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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윤정 (갤러리 Koo 협력 큐레이터)
내면적 갈등의 일반화- 신건우의 <All Saints>
누구에게나 태어나 자라면서 겪게 되는 현실적인 사건들이 있다. 유년시절의 경험은 대부분 명확한 기억보다는 공포심이나 흔적들로, 살아가는 가운데 드문드문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사건들은 벌레가 무릎에 기어오르는 느낌과 같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세월호 사건처럼 거대한 권력구조 앞에서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 존재가 이승에 출현하여 놀라움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유령’처럼 사회적 질서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불길한 존재를 만난 것과도 같은 것이다.
신건우는 이렇게 사람이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내면적인 갈등과 심리상태를 오랜 기간 탐구하여 왔다.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는 라캉의 말처럼 남녀가 싸우고, 종교적인 갈등을 겪게 되거나, 권력 구조 재편의 중심에 놓여 있는 다양한 갈등상황을 신화적 이미지들과 병치시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로 연속된 갈등을 작가가 억지로 해결하려 한다거나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는 선동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지금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역사적인 내러티브에서 기억되어온 주류 미술사에서 벗어나 진정한 진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신건우는 불안을 야기시키는 정서, 반복되는 흔적, 충동적인 자아, 모호한 얼굴 표정 등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종교적인 제단화의 형식을 빌어 온다. 이는 기존의 미술에서 논의되었던 알레고리적인 기법이라기보다는 담담하게 스토리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을 인용한 것으로, 대칭이거나 삼단화의 형식을 주로 쓰고 있다. 대립적인 구도를 띠고 있는 부조에서는 ‘선과 악’, ‘낮과 밤’처럼 팽팽하게 반대되는 성향이 강렬한 갈등적 사건들을 보이고 있으며, 삼단화의 경우에는 가운데에 주요 사건을 배치하고 이전의 상황과 이후의 사건이 양옆으로 진행되어 순차적인 듯 아닌 듯 꼬여 있는 사건들을 연결한다. 이는 사건이 단지 ‘읽히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다시금 눈여겨보게 되는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각종 포즈나 제스처 역시 다양한 종교적인 배경에 입각해서 등장하고 있다. 십자가 배경 아래 군상이 등장한다든지,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차용하지만 스토리의 전개는 불교적 순환의 고리를 갖는다든지, 혹은 열두 명 사도들의 의미대로 배치하면서도 배경에는 불상이 등장하는 등 혼종적인 성격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제멋대로의 혼종과 배치가 아니라 어느 종교, 어떤 사회에서도 적용이 되는 인간 본연의 성질에 충실한 모습들이다. 예를 들어 차가운 표면 아래 가득히 숨겨져 있는 뾰족한 물건들은 누구나 경험했음직한 관계에서의 상처들이라고 할 수 있고, 작품에 종종 나타나는 가슴을 관통하는 두터운 창은 지난 날의 크고 작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의 모습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에는 마치 감상자가 어떤 충격적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 같이 보이는데, 이에 덧붙여서 바로크 양식 미술처럼 열린 형식으로 스토리의 전개가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상상력이 더해진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고전적 제스처에 아디다스와 같은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지만, 부처의 얼굴이나 모나리자의 알듯말듯한 미소와 같이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제스처에서 전해오는 에너지는 감상자에게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기존에 발표된 작품들이 대부분 타인과의 갈등을 기반으로 하였다면 Gallery Koo에서의 개인전 <All Saints>에서는 개인적인 갈등이 보다 두드러진다. 유디트 신화에 기반을 하고 있지만 적장의 목을 베는 얼굴과 목이 베이는 얼굴은 동일인물로, 싸움은 오히려 내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스핑크스의 질문을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다른 사람을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질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얌전한 얼굴로 신발끈을 묶는 얼굴에는 살그머니 드러난 속살이 감춰진 속성을 나타낸다. 조각 작업에서도 반가 사유상 포즈를 취하는 여성의 모습이 등장하며, 조각으로 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들과 과거에 겪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추상적인 회화 작업으로 풀어낸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든 것을 해탈해 버린 위대한 모습의 초인과도 같은 입장으로, 사건과 사고를 이겨내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도서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책세상,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