람하는 것이다. 짧지않은 동선으로 내외부의 풍경들을 다양하게 관람하는 작지만 큰 전시이며 건축이다. 실제 각 전시관들의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경험들을 관람자들에게 부여할 것이다.
기존의 자연 그리드인 논자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논 위에 존재하기에 연결로의 제약은 받았지만 전용보행로에서 이어져 논위에 떠있는 브릿지로 연결시켰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각각의 논 그리드 안으로 배치하기 위해 3개 동으로 분할하였고 각 전시동을 내부 연결통로로 이었다. 그리고 외벽선을 논 경계축과 평행하게 하여 자연의 축에 충실하였다. 형태는 단순해 보이지만 각 외벽에 변화를 주었다. 파빌리온이 위치한 논은 습지로써 시간과 계절에 따라 물이 차고 빠지고를 반복하게 될 것이고 다양한 식생들이 풍성하게 자라 자연 그대로의 땅에 서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될 것이다.
가장 고민이 컸던 부분이 외장재였다. 기존 미술관들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을 지양하고 박수근 화백의 작품에서 착안하여 MATIERE를 정하는 것이 가장 박수근 파빌리온 답다고 판단했고 박수근마을에서 다양한 변화를 주려고 했다. 익스펜디드 메탈은 국내에서 흔치않은 재료로서 보는 이에게는 낯설수도 있지만 흠이 파여지고 늘여지는 재료는 박수근이 주로 사용하던 MATIERE와도 이미지가 잘 부합된다. 각 동 사이의 외벽은 건축보다 앞서 생성된 논자락에 양보하듯 분할면을 절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존 박수근 기념미술관 외벽재료와 동일한 석재쌓기로 형성이 된다.
건축이 선다는 것은 땅이 가진 질서를 지워가는 행위이다. 오랜전부터 지속되어 온 땅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은 누군가에는 기억을 지워버리는 행위이며 그 장소가 가지는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골짜기의 논처럼 오래전부터 주변 산세와 어우려져 단단이 펼쳐지는 이 땅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풍경속에서 가장 박수근 스러운 소박함과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박수근 미술관때 부터 자연의 질서에 존중하는 형태로 계획하였다. 오히려 능선에 묻혀 이곳 능선자락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지어진 예술인촌의 형상은 어떠한가. 논위에 떠있는 형태로 기존 논자락의 절서를 지우지 않고 거기에 순응하고자 했다. 이 맥락에 이어서 박수근 파빌리온도 최대한 그 질서를 인정하면서 동화되고자 한다. 박수근 화백이 유년시절 거닐고 생활했던 이 아름다운 땅에서 관람객 또한 낯설지 않는 풍경을 맞이하며 교감하고자 하는 바램이고 파빌리온이 들어서기 전 이 땅이 가졌을 익숙한 질서를 존중하고자 한다.
건축가 故 이 종호 (李 鍾昊)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ua-sa 도시건축연구소 소장
1957년 서울생으로 2014년 2월 21일 생을 마감했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수근의 공간건축연구소 에서 10년을 보냈다. 1989년 문화집단 studio metaa를 설립하고 축제기획, 무대디자인, 문화시설컨설팅 등의 다양한 문화 활동과 함께 건축행위를 해오고 있다. 2002년 베니스비엔날레와 광주, 부산 비엔날레의 초대작가였으며 여러 건축가들과 함께 sa(서울건축학교)를 만들어 운영 해오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 분원 백자관, 이순신 기념관, 노근리 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 사회의 기억을 매개로 하는 작업과 율전교회, 바른손 센터, 홍천팜파스 휴게소, 방목기념관 등의 작업이 있다. 김수근 문화상과 두 번에 걸친 아천상 등 여러 상들을 수상했다.
“현대성‘(modernity)이란 지극히 파편화 된 개인과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강요되는 전체 사이의 텅 빈 곳이라는 알렝 뚜렌의 말에 동의하며 따라서 오늘날 건축의 역할이란 그 텅 빈곳을 메워나갈 수 있는, 의미가 흐르는 “장소”만들기를 통해 그 양쪽에 소통의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것을 위해 그의“장소”는 의미가 가득 찬 "현상적인 장소”와 전개의 과정이 계속되는“사회적 장소”사이에서 진동하며 균형을 확보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를 기다리는 생성의 장소 - becoming place 이기를 원한다.
이구열.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한 화랑 운영자의 컬렉션,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2004.4.24~8.31) 도록에서 발췌
수일 전, 갤러리 현대에서 박명자 사장을 만났을 때의 감명을 말하고 싶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원화와 전시자료가 너무 부족해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 했다. 양구군청(설립자)측에서는 개관 후 어렵게 수억원 가격의 유화 하나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 이상 구입이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수의 의지와 열의는 대단하다. 현재 포천의 공원묘지에 묻혀있는 박수근 선생의 묘를 출생지인 양구의 기념미술관 뒷동산에 이장하게 되어 새로운 추모행사가 추진되고 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내가 그동안 화랑을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박수근 선생의 유화 한 점과 드로잉이 포함된 여러 화가의 작품 55점을 그곳에 기증하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박수근 선생의 유작전을 수차 꾸미기도 했고, 또 그의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취급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이렇게라도 선생의 미술관에 기증을 결정하고 보니 내 마음 속에 깊이 쌓여온 선생의 빚이 한결 풀리는 듯하다.”
대단한 미거(美擧)가 아닐수 없다. 나 자신 박수근 선생이 생존할 때부터 그의 작품의 창조적 독자성과 서민적 진실성을 참으로 존경하며 가까이 접촉한 적이 있고, 그의 무한히 선량했던 심성도 잘 알고 있다. 박명자 여사도 1961년 처음 화랑계에 나올 때부터 박수근의 참된 예술가상을 존경하며 작품 판매 등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저런 깊은 인연과 존경이 이번의 박수근미술관을 위한 미거를 실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