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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전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15-03-04 ~ 2015-03-17

  • 참여작가

    김선두, 김황록, 민병헌, 서정태, 우종택, 이종상, 차기율, 차명희, 홍지윤

  • 전시 장소

    갤러리그림손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02.733.1045

  • 홈페이지

    http://www.grims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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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전에 부쳐

다시, 한국정신의 의미를 묻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정신이라는 말은 좀 진부하다. 그 말이 진부한 것은 그 말이 오랫동안 회자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결코 짧지 않은 그 말의 연륜에 비해보면, 그 말의 의미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와중에 있는 것은 한편으로 놀랍고 다르게는 의아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말이 이처럼 놀랍고 의아한 것은 그 말이 처음부터 열린 것이었고, 따라서 항상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갱신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 말의 생리며 의미의 생태 탓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성, 한국적 미의식,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과 같은, 사실상 그 의미가 한국정신과 일맥상통한 주제전이나 기획전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처럼 한국화, 서양화, 사진, 조각설치와 같은 다른 장르들이 한국정신의 주제 아래 하나로 모인 전시는 별로 없었다. 아님, 더러 있었다고는 해도 기억에 남는 전시는 없었다. 한국화와 관련해 그리고 한국정신과 관련해 그동안 참여 작가들이 보여준 주목할 만한 형식실험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한국정신에 대한 정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 그러면서 알고 보면 그 말이 오래전에 미래를 예비하고 있었던 오래된 미래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의미로 묵은 의미를 재생하고 갱신하는 계기로서 작동해주기를 바랄 뿐.


이종상. 수묵의 본성을 추구한 수묵화운동, 고구려 고분벽화 기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벽화운동, 한국산수의 원형을 추적한 원형상 시리즈, 그리고 동판 위에 금박을 붙이고 유약을 발라 고열로 접착시킨 동유화 등 한국화의 형식실험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시도며 제안들이 이종상에게서 유래했다. 그의 화력은 가히 한국화를 매개로 한국화를 넘어서는 형식실험으로 점철된 것으로 봐도 되겠다. 그 형식실험의 연장선에서 작가는 스스로 장판화로 명명한 일련의 그림들을 내놓는다. 근작으로 보기엔 꽤나 오랫동안 숙성시켜온 그림들이다. 알다시피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종이장판을 방바닥재로 사용해왔다. 아마도 방바닥으로 종이를 깔고 산 경우로 치자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인 고유의 생활감정이며 철학이 긷든 예로 봐도 되겠다. 아마도 작가가 종이장판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여기에 종이장판은 사이즈가 한정돼 있어서 마치 조각보가 그런 것처럼 면과 면을 연이어 붙여야 한다. 이런 연유로 종이장판에는 면과 면이 어우러진 면구성이 있고 화면운영이 있다. 여기에 치자물을 들여 은근한 색채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처음엔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근작에선 아예 원형 그대로를 제안한다. 이로써 작가의 형식실험은 생활오브제를 직접 도입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술의 계기를 발견하는 경우로 심화된다.


서정태. 서정태 그림의 특징은 푸른 색조의 배경화면과 그 위에 덧그려진 왜곡된 인물, 그리고 푸른 색조와 어우러진 초상이 불러일으키는 밤의 서정(정서?)을 꼽을 수가 있겠다. 청색과 왜곡 그리고 밤 정도로 키워드가 정리되는 것. 서양의 논법이긴 하지만, 청색은 우울한 기질을 상징한다. 우울한 기질이 좀 그렇다면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예술가를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으로 본 알브레히드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그렇고, 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 그렇다. 노발리스에게 청색은 밤을 상징하고 정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좀 더 최근의 예로는 이브 클라인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와, 깊고 푸른 대양과 동시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의 절대고독을 상징하는 그랑 블루가 그렇다. 그리고 왜곡은 특히 비엔나분리파와 표현주의가 공유하는 문법이다. 작가의 경우에 그 문법은 표현이 흔히 그렇듯 자기 외부를 향한 표출을 지향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을 향하고 자기내부로부터의 어떤 서정적 환기를 위해서 동원된다. 그렇게 청색과 어우러진 인물이 깊고 푸른 밤을 열어놓는다. 작가는 그림을 밤의 초상이라고 명명한다. 인물이 있음에도 밤의 초상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그림 속 인물은 아마도 밤을 의인화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의인화된 밤이 약간은 우울한 듯 내면적인 정서를 자아내고, 그 이면에 어떤 설화적인 이야기라도 숨겨 놓고 있을 것 같다.


차명희. 차명희는 캔버스나 종이 위에 안료로 밑칠을 한 후, 그 칠이 채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무엇인가를 그린다기보다는 그저 무심하게 목탄으로 선을 그어나간다. 그러다보면 목탄의 질료가 밑칠에 배어들고, 화면 위로는 목탄가루가 흘러내리거나 흩뿌려진다. 주로 무채색과 같은 모노톤 위에 이리저리 그어진 선들이 어우러진 화면이 분방한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여기까지는 회화가 가능해지는 조건으로서의 평면과 최소한으로 절제된 색채, 그리고 목탄 드로잉에 연유한 고유의 물성과 질감이 어우러진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증언하는 그림 같다. 그러나 작가는 비록 모더니즘 세대이지만, 그래서 외관상 모더니즘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모더니즘을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엄격한 모더니즘에 비해 보면, 작가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서정적이고 서사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무채색 화면에 무심하게 드리워진 선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정경을 가만히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정적인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수초며 웃자란 잡풀들이 어우러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작가는 일종의 내면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김선두. 김선두는 사회학적 의미가 뚜렷한 그림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줄을 타는 광대와 같은 곡마단과 한잔 술로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포장마차와 같은 그림들이다. 특히 반편 시리즈에 등장하는 반편은 요샛말로 잉여인간에 해당하겠다. 무기력한 보통사람들의 자의식을 통해 사회와 제도를 향한 작가의 자의식을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남도의 풍경에 눈을 돌렸다. 여기서 남도는 장소특정적 의미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우리 산하며 우리 정서를 대변해주는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에 맞춘 야트막한 언덕과 능선, 화려하면서 수수한 조각보를 펼쳐 놓은 듯 면과 면을 맞대고 있는 논밭 속에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붉은 흙을 숨겨놓고 있는(품고 있는?) 정경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엄밀하게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캐내고 주지시켜 비로소 알게 된 풍경이며 정경들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치자면 흙과 함께 들풀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근작에서 이 이름 모를 들풀들을 그리는데, 그린다기보다는 일종의 드리핑 기법을 통해 들풀(아님 자연?) 고유의 우연성과 비정형성을 부각시킨다. 이로써 모든 생명의 우연성과 비정형성을 강조하고 극화한다.  

 

김황록. 김황록의 조각은 입체그림이라고 부를 만큼 어떤 회화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더러는 실제로 자연풍경과 같은 그림을 그려 조각으로 재현된 입체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다. 이를테면 자연풍경을 그린 그림 위로 흘러내리는 폭포를 조각으로 대신한 경우가 그렇다. 회화와 조각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어우러진 유기적 전체를 일궈내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 이후, 탈장르 내지 탈모더니즘 경향을 예시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 연장선에서 작가는 조각으로 섬세하게 재현한 나뭇가지를 벽에다 걸어놓는다. 그러면 뒤쪽 벽면 위로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으로 재현된 자연과 그림자가 실물감을 놓고 다툰다. 이런 다툼은 조각으로 재현된 자연이 그림자와 마찬가지의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을 띠고 있는 데서 극대화된다. 자연 자체에 대한 이중삼중의 모방이 하나의 결로 포개져 자연과 이미지, 실물과 이미테이션 간의 관계에 대한 선입견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만든다. 이로써 일종의 유사 실재라고 부를 만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고, 자연의 한 부분 아님 자연에서의 느낌이며 인상이며 정서의 한 조각을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개념적이고 시적으로 와 닿는다.


민병헌. 예외가 없지 않지만, 보통 흑백사진은 컬러사진에 비해 강렬하다. 색채가 없기 때문에 색채와 같은 조형요소에 의해 분산될 수도 있는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강도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흑백 톤을 강렬하게 대비시킨다거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이런 강도의 계기와 무관하지가 않다. 순간의 포착이라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미학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것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감성의 경제학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민병헌의 흑백사진은 흑백 톤이 강렬하게 대비되지도 않고 극적 순간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럼 뭔가. 작가가 찍은 인물사진이나 풍경사진에는 흑백의 대비가 없다. 피사체를 흑백으로 옮기면서, 그 스펙트럼 중 양쪽 끝을 제외한 중간계조만으로 한정한 것 같다. 풍부한 중간계조와 함께, 양쪽 끝이 없으므로 오히려 마치 피부와도 같은 부드럽고 섬세한 질감이 감촉돼온다. 그렇게 작가는 실제로 강변에서 볼 수 있는 물안개와 같은, 그 물안개 속에 사물대상이 온통 잠기는 극적 순간(?)과도 같은, 그런 풍경사진을 보여준다. 인물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 풍경이든 인물이든 작가의 관심은 피사체의 핍진성에 있다기보다는 피사체가 불러일으키는 고유의 분위기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사물대상의 흐릿한, 애매한, 아득한, 시적인, 서정적인 품성의 한 순간(?)을 열어 보인다.


우종택. 갑질이 공분을 사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종택의 초기 작업을 대변해주는 줄서기 시리즈는 사실상 이 갑질을 테마로 한 것이다. 을이 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줄을 잘 서야 하는 것. 이처럼 사회학적 의미가 뚜렷한 주제의식을 넘어, 작가는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의미로 건너간다. 시원의 기억을 더듬어 존재의 겉에서 속으로 파고드는 것. 그리고 근작에선 자연의 본질이며 수묵의 본성을 파고드는 것으로 주제의식이 확장되고 심화된다. 알만한 형상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질질 흘리고 쳐 바른, 한바탕 푸닥거리가 휘젓고 간 흔적이 격렬했을 행위를 증언해 줄 뿐. 형상이 흔적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행위가 서사를 대체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를 위해 작가는 직접 제조한 먹을 쓰는데, 숯을 갈아 아교와 함께 물에 끓여낸 걸쭉하고 질박한 먹이다. 행위의 흔적이 여실한 일종의 몸그림과 함께, 실제로 만지면 숯 알갱이가 손끝에 감촉돼오는 먹의 물성을 통해 시각언어의 범주를 촉각언어로까지 확장시킨다. 적어도 작가의 그림에 견주어 볼 때, 시각언어가 관념적이라면 촉각언어의 생리는 현저하게 몸의 그것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는 수묵의 범주를 몸그림으로 확장시켜놓고 있었다.


차기율.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 사이. 차기율의 작업을 대변하는 주제다. 여기서 방주는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강목은 생태환경을 집대성한 본초강목에서 차용해왔다. 각각 서양의 생명사상과 동양의 생태학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로써 적어도 주제로 볼 때 작가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원형을 하나로 아우르는 거대서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작가는 포도나무를 차용한다.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그 생김새가 구불구불하고 비정형이어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다. 작가는 이 포도나무를 잘라 토막 낸 다음, 그 토막을 하나로 연이어 붙여 긴 띠를 만든다. 마디마디가 있을 뿐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거대한 뫼비우스 띠를 만들어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여행을 표상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생태를 상징하는 포도나무와 자갈돌, 기를 상징하는 파문과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뿌리 드로잉과 함께 근작에선 게의 집을 차용한다. 갯벌에 게가 지은 집 그대로를 모종삽으로 떠내 노천 소성한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생태학을 바탕으로 자연의 원형과 존재의 원형이 만나지는 접점을 모색하는 것에 맞춰진다.


홍지윤. 홍지윤에게는 한국화의 형식파괴를 선도하는 작가 내지 퓨전동양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런 작가의 그림을 보면 무당과 무속이 떠오른다. 무당과 무속에도 여러 질이 있는데, 크게 보면 그 질은 어두운 기운 쪽과 밝은 기운으로 나뉜다. 죽음충동과 삶의 충동, 아님 내향적이고 외향적인 경향성의 구분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 가운데 작가는 후자에 가깝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온통 꽃들이 만발해 그 환희의 기운이 화면 밖으로 온통 넘쳐날 것 같고, 폭발할 것 같고, 보는 이를 전염시켜 덩달아 들뜰 것 같다. 꽃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꽃이 아닌 다른 사물대상이나 관념 내지 감정의 경우에도 꼭 그럴 것이다. 언제나 실제보다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하고 더 분방할 것이다. 그게 뭔가. 흥이다. 에로스로 치자면 오르가즘 내지 엑스터시가 그렇고, 조형적인 문법으로 따지자면 공간공포가 되겠다. 작가에게 화면은 그 자체 자족적인 또 다른 현실이다. 그런데 그 현실이 작가에게는 좁다. 환희가 현실용량을 초과하면 흥이 되고, 에로스에 과부하가 걸리면 엑스터시가 되고, 화면이 폭발하면 공간공포가 된다. 그렇게 작가의 꽃그림은 보는 이에게 꽃을 나누어주고 좋은 기운을 나누어준다. 분방하고 호방한 기운이며 알록달록한 색채의 향연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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