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을 일년 앞둔 묵죽 대가의 득의작입니다. 이 그림은 채색 설죽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 그림에서 드문 경우입니다. 한겨울의 눈 쌓인 푸른 대나무는 추운 시기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생태를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초록 염료를 사용하여 착색 설죽을 탁월하게 그려냈습니다.
독폭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화폭이 가로로 넓어졌기 때문에 구성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8폭 중 하나로 제작되던 설죽과는 달리 왼쪽에 두 그루의 대를 더 배치하였습니다. 아울러 2개의 큼직한 바위로 두 무리의 대나무를 받치게 하였고 바위 아래의 눈 덮인 땅에는 풀 한포기를 더 그려 넣어서 여백을 채우는 동시에 오른쪽 풀과 어울리게 하였습니다. 초록의 대도 먹으로만 그릴 때처럼 농담을 달리하여 뒤의 대와 앞의 대를 구분하였고 눈 쌓인 댓잎의 표현도 이전의 어느 설죽보다도 더 자연스럽습니다. 댓잎들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원숙한 솜씨로 쳐내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생기가 흘러 달관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눈 쌓인 바위는 윤곽선만 엷은 먹선으로 긋고 바위 표면은 비워두어서 눈 덮인 바위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설죽이나 연죽과 함께 자주 그려지는 풀들의 잎도 부드럽게 휘면서 눈을 이고 있습니다. 눈 쌓인 대밭의 정경을 여유와 생기를 담아 그렸는데 평생을 대 그림에 바친 노대가가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조선 대 그림의 손꼽히는 절품(絶品)을 만들었습니다.
매월만정(梅月滿庭: 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하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지본수묵, 27.5×47.1cm
이<매월만정>은 조선중기 묵매화와 같이 올곧고 근엄하지도 않을 뿐더러 온축된 기세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빠른 붓질로 기괴하게 꺾이고 뒤틀린 가지와 툭툭 던지듯 찍어낸 몰골(沒骨)의 꽃들이 있을 뿐입니다. 대기를 암시하는 오묘한 담묵의 번짐과 이지러진 달의 모양에서 촉촉하고 흥건한 정취와 감흥이 흠씬 묻어납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강직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닮은 조선중기의 매화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묵매화에 대한 미적 지향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담하고 거친 필치로 묘사한 매화의 가지와 줄기는 조선 중기 묵매화에서 보았던 강인함이 남아있어 온아하고 평담한 의취를 중시했던 중국의 명나라 문인들이 즐겨 그리던 묵매화와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명대 오파계 문인화풍을 추구하면서도 강경하고 명징한 조선적인 미감을 절충시킨 심사정 회화의 전반적인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석죽(石竹: 돌과 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지본수묵, 30.0×44.6cm
강세황이 묵죽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강세황은 만년에 ‘노죽(露竹)’이라는 호를 즐겨 썼고, 현전하는 노년기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묵죽입니다. 그런 점에서 묵죽은 강세황의 만년기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석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통활한 공간감을 중시하는 여유로운 화면 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은 “매화와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비어있는 듯하고 시원한 느낌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할 만큼 여유롭고 상쾌한 구성을 중시했습니다. 담박하고 소략한 공간 구성은 이런 강세황의 지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윗부분이 잘린 듯한 형태의 전면의 대나무도 다소 특이하게 보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유도하며 풍부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한 몫하고 있습니다.
다소 엉성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구성과는 달리, 대나무와 바위의 필치는 유려하면서도 엄정합니다. 우아한 정취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풍의 토대 위에 조선 전통 화풍이 지니고 있는 굳센 미감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유연하지만 내적으로는 강경한 외유내강의 미감은 강세황 예술 세계의 핵심적 조형감각입니다. 이 <석죽>에서도 유감없이 잘 발휘되어 있습니다.
백매(白梅)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지본담채, 80.2×51.3cm
<백매>는 이런 김홍도 사군자 그림의 특징과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 놓고 있다. 통렬하고 강경한 기세를 담아냈던 조선 중기 묵매화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심사정이나 강세황으로 대별되는 조선후기 남종문인화풍의 고아하고 유연한 문기(文氣)와도 분명한 간극이 있다.
김홍도는 매화를 통해 강인한 기세를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으며, 고아한 품격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화에서 올곧은 선비의 절조보다는 시인의 풍류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니 가슴속의 시정과 흥취를 감각의 흐름에 따라 붓 끝에 실어 담아내면 그뿐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 어렵게 받은 그림 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 매화를 즐기며 마시는 술)을 즐겼다던 김홍도에게는 결연하고 기세등등한 매화보다는 이처럼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가 훨씬 마음에 끌렸을 것이다.
풍죽(風竹: 바람 맞은 대) 임희지(林熙之, 1765~?), 지본수묵, 108.0×53.6cm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는 역관(譯官)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항화가(閭巷畵家) 중 한명입니다. 난죽을 잘했는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임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나무는 강세황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고 난초는 강세황보다 뛰어났다” 조선후기 최고의 난죽 대가로 명성을 떨쳤던 강세황보다 임희지가 더 낫다는 평가입니다.
〈풍죽〉은 임희지의 개성이 한층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중앙하단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대는 곧 쓰러질 듯이 누워있고, 잔가지와 댓잎들은 강풍에 흩어져버릴 듯 날리고 있습니다. 이정이나 유덕장의 풍죽이 바람을 견뎌내는 강고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 〈풍죽〉은 세찬 바람의 기세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이는 과장된 묘사에서 바람은 단지 화가의 표현 욕구를 한껏 분출시키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거침없이 화흥(畵興)을 분출시키는 임희지의 작화태도는 분명 조선중기 이정의 묵죽화는 물론이거니와 바로 전대의 강세황의 묵죽화풍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당시 청대묵죽화풍의 영향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풍죽〉은 조선후기에서 말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묵죽화풍 변화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죽(晴竹: 맑은 날의 대) 신위(申緯, 1769〜1847), 지본수묵, 118.0×62.0cm
신위는 10세 무렵부터 시서화 삼절로 불릴 만큼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청년기인 정조대부터 이미 세간에 예명(藝名)이 오르내렸는데, 그중에서도 묵죽은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일컬어질 만큼 명성이 높았습니다. 신위의 초년시절 묵죽화 수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스승 강세황이었습니다. 14세의 연소한 나이에 70세의 강세황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신위는 강세황을 조선왕조 400년 동안 수묵 사생을 제대로 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하고, 죽석에 대해서만 배운 것이 한이라고 회고하고 있을 만큼 강세황을 존숭하였습니다. 이에 신위의 묵죽화에 강세황의 자취가 짙게 드리워진 작품이 적지 않은데, 예보(禮甫)라는 자(字)를 가진 인물을 위해 그려 준 묵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길고 가는 죽간을 V자 형태로 벌려 공간을 분할한 화면 구성, 피마준을 위주로 하고 몇 개의 태점으로 처리한 바위 형태 등에서 강세황 묵죽화와 유사성이 감지되며, 윤택한 필치로 엄정하게 묘사한 댓잎의 양태와 바위 묘사도 강세황 노년기 묵죽화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댓잎의 묘사는 강세황보다 더 한층 날카롭고 강인하며 기세가 충만합니다. 오히려 강세황보다는 이정, 유덕장 계열의 묵죽화풍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신위가 단지 스승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대 묵죽화풍의 장처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이처럼 신위는 조선 묵죽화의 전개에서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시도되던 남종문인화풍 묵죽화 양식의 완성도를 높였고 동시에 청대묵죽화풍을 새로이 수용하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묵죽화풍의 종언이자, 조선 말기 묵죽화풍의 선구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신위를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국향군자(國香君子: 국향이고 군자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지본수묵, 22.9×27.0cm, 《난맹첩(蘭盟帖)》
“이는 국향이고 군자이다. (此國香也, 君子也. )”
국향 즉 나라를 대표할만한 향기라는 것은 난의 별호(別號)다. 군자라는 것도 역시 난초의 별칭이다. 그런데 난초 한 포기를 화면 한 가운데 단조롭게 그려 놓고 이런 제사를 붙여 놓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난의 본질만 단순하게 표현해 놓고 나서 이것이 ‘국향이나 군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난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써 놓은 것이다. 참으로 대담한 발상의 화면 구성법이다.
중앙에서 솟아난 성긴 난초 잎새들 속에서 두 잎이 대각으로 교차하며 거침없이 좌우로 벋어나가서 화면을 압도하니 그 기백은 가히 고고한 군자의 기상과 같다 하겠다. 그 둘레에 꽃대를 솟구쳐 내고 꽃잎을 활짝 피워 내어 향기를 토해 내고 있는 꽃의 오연(傲然)한 자태는 국향의 모습 그대로이다. 제사(題辭) 뒤 끝에는 ‘정희(正喜)’라는 붉은 글씨의 작은 인장이 찍혀 있고 왼쪽 화면 끝 부분 중앙에는 ‘백정암(百鼎庵)’이라는 별호인이 찍혀 있다.
홍매(紅梅)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지본담채, 133.0×53.0cm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추사를 충실히 계승하여 난 그림에 일품의 경지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추사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벗어나는 중년 이후부터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 매화도와 묵죽화를 많이 그리게 됩니다. 감성을 절제하며 고아하고 담박한 문인적 품격을 일필로 담아내야 하는 난 그림보다는 비교적 형상성이 강한 매화나 대 그림이 상대적으로 조희룡이 중시했던 시각적인 감흥과 흥취를 구현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아래쪽에서 벋어 올라간 큰 줄기가 꺾이며 곁가지를 내고 다시 한번 꺾이며 곁가지와 방향을 나란히 하다가 또 한번 꺾어 방향을 바꾼 삼절의 기본 구도입니다. 주된 가지의 굴절로만 구성하는 단조로움을 피해 일부의 겹침과 중간 꺾임을 곁가지에서 다시 벋은 작은 꽃가지로 덮는 변화를 주었습니다. 굵고 가는 가지의 배치, 화면 중앙에 집중된 꽃무더기와 위아래의 공간적 여유, 의도된 가지 절단과 적절한 꽃의 배합 등이 고매의 은은한 품성과 분홍꽃의 자유로운 감흥을 동시에 살려 새로운 감성으로 살아난 작품입니다.
자황양국(紫黃兩菊: 보라색과 황색 두 국화) 김수철(金秀哲, 1800경~?), 지본담채, 33.0×45.0cm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은 조희룡, 허유와 더불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추사의 그림 제자 중 한명입니다. 김수철의 화풍은 경물의 대담한 생략, 간일(簡逸)한 필치, 감각적인 채색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파격적이며 이색적인 것이었습니다.
국화와 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린 이 작품도 김수철의 회화 세계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대체적인 윤곽만 윤묵(潤墨)의 매끈한 필치로 잡아낸 후, 담담하고 흥건한 붓질로 색을 올렸습니다. 조금 거친 듯하지만 활달하고 산뜻한 김수철 화훼화의 장처와 특성이 온전히 베풀어져 있습니다.
경물의 포치 또한 엉성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하여 잘 짜여져 있습니다. 만개한 노란 국화와 봉우리를 맺기 시작한 자주빛 국화를 괴석 좌우에 대비, 조화를 고려해 배치했습니다. “필의가 조금 거친 듯하나 매우 편안하다. 위치도 자못 좋다.”라고 했던 김수철에 대한 추사의 평가를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전통적으로 절개와 지조의 표상인 사군자의 일원으로 숭상되어 오던 국화를 이렇듯 탐미적인 인식과 기법으로 접근한 것은 사군자에 대한 김수철의 인식이자 조선 말기 문예의식의 다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심지란(同心之蘭: 마음을 같이 하는 난)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지본수묵, 27.3×37.8cm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이다. 대원군이라는 왕실 출신의 신분적 배경과 19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에 펼쳤던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이하응은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하응의 예술적 재능은 사군자 그림에서 탁월한 빛을 발했는데,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 그림에서 만큼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묵란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그림은 그러한 이하응의 난초 그림 가운데 30대 중반의 건실한 자기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모아 놓은 《석파묵란첩(石坡墨蘭帖)》 안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화첩이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김정희로부터 그림과 글씨를 배우던 이하응의 30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사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던 석파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화첩에 수록된 다수의 그림들이 스승 추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른편 화면을 가득 채운 훤칠한 키의 난초가 일제히 왼편으로 잎을 벋었다. 훌쩍 자란 세 줄기 잎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늘면서도 긴 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긴 난초 잎과 맑고 옅은 먹으로 표현된 짧은 난초 잎과 꽃대는 농담의 차이를 통해 화면의 깊이감을 보여준다.
향기를 뿜어내는 꽃대들 역시 잎과 함께 왼편으로 기울어 마치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듯하다. 그림에 적혀 있는 글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同心之言, 其臭如蘭.)
『주역(周易)』의 13번째 괘인 ‘천하동인(天下同人)’에 나오는 글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그처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고 한 것이다. 스승의 학문과 예술을 흠모하던 젊은 날 이하응의 기개와 의지가 엿보인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군자와 난초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풍우죽(風雨竹: 비바람 맞은 대)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지본수묵, 135.0×57cm
묵란화와 더불어 민영익의 예명(藝名)을 더욱 빛내주는 분야가 있습니다. 묵죽화입니다. 묵란화에서 쌓은 명성에 비해서는 다소 뒤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묵죽화에서도 민영익의 예술적인 재능은 여전히 빛났습니다. 민영익이 묵죽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상해에 망명한 30대중반부터인 듯합니다.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처지로 이국에서 여생을 보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와 심회를 묵죽화로 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군자 중에서도 불변의 기개와 절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소재인 대나무의 의미와 상징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망명전 조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집이 죽동(竹洞)에 있었으니,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묵죽화를 통해 풀어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면 중단에 바위를 배치하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그려 넣은 전형적인 죽석도 형식입니다. 바위는 갈필과 윤필, 담묵과 농묵을 적절히 섞어가며 입체감과 질량감을 살렸습니다. 그 상하로 줄기 몇 개를 담묵으로 그려 넣고, 짙은 먹으로 댓잎을 베풀어 놓았습니다. 댓잎의 필세가 워낙 강렬해 바위나 대줄기는 부수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묵죽화 특유의 꼿꼿함이나 장쾌함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댓잎만으로도 강한 호소력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댓잎은 한결 같이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립니다. 굳센 기세로 보건대, 시든 모습은 아닙니다. 비바람에 쓸린 풍우죽(風雨竹)입니다. 군자의 기백은 살아있으나, 모진 세파를 만나 시달리는 대나무의 모습을 통해 이국땅에서 망명객으로 살아가야하는 회한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묵죽(墨竹) 김진우(金振宇, 1883~1950), 지본수묵, 137.3×50.5cm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는 12세 어린나이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문하에 들어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였으며 묵죽으로 항일의지를 표출한 당대 최고의 묵죽화가였습니다. 김진우는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국내로 들어오던 중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묵죽에 전념하여 서화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드높였고 이런 항일정신은 많은 민족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김진우의 묵죽은 일세를 울렸습니다. 이 그림은 김진우가 51세(1933년) 가을에 친 쌍폭의 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진우 묵죽은 대 마디 사이의 줄기는 자로 잰듯 반듯하고 성글은 댓잎 덕분에 전체 대 줄기가 한 눈에 잡혀 막힘이 없습니다. 대는 화면 가운데 밑에서부터 올라와 휘지 않고 곧게 끝까지 갑니다. 댓잎은 칼같이 날카롭고 대줄기는 창처럼 곧아 바람이 불면 쨍하고 울릴 것 같은데 이런 냉기 탱천함이 김진우 묵죽의 참된 모습입니다. 진정 묵죽으로 항일한 김진우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