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선생은 생전에 제대로 된 작업실 한 칸 없이 그림을 그렸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선 박수근,
선생의 한과 열정적인 예술혼을 기리게 위해!
선생의 예술세계를 이어가는 열정적이고 역량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여기, 박수근선생의 미술관에서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한지 마침내 10년이 되었다.
10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입주기간(2014.7~2015.2)동안의 작업 결과물을 전시하게 된 김형곤, 김세중은 국내․외를 무대로 20년 이상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뚜렷한 작품세계관이 정립된 역량있는 작가들이다. 그들은 촉망받는 신진작가도 아니고 인정받은 중견작가도 아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으며, 열정과 성실함으로 무장하여 묵묵히 화업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 시절의 박수근과 같은 작가들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김형곤, 김세중 작가가 대한민국 미술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그들의 작품세계를 보다 많은 대중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 기 간 : 2016.1.29. 금 ~ 4.24. 일
◯ 개 막 식 : 2016.1.29. 16:00
◯ 장 소 : 박수근미술관 제 2 전시실 (현대미술관)
◯ 참여작가 : 김형곤(서양화), 김세중(서양화)
◯ 평 론 : 김미상(예술사학자), 박신의(미술평론가)
◯ 내 용 : 서양화 총 50점
김형곤. Hyeonggon Kim. 1970~. 강원도 양구출생
소박 素朴 Naive ; 양구와 박수근선생으로부터의 잔상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떠난 양구를 마흔이 넘어 다시 들었다. 눈에 들어오는 자연에 초연해졌었고,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상에서 깊은 울림이 들렸다. 박수근 선생의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의 그 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생의 전반기를 이곳
양구에서 살았던 선생에게 체화된 소박성이 작품으로 구현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꾸밈이 없고 순수한 자연 그대로’를 「소박」이라 정의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으며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박수근 선생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싶었다.
일년 반,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을 양구에 머물렀다.
일상의 풍경과 기억에 대한 잔상을 그리는 일에 익숙한 나는, 청아한 <양구의 풍경과
빛이 좋은 자연에서 자라는 <사과>와 <살구>를 그리면서 자연스레 이곳의 소박한
정서에 동화되어 갔다. 그러한 친근한 정서는 미술관과 인연을 맺고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들 중 몇몇은 이 나라의 안녕과 평화,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일에 삶을 헌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념과 의지, 그동안의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현재의 초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감과
존경의 마음을 더하여..
얼마 전, 독일 수트투가르트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의 이름을 붙인 ‘난(蘭)’이 생겼단다. 아마도 생명력이 강하고 꼿꼿한 기개와 정신을 기리고자 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국에서 <흰색 호접란>을 키우며 느꼈던 부드러움과 강인함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나의 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강원도 양구 박수근선생의 미술관에 머무는 동안 선생의 탄생 100주년과 작고 50주기를 지냈다. 한편, 나라에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났다. 그림 그리는
일이 전부인 나는 아득하고 먹먹한 기억에 ‘숭고’와 ‘위로’의 마음을 담은 <흰장미>를 그려 바칠 뿐이다.
2016년 1월
김 형 곤
작가 김형곤 작업에 드리운 빛에 담긴 지각으로서의 색과 형에 대한 소론
빛, 색을 짓고 형을 만들다
홍경한(미술평론가)
스푸마토(sfumato)와 테네브리즘(Tenebrism)은 르네상스 이후 회화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암법(키아로스쿠로 : chiaroscuro,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이 중 ‘연기와 같은’을 가리키는 ‘스푸마토’는 이탈리아어 ‘스푸마레(sfumare)’를 어원으로, 회화에 있어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그려 흡사 먹물 스며들 듯 어떤 대상이 배경에 포박되도록 하는 대기원근법이다. 미술사상 보기 드문 천재로 일컫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도입되었다.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테네브라(tenebra)를 어원으로 한 ‘테네브리즘’은 빛을 읽는 방식이자 연출방식을 회화에 적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은 화파인 ‘테네브로시(tenebrosi)’를 지정하는 용어이기도 한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카라치파의 정신을 잇는 귀도레니를 비롯해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벨라스케스, 피터 폴 루벤스 등이 이 화파의 작가들로 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격렬한 명암대조에 의한 극적인 표현이 특색이다.(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 하에 두며, 보다 가깝게는 베르메르와 신고전주의자들인 다비드, 앵그르, 부게로까지 연관성을 지닌다.)
기실 이 두 가지 명암법은 서양회화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차이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전 중세시대의 경직되고 건조한 회화 표현방식을 진일보토록 했으며,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가장 효과적으로 재현 및 이입시킬 수 있는 최적의 기법으로 평가받았다. 그야말로 새로운 회화세계를 개척한 혁명적인 방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작가 김형곤의 작업엔 위와 같은 두 가지 기법이 절묘하게 녹아 있다. 배경과 사물의 경계 없는 조화, 빛과 어둠을 기반으로 한 음영의 운율 및 사실적인 처리는 오랜 시간 학습된 철저한 회화적 가능성이 특유의 리얼한 언어들과 조우한 채 분포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실제로도 그의 누드 인물 시리즈를 비롯한 풍경화, 정물화를 보면 매우 꼼꼼하고 모범적이며 엄정한 화풍이 균질하게 나열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깊은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사물(형상), 상하좌우 대칭 아래 정돈된 질서, 광선의 강약에 따른 극명한 효과, 빛과 색의 진폭에 의한 감정의 유동 등이 바로 위 두 기법에 의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김형곤 작업의 특징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형곤의 그림에선 고풍스럽거나 혹은 클레식한 분위기가 남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탁월한 ‘빛’의 운용성 탓이 크다. 빛이 쪼개져 색을 낳고 그 색이 균형을 유지하여 에너지를 갖는 형국이다. 색상, 명도, 채도 아래 구현되는 입체감, 규범적인 리얼리즘이 지닌 시지각적 한계성의 배제, 감각을 담보하는 매력적인 결과물로 치환될 수 있는 것도 결국 빛의 영향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색과 형에 대한 지각은 빛에 의해 생성되고, 빛이 없으면 색도 명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의 빼어난 소묘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은 예술적 묘사의 고고학적 정확성과 합리주의적 미학의 소환을 불러온다. 특히 규율의 미학이 엄격한 질서미는 시각적 인식력을 충만하게 창조할 뿐만 아니라, 망막에 대한 항거를 유보시킨 우리네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지평으로까지 나아가도록 만든다.
- 중략 -
김형곤은 인물을 그리든 자연을 배어내든, 그에게 있어 그림은 삶의 목적이자 방식이다. 어쩌면 자연과의 호흡이요, 내계와 외계, 표상과 실제, 내외 혼연일체의 투영이다. 이는 곧 삶이라는 여로의 단락이자 운율(韻律)이며 삶의 고저에 의한 정신의 분출이다. 하지만 김형곤의 작업이 가리키는 또 다른 지점은 인간과 세계(자연)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실재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 표현 세계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립해 나가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우린 그의 그림에서 고집스러움과 변화에 대한 걸음이 동시에 교차하는 것을, 또한 그 속에서 현재가 아닌 내일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해 존재형식에 대한 내적 문제를 언급하며, 예술 활동으로 존재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가고, 자기 발전적인 가능성을 선택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실존(김형곤의 작품은 화문(畵問)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 관물(觀物)과 관아(觀我)로의 요약을 가리킨다. 관물이란 인간의 존재 의의를 알아내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며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 멀리 바라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만물을 통해 그 도리를 알게 됨으로써 자연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는 것으로 은연 중 그의 작품에 속속 들어선 개념이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들에서 더욱 돋보이는 건 관아다. 관아란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것이다. 관물을 통해 자연의 이치 속에서 진리를 얻고 도리를 알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김형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사상이 어떠한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은 항상 세계내존재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할 때 김형곤의 예술은 결국 표피적인 이미지, 드러난 이미지, 눈에 맺힌 이미지와는 달리 그 내부엔 현존재(Dasein)라 불리는 인간의 본질을 말하고, 나로부터 시작된 존재성에 대해 탐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 활동을 하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 연장과 다름 아니다. 그 스스로 표현했듯 “생의 원천인 자연을 모태(母胎)로,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에 접근하고, 여기서 자연은 그저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에너지”와 같은 셈이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신성을 공유함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상실(loss of self identity)하게 됨을 드러낸다. 이러니 외현의 세계에 집중한 듯 보이는 그림에서 외현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읽는 건 쉽지 않으나 유의미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김세중. KIM, SE-JOONG. 1977~. 경기도 안성 출생
영원(Eternity), 그 경이로움에 대한 사색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화가의 시각적 경험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 화가는 예리한 눈길로 세상의 면면(面面)을 발견하고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재현한다. 화가는 자신의 눈이 관찰하고 손이 그리는 순간에도 세계를 발견하는 일을 놓지 않는다. 때때로 화가는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경이로운 차원을 포착해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화가의 모습은 예술의 시작에서부터 존재했던 모방론이 대상의 외형뿐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이데아(idea)의 재현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김세중은 화가이다. 그의 작품들이 주는 첫 인상은 성실한 재현을 고집하는 고전적 회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반전으로 이어진다. 김세중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사물이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즉 보이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회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가 바로 김세중의 회화이다.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팽팽한 긴장 상태와 공존은 그의 작업이 가진 탁월한 매력 중 하나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세계의 단편들을 극도로 정밀하게 보여줌으로써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이고 선험(先驗)적인 세계까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내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김세중의 회화는 극사실(hyperreal)과 초현실(surreal)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극사실주의 회화와 구별되며 무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초현실주의와 차별성을 갖는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처럼 보이는 김세중의 회화에서 일상의 물건들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부여받는다. 마법의 나라와 같은 김세중의 회화 세계는 상상력이나 내적 무의식의 고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본질적 진리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김세중은 현실을 왜곡하고 과장시키거나 미스터리(mystery)를 재현하여 초자연적인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세계의 본질이 우리의 망막적 현실 뒤에 숨어 있다고 믿기에 세계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김세중의 회화적 대상들은 단순한 객관적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평범할 수 있는 사물들은 의미와 상징을 부여받고 인간에게 부과된 숙명과도 같은 철학적 숙제들을 가시화한다. 그것은 작가의 특별한 의식에 의해 나타나는 경이로운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부유하는 조약돌과 장미,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그리스 조각들과 공예품, 미세하게 원근법이 느껴지는 무한한 하늘에 떠 있는 달(月)이 현실적이면서도 몽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이다.
<영원으로의 비상>(2008) 시리즈에서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골동품 시계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작가적 물음은 시간에 대한 탐구로 집중된다. 작가는 시간이야말로 세계의 궁극적 본질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원(永遠)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진다. 김세중에게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탄생되어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 스스로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이번에 전시되는 <영원을 꿈꾸다> 시리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김세중의 회화 공간이 순간이 정지한 상태, 신비로운 무중력 상태로 보이는 것 역시 모든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작가의 생각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irony)하게도 시간 그 자체가 영원한 것과 달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이에 인간은 영원성을 붙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과학과 의학, 철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문명의 결과물들은 영원에 대한 갈망의 결과물이다. 김세중은 시간의 영원성과 그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자신을 대표하는 몇 개의 상징물들을 창조했다. 김세중의 회화에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종이비행기와 종이배, 조약돌, 나비, 꽃, 새는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으로 작가를 이동시켜주는 운송 수단이자 작가의 대체물이며 끝도 없이 흘러가는 영원히 순환하는 시간을 은유한다.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할 정도로 김세중이 애착을 갖는 소재인 조약돌은 작가가 백령도를 여행하던 중에 발견한, 작은 조약돌이 모래사장처럼 깔려 있는 한 해안가에서 연유했다. 끝없는 바다와 하늘, 무한 반복되는 파도에 의해 조약돌끼리 부딪히면서 나는 고요한 마찰음에서 작가는 영원을 체험했다. 그리고 서로 부딪히면서 동그래지고 작아지는 조약돌에서 시간의 순환과 그 순환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후 그의 모든 작업에 등장하는 조약돌들은 작가의 대체물이 되었다. 조약돌이 순환하는 시간에 대한 상징이라는 사실은 –조약돌을 그린-<영원을 꿈꾸다>(2012)와 <돌멩이의 꿈>(2012)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조약돌들은 커다란 원형을 이루고 있어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하는 시간을 상징한다. 원형은 재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영원에 대한 상징이다. 그 스스로 완결된 영속(永續)인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이다. 과거는 현재였으며, 현재는 곧 과거로 전환되며, 미래는 도래할 현재가 되어 영원성 그 자체만 남게 된다. 또한 시간에 순환이라는 개념이 결합되면 유한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존재 역시 -그것의 가시적인 형태가 바뀌는 것일 뿐-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한 화폭에 동시에 등장하는 꽃과 나비와 새, 조약돌, 그리고 하늘을 가득 채운 커다란 달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모습을 바꾸어가며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경이로운 영원은 세계의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영원은 다양한 존재들에게서 현현되고 각각의 존재는 자신 안에 지고(至高)한 영원을 품는다.
그러나 김세중에게 영원은 순환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세중의 ‘영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순환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원함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순환적 시간을 초월한 무시간적이고 필연적인 영원성이다. 그것은 모든 시간적 관계가 배재되는 절대적 영원이며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는 생성과 소멸과는 거리가 먼 영원이다. 이러한 절대적 영원을 담기 위해 김세중이 선택한 것은 그리스 조각상과 바이올린(violin)이다. 김세중의 회화에서 고전적(classic) 조각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예술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성을 획득한 대상들이다. 그것은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과 철학과 윤리를 초월한 가치를 보유한다. 예술은 불멸이 아니라 영원으로서 존재한다.
절대적 영원에 대한 상징은 점차 예술에서 하늘과 바다로 발전된다. 우리 삶의 공간 중 최고의 무한함을 보여주는 것은 하늘과 바다이다. 작가에게 하늘과 바다는 그림의 배경으로서의 공간이 아니다. 하늘은 작가와 분리되지 않는다. 바다는 작가를 영원 속으로 침투시킨다. 이제 작가는 하늘과 바다를 보며 자신의 이상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영원에 대한 작가의 형이상학적 사색과 감정적 울림, 동경의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는 무한을 창조한다.
김세중은 자신이 찾아낸 영원을 체득하기 위해 세계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소통을 위해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극한의 묘사 과정을 거치는 김세중의 회화에서 사진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는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김세중은 영원을 붙잡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촬영에 매달린다. 사진은 한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하늘, 달, 바다, 구름, 조약돌과 같은 자연 속 미물, 고고학적인 유적, 골동품 가게의 공예품들, 악기상의 바이올린에 이르기까지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모두 작가 본인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교감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사색의 대상이 정해지면 작가는 매일 12시간씩 작업실에서 홀로 그림을 그린다. 그는 3미터(m)에 달하는 대작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완성한다. 만약 그 과정을 붓질이 반복되는 육체적인 노동으로만 생각한다면 결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김세중에게 그리는 행위는 작가가 영원을 받아들이고 세계에 침투하는 통로이다. 붓을 든 몸과 사색하는 정신이 하나로 일치되는 작업의 시간은 경이로운 시간으로 승화된다.
영원을 사색하던 김세중은 최근 들어 균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순환을 통한 영원과 절대적 영원이 양극점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듯이 대치되는 존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간성을 내포하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에 영원성과는 상극인 변화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영원은 생성의 다른 이름이며 새로운 차이를 생성시키는 전체적 시간이다. 이처럼 두 극(極)으로 대립되는 존재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는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며 종국에는 하나로 이어진다. 이제 김세중은 일상과 비일상, 유한과 무한, 하늘과 땅, 중력과 무중력처럼 서로 양극적 성격을 갖는 존재들이 공존하면서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세계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작가를 자연스럽게 자연과 문명에 대한 사색으로 이끌었다. 자연과 문명은 서로 반대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문명은 자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문명은 자연과 유리되기 시작했고 세계의 본질로부터 멀어졌다. 이런 이유로 김세중은 마치 하이네(Wilhelm Muller Heine)가 자연과 인간,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Orpheus)에 주목했듯이 서로 다른 존재들이 팽팽한 긴장과 조화를 통해 서로 균형을 맞춰가는 완전체로서의 세계를 꿈꾼다. 작가는 마치 오르페우스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 삼라만상이 귀 기울이고 감동했듯이 자신의 회화가 그러한 총체적 울림을 퍼뜨리길 바란다. 세상에 대한 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 김세중의 회화는 자연, 역사, 신화, 예술, 그리고 신성과 같은 경이로움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는 종합으로 진화한다.
존재의 창조적 표현인 회화는 존재의 재탄생이 끝없이 일어나는 장이며 나와 세계, 나와 우주가 만나는 장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김세중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세상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계속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세계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갖고 말없는 사유(mute thought)에 참여하도록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