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교감, 그것이 만들어내는 존재의 의미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가족이라는 단어는 매우 보편적인 의미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보편적인만큼 개인적이며 특수한 가치를 갖는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와 아이, 따뜻한 집, 쉼터, 휴식의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극히 매우 개인적인 사람들–나의 가족-과 나의 집, 나만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가족이라는 단어만큼 다양한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상상의 이미지들과 그들을 향한 마음은 행복에 대한 느낌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행복은 충분한 만족과 기쁨에 이르는 감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순간적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 행복은 지속적인 내적 감정이다. 그런데 행복의 느낌 그리고 그에 영향을 주는 가족애(家族愛)는 순조로움과 평온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 불행, 실패와 후회, 고뇌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극복까지 끌어안는다.
예술가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예술을 향한 길이 언제나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자신의 실존적 과제이자 숙명을 진심을 다해 끌어안고 그 속에서 행복을 체험한다.
한 가족이 있다. 매우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다. 그들은 모두 예술가이다. 조각가이다.
그들은 그 어떤 감정보다 강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신념으로 함께 한다.
권석만은 보령오석, 스테인리스 스틸 티타늄 골드(stainless steel titanium gold)로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을 압축시켜 보여준다. 사실 돌과 금속이라는 재료는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이어지는 소멸을 암시하기 보다는 영원성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발아와 소멸의 무한한 반복과 순환은 필연적으로 영원을 향한다. 하루는 단순히 객관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새롭게 시작되고 소멸되는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는 기적이다. 그 하루 속에서 세계 속의 모든 존재들은 생겨나고 어울리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이에 권석만은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돌에서 생명을 표현하는 원형적 이미지를 찾아냈듯이 생성과 소멸이 담아내는 영원을 담아내고, 정신과 몸 모두를 통해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세계의 원리와 신비를 드러낸다.
권석만의 작품이 분출하는 고요함과 평온함은 잉태의 시간을 위한 원천이며 환희의 원천이다. 그의 작업을 마주하는 관객은 그 함축적인 형상 속에서 작은 씨앗, 작은 새싹,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초원, 대지, 바람과 공기 그리고 하늘과 바다를 체험한다. 그리고 삶과 생명과 세계에 대한 충만함과 경외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권석만은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존재와 그들이 생명에 대한 경의인 동시에 삶이 무엇인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란 무엇인지 경건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작가는 고요한 독백과 침묵의 언어로 말한다. 화려한 수식이 없는 겸허하고 단순한 형상들은 세계를 향하는 작가적 애정과 건강한 겸손함을 전달한다. 궁극적으로 세계와의 교감을 불러내는 권석만의 작업은 생태주의(ecologism)적이다. 그는 정서적 소통이 증발한 건조한 표현의 언어들을 거부한다. 진정한 관계를 창조한다. 물결처럼, 파도처럼 넘실대며 개인의 의식, 자연, 그리고 세계의 흐름을 창조한다.
조금은 다른 차원이지만, 차현주 역시 관계와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한다.
차현주는 손(hand)을 만든다. 손은 언어 못지않게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보여주고 타인과 대화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손은 미처 전달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손은 비유적이고 관용적인 다양한 의미를 담아낸다.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rhetorician)이자 웅변가였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가 ‘손은 입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말을 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로 이미 오래 전부터 손은 인간의 생각을 전달하고 교류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손 하나만으로도 주관적이고 매우 특수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 손이 취하는 동작들은 통사론(統辭論)으로부터 자유로운 숨겨진 언어이자 작가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힌트(hint)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와 우리를 포함하는 인간의 자아를 전달하는 통로이다. 특히 차현주와 같은 조각가에게 손은 더욱 중요한 소통의 길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 깊이 숨겨진 생각과 감정을 꺼낸다. 자신을 표현한다. 존재를 확인한다.
대리석들은 그녀의 손이 스치는 대로 그녀의 분신이 된다.
한편 손은 다른 존재와의 직접적인 만남과 관계를 상상케 한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과 손을 잡는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손으로 어깨와 등을 다독여준다. 누군가가 아파하면 상처를 쓰다듬어 준다. 그것은 따뜻한 감정이 담긴 관계이다. 사랑이 담긴 관계이다. 관계를 암시하는 차현주의 손은 결국 인간 존재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인간은 타인과의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나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권현빈은 다양한 소재와 주재를 이용해 재기발랄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번에 전시되는 그녀의 작품들 중 시선을 끄는 것은 <블록 block> 연작이다. 권현빈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 하나의 구조물-건축-을 위한 기본 요소인 블록의 형태를 이용해 로봇(robot) 같기도 하고 고대 석상 같기도 한 형상을 완성했다. 그것은 첨단의 과학 기술로 유사 인간을 만들어 내는 현대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풍요로움과 생명의 원초적 힘을 전달하는 원시적 생명력을 전달한다. 사진 작업인 <붉은 초상> 시리즈는 약동하는 생명력의 이미지와 정서를 더욱 부각시킨다.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한 그 순간부터, 아니 이 세상에 존재가 생성된 이래로 삶은 –권현빈의 작업이 그렇듯-하나하나의 부분들이 모이고 작은 존재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관계의 결과물이었다. 그 관계들은 일정하게 반복되고 증식되는 블록이 가져오는 리듬(rhythm)감이 그렇듯 자연과 세계의 조화로운 율동과 운율을 담아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형상화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면서 예술을 창조해냈다. 따라서 작품은 무한히 확장 가능한 잠재적인 상징물이며 작은 우주와 같다. 그것은 언어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모호한 것, 심오한 것, 신비로운 것을 전달한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맺음은 특별한 정신적 교감, 정서와 감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
예술가-작품-관객, 존재-세계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와 그 관계가 이끌어내는 무수한 결과들은 가장 활발하고 가동(可動)적이며 창조적인 –세계를 향한-상상력을 이끌어낸다. 이 상상력은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꿈꾸게 하며 치유해준다. 내면-마음과 정신-을 비약시켜 충만한 상태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