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들, 또는사랑의 울림 - 선명주의 회화에 대하여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이미지의 최소 단위는 픽셀이다. 색의 미세한 차이들은 이진법 체계인 0과 1의 조합에 의해 표시된다. 두 가지 숫자기호만이 쓰이지만 그 변환은무한대이다. 각각의 색들에게 부여되는 고유의 숫자는 두 가지 숫자만의 이진법적인 교차배치에 의해 엇비슷한것 같으면서도 다 다르다. 이 숫자의 차이는 색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같다. 컴퓨터 모니터에 표시되거나 프린트되는 화면의 이미지들은 모두 이러한 고유 숫자기호가 할당된 색점들의 단위인픽셀의 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점들은 가로 세로가 일정한 배열을 이루는 질서의 망 속에 놓여있다. 이러한 화면에서 선 또는 면이나 입체로 나타나는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점의 알갱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시각효과를지각하는 일이다. 아무리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그림을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점들의집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그러한 점의 기본단위가 개별적으로 구분되어 드러나 보이는 것은아니지만, 그림들을 확대할 수록 이러한 픽셀 단위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경우를 우리가 종종 이미지가 '깨진다'라고 표현하듯이, 이러한 사실은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이미지에대한 지각 작용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시선과 인식의 방법, 그리고 심리적인 태도에도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테면그것은 세계에 대한 파편화된 인식을 좀더 부추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픽셀들이 점점 작아지고 단위면적당 보다 많은 점들이 촘촘히 들어선다면 이러한 현상도 점차 사라지겠지만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색의 알갱이들은 여전히 저변에서 대상의색채와 형태를 지탱해준다.
대상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이러한 방법은 이미 색 점들의병치에 의해 대비색을 표현한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 이래로, 역사적으로 여러 화가들에의해 다양하게 시도된 것이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지금은 이미지가 거의 기계적으로 디지털의 격자망을통해 걸러지는 셈이다. 그러나 사진보다 더 정교한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던 척 클로즈가 후반기의 작업에서, 대상의 표피를 구성하는 셀 단위 자체에 변이를 가하여 전체적으로 전혀 다른 표현 효과를 얻어낸 것처럼, 점으로서의 기본 조형 단위는 때로 예기치 않은 가능성의 차원으로 수용되기도 한다.
선명주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녀는 하나 하나의 픽셀마다 일견 형태는 동일한 듯 하지만 마치 각각의 점-단위가세계에서 유일한 우주인 것처럼 전혀 다른 고유의 표정을 가진 단위들을 그려낸다. 따라서 전체를 이루는점 단위cell의 성격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림 전체를 이루게 되고 급기야 그림의 본바탕과 성격까지도결정짓는다. 그 점-단자를 이루는 각각의 픽셀들은 서로에대한 반향을 통해 전체에 또 다른 울림을 낳는다. 그것은 이른바 나비효과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시작단계의 색 점들은 주변의 색 점들에게 조금씩 영향을 끼쳐서 점점 더 예기치 않은 미묘하고 변화무쌍한 효과를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작과 결과에 의해 파생되는 그림이 이루는 전체에서, 최초의 각각의 단위들은 공명효과를 일으키는 씨앗의 역할을 한다. 그씨앗은 하나하나가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작가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가족 나들이에서보았던 계곡의 웅덩이에서 살아서 오물거리던 개구리 알처럼 말이다. 작가 선명주의 말에 의하면 그 개구리알은 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추억과 함께 한다. 사랑은 생명의 출발점이다. 작가가 보았던 그 개구리 알에는 요컨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것은 그녀에게 생명에대한 소중한 느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추억의 따스한 온기는 성인이 된 작가의 작품에 각각의 색점의 형태로 전이되고 그 색 점들에 담긴 온기는 작품전체에 파급되어 살아있는 '추상의' 이미지를 태동시킨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유명한 단자론 에서 '모든 사물은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힘인 활력의 점이 작용하고 있기에 현실화한다. 이 활력의 점이 단자(모나드)이다. 모든 단자는 살아있다. 따라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다.'라고 했다. 선명주의 그림에서 각각의 단위 픽셀들은 이와같은 활력의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다른 모든 점들에 상호 공명이 되어 그 하나하나를살려내고 결국은 하나의 전체라는 놀라운 생명체를 구성해낸다. 그림이 살아있다라는 말은 대개 비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의 회화는 정말로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무수한 작은 점들이 서로간에 충돌하여 일정한 규칙에 의해 또 다른 살아있는 질서를 낳기 때문이다. 작은나비의 날갯짓이 유발하는 미세한 바람이 먼 바다를 건너서 전혀 다른 곳에서 태풍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나비효과의핵심은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에 따르면 세계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살아있는점들은 모두 언젠가는 태풍을 낳게 될 씨앗으로서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명주는 캔버스에올린 겹겹의 물감의 층을 조각도로 하나하나 파내어 각 층에 잠재되어 있는 색깔의 씨앗을 발굴해내기도 하고, 격자망을따라 한 땀 한 땀 두텁게 물감을 쌓아 올려 하나하나의 색 점을 구축하기도 한다. 씨앗은 인근의 홈이나점들과 이어지며 전혀 예기치 않은 색들의 띠로 단속적으로 연결되고 이로써 결과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규칙과 흐름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전체로서의 그림은 작가의 인고의 시간이 투영된 살아있는 한 생명체의 울림일것이다.
글: 서 길헌 (조형예술학박사)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