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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란 : 영원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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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


사색과 신념의 평면

회화에서 투시, 음영, 심도 등을 없애는 게 예술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그것이 19세말과 20세기 초 서구 회화론이었다. 그러다 60년대에 와서는 화면 자체보다 화면을 만드는 안료까지 예술의 진실로 만들었다. 포스트모던을 지나면서 이러한 모든 예술적 전복과 비판은, 사실 좀 지겹기도 하다.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텅 빈 제스처 같은 작품들이 컨템포러리의 우량주였던 시대를 지나왔다. 그 자리에 지금 무엇이 있는가.


20세기 초 사라진 음영은 황인란의 평면에서 작품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으로 되살아난다. 담이나 건물의 벽면을 배경으로 나뭇잎과 나뭇가지의 그림자, 반쯤 열린 창문과 창틀, 파드득 날갯짓 하는 새, 언어와 기억을 상실한 듯한 인물 등이 그려져 있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제목처럼 <영원과 하루>는 고요와 적막의 풍경 혹은 인물화다.


우선 청색 바탕을 기저로 하면서 화면의 전체 배경이 되기도 하는 벽면은 치밀하게 구성된 가로와 세로선, 사선으로 구획된다. 그 위에 그려진 새와 인물, 나무 풍경은 평면적인데 아마 캔버스가 벽면 역할을 부여받음으로 인해 그 위에 새겨진 그림자가 각인된 효과 때문이지 싶다. 또 벽면에 그려진 선들은 한 공간 속에 그려진 개별 사물들을 미묘한 차이의 시간 속에 앉힌다. 실루엣이나 그림자로 표현된 나뭇가지나 나뭇잎 등은 계절과 바람 등 시간이 흐르는 느낌을 준다. 새의 날갯짓은 움직임의 표현으로 인해 그 화면의 주위 공간에 떨림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파장이 멀찍한 인물에게까지 가닿진 않다. 그래서 화면 내에서 인물은 외롭다.


마치 단조로워 보이는 청색 바탕의 벽면은 여러 겹으로 덧대고 흘린 흔적으로 시간성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작가 자신이 캔버스와 노동하고 투쟁하면서 보낸 시간을 동시에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작품 형식이 되었다. 작품의 이미지들이 풍경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고독이라는 원형적인 심리를 품게 만든 것은 이러한 미적 형식을 버리지 않아서다. 평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구상을 그린 힘겨움은 아마 작가의 신념일 테다. 무상한 것들을 거머쥐어 간직하고, 집중하여 응시하여 화면에 새기고, 다시 그것과 일체가 되어 보는 것, 이는 사색과 신념의 평면이다.


고독을 꿈꿀 권리
“나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고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따금 천국처럼 그것을 꿈꿀 권리가 사람에게는 있을 것이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고독을 꿈꿀 때가 있다. 그러나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두 천사가,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언제나 금하였다. 한 천사는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고, 또 한 천사는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진실로 사는 것은 몇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 까뮈의 『안과 겉』 에서

 

고독은 어쩌면 영원성과 맞닿아 있다. 고독과 침묵이 조화롭게 배치된 실루엣의 세계로서 황인란의 견고한 평면은 온갖 부조리와 불의, 악다구니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림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구체적인 현실을 대비시켜서만 한정지어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모호함과 혼돈, 형식과 의미가 과잉된 시대에 염증을 느낄 때 우리가 눈을 돌리는 것은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움 자체, 사랑 혹은 고독의 시원, 시기와 질투의 본연에 대해 투명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생이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18세기 낭만주의를 소환하는 경우가 그렇다. 변화무쌍하고 아우성의 현실에서, 온통 새롭다 못해 새로움이 지겨움이 된 현대예술에서 원형의 욕망은 영원성과 맞닿고 이는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미적 신념이 된다.


도덕과 종교, 정치적 저항이 있듯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예술적 신념 혹은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황인란이 추구하는 침묵과 고독으로 동결된 이미지는 현실의 아우성들로 덧난 악다구니의 하루에 영원이라는 순수한 시간성을 부여하는 거 같다. 순간은 소중함으로 인해 영원하다고 말이다. 사실 우린 모두 청명한 날을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다.


-정형탁(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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