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 2015-11-03
김희재
02.736.1020
풍경을 통해 나의 마음을 읽는다.
최태만/미술평론가
거의 칠 년 만에 김희재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최근에 제작한 작품을 펼쳐놓던 그는 그 중 한 점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작품이 가진 미묘한 색조를 구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고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디지털카메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갈색의 색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촬영을 하든, 인쇄를 하든 그것을 재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작가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을 독창적인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덧붙여 이 작가는 나를 만나자마자 큰 눈이 더 두드러지도록 동그랗게 뜨며 사흘 밤낮을,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 쉬지 않고 작업했더니 이명(耳鳴)과 함께 머릿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하지정맥이 와서 고생했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그 독특한 기법으로 말미암아 캔버스를 세워놓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뉘어놓은 캔버스 앞에 쪼그려 앉아 엷게 바른 바탕 위에 풍경을 표현하고 이미 그려놓은 부분의 물감이 건조되기 전에 전경의 들풀이나 꽃들을 그리거나 나이프를 이용해 디테일을 묘사해야 한다. 특히 나이프로 꽃잎 하나하나를 조각하듯 그 형태를 재현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는 거의 삼십 년 이상의 오랜 기간 이 방법으로 꽃이나 들풀을 그려왔기 때문에 이미 기술적 숙련이 고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작업에 착수하면 중도에 멈출 수 없는 속성상 다리의 혈액이 순환되지 않아 겪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작업에 전념했던 것이다.
이마고(imago), 마음이 재생한 풍경
내가 김희재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991년이었다. 인연이 닿아 세 편의 글도 썼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기 위해 드문드문 그의 작업실을 찾았고 그때마다 그는 특유의 ‘과도한 정열’과 ‘도도한 자신감’으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작업을 지배하는 것은 갈색의 ‘쓸쓸한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이 작가는 쓸쓸한 색조의 포로가 되어 그 적막한 우수 속에 스스로 유폐시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는 오랫동안 ‘기억 속으로’를 작품의 제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제목 그 자체만 주목한다면 과거의 기억으로 퇴행하거나 혹은 그것에 고착해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제목과 함께 그의 작품은 그와 대화할 때 발견할 수 있는 활달한 열정과 대척지점에 있다. 이 대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지닌 갈색의 중간색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들풀이나 야생화와 함께 엉겅퀴, 장미, 유도화, 치자꽃 등의 식물은 한결같이 빛바랜 색으로 물들어있다. 하지만 그 형상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거의 드라이플라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인 것이다. 가을에 피는 소국(小菊)을 제외하면 장미는 당연히 오월에 화려하게 만개하고, 녹색 이파리 속에서 하얗게 피었다 노랗게 지는 치자꽃도 칠월에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런데 김희재의 작품 속에서 이 꽃들은 늦가을의 풍경 속에 마치 박제된 듯 피어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작품이 실제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상(image)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풍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린 풍경은 대부분 여행지에서 본 자연을 포착한 것이지만 특정지역을 지시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기억으로 재생한 이미지로서의 풍경인 것이다. 이미지는 이마고(imago)란 라틴어를 어원으로 나타난 단어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모든 대상은 이마고이며, 그 속에는 그의 경험과 기억뿐만 아니라 그의 염원, 열망, 비탄과 체념이 녹아있다. 물론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주장한 것이지만 이미지의 철자 순서를 바꾸면 주술사나 마법사를 의미하는 마기(magie)가 된다. 이렇듯 유채화의 일반적인 특징인 덧칠하기, 겹쳐 그리기에 의한 마티에르를 철저하게 배제한 얇은 표면 위에 그려진 창백한 이미지는 김희재가 우리에게 걸어놓은 마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 정조보다 깊은 생명에의 외경
김희재의 작품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나 가혹한 시간의 법칙에 의해 탈색, 건조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어에서 정물을 의미하는 죽은 자연(nature morte)을 연상시킨다. 소담하게 핀 꽃도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이고, 밝게 빛나는 촛불도 곧 사그라진다. 이러한 정물은 ‘인생도 이러할지니 죽음이 항상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memento-mori)’란 경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김희재의 풍경은 죽은 자연으로서의 정물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 쓸쓸하고 자기관조적인 작품 속에 유달리 돋보이는 엉겅퀴 꽃이나 다른 것보다 웃자란 들풀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모습인 마냥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을 연상시키는 쓸쓸한 풍경 속에서 피어난 이 식물은 그러므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고백하지만 언제나 주인공(protagonist)으로 남고 싶어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주인공으로서 일면 창백하고 우수로 가득 차있을 뿐만 아니라 비관적으로 보이기조차 한 화면을 비극의 독백으로 채우지 않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가 걸어놓은 마술 속으로 유인하다.
우리의 시선을 원경의 풍경으로부터 근경의 정물로 옮기면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할 수 있다. 이 정물들은 뒤러(Albrecht Dürer)의 작품 중에서 들판에 자생하는 풀을 사생한 수채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뒤러의 수채화는 르네상스시대 북유럽 화가로서 자연에 대한 치밀한 관찰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과학적 관심의 결과임에 분명하다. 조선의 진경산수를 발전시킨 겸재(謙齋) 정선(鄭敾) 또한 화조(花鳥)와 초충(草蟲) 등의 자연세계를 훌륭하게 묘사한 그림을 남겼는데 화면구성 못지않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김희재의 정물도 대상의 형상을 실재에 부응하도록 재현하고 있으나 군락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을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고유색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에 재현하되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재현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것의 형태를 딴 작가 자신의 마음이고 그 속에 새겨진 이미지이다. 이 들풀들은 대지의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생육상태가 가장 좋을 때처럼 꼿꼿하게 서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나이프로 예리하게 깎아놓은 듯한 잎사귀가 마치 사군자 중에서도 묵죽(墨竹)의 대나무 이파리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그런데 이 풀들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고 나부끼는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나부끼는 풀들의 외침이 김수영의 시 <풀>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물론 일반적으로 김수영의 풀은 압제(바람)에도 스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민중(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김희재의 작품 속에서 풀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단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관류하는 시간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산들바람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거센 폭풍에 시달리면서도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그러나 왜 고즈넉한 가을의 풍경일까. 화면의 정조로 볼 때도 일조량이 풍부한 낮이라기보다 바야흐로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처럼 느껴지고 흑백으로 표현한 작품의 경우에는 야간에 조명으로 비춘 자연의 한 국면을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그가 프로타고니스트로서 화면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자기성찰에 충실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언젠가 나는 ‘따뜻한 비관에의 자기동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관적 정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 그 속에 생명에의 외경(畏敬)이 깊이 각인돼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들풀이나 들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생으로 향한 의지의 결과이다. 그것은 그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호흡하는 시선
며칠 동안 불안정한 자세로 작업에 집중한 탓에 격심한 신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는 이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디로부터 이러한 편안함이 오는 것일까. 최근 그의 작업은 풍부한 물기를 머금은 듯 습윤하다. 호수나 강은 물론 운무가 자욱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갈색조가 건조하기보다 윤택한 느낌을 더 자아내고 있을 것이다. 농담이 풍부한 풍경은 수묵산수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강물 위를 비추는 빛의 띠와 육중한 바위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 그 뒤로 겹쳐지며 아득하게 펼쳐지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산과 하늘은 한적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그것은 에덴동산이나 무릉도원이 아니라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마음의 풍경이다. 절망, 고통, 환희의 시간 뒤에 마주하는 마음의 안정이 만들어낸 풍경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전경의 밀집한 정물이 화면을 차지하고 있으나 무언가 주장하기보다 후경은 개방적인 공간과 조응하며 우리의 시선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사각의 프레임 속에서 순환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선이 그의 작품 속에서 들숨과 날숨처럼 호흡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언제나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을 토로하면서도 심리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해 왔듯이 최근 작업 역시 그 경물들을 통해 사색의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김희재 약력
중앙대학교 회화과 졸업
프랑스 파리 Ecole des Beaux-Arts 수학
2003-2004 COIRS ADULTES POUR
개인전 18회
(인사아트센터 기회 초대전- 재회, 조선화랑, 선화랑, 표화랑,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인사아트센터, 광주 무등현대미술관, NEW YORK ART EXPO 미국 라이얼스 갤러리 Gallery des l' international interculture - 프랑스 등)
2011 인사아트 기획초대전-재회전
2009 시카고 아트페어
국제 인천여성비엔날레
한.중 교류 17주년 기념전(중국 북경 상상미술관)
2008 부산비엔날레
2006 한국국제아트페어
2005 한국국제아트페어(조선화랑, 코엑스)
2004 화랑미술제(조선화랑, 예술의 전당)
2003 제12회 청담미술제(조선화랑)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조선화랑, 코엑스)
2002 찾아가는 미술관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화랑미술제(조선화랑, 예술의 전당)
가일미술관 개관 기념 초대전
환경조형 300호전(조선화랑, 코엑스 인도양홀)
2001 마이아미 라이얼스 갤러리, 워크숍 및 초대 개인전
2000 NEW YORK ART EXPO, 초대 개인전
1998 제6회 월간 미술세계 초대 개인전
(예술의 전당-한가람 미술관)
명동화랑 개관 기념 초대전
1992 인도 국립미술관 구상작가 초대전(인도, 뉴델리)
1989 그랑펠레 비엔날레 89(프랑스, 파리)
구상전 초대전(선화랑)
1986 일본 문화원 초대전(일본, 동경)
KCAF展 - 한가람미술관
주소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04-9 김희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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