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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 : SUB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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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도스 기획

허유 ‘SUBSTANCE’

2016. 5. 4 () ~ 2016. 5. 10 ()


임계 臨界, 비단에 채색, 87×79cm, 2014

1. 전시개요

 

전 시 : 갤러리 도스 기획_허유‘SUBSTANCE’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37 Gallery DOS (갤러리 도스)

 

전시기간: 2016. 5. 4 () ~ 2016. 5. 10 ()

 

 

 

2. 전시내용

 

이미지의 교집합

백상현[작가, 정신분석학자]

이미지의 교집합

정신분석가를 일주일에 두 번씩 찾아오는 어느 젊은 여성 환자가 있었다. 이 여성은 우울증과 불안증세 등등을 보였고, 자신의 인생이 공허하며, 점점 더 수렁과 같은 곳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분석가는 여성에게 다양한 심리치료를 시도했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비로소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더이상 치료를 받지 않아도 좋을 만큼 호전된 것처럼 보였던 여성의 우울증이 재발한 것은 기이한 사건 때문이었다. 여자의 집에는 여러 점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화가였던 어느 친척의 그림들이 보관되는 방이었다. 어느 날 여자의 친척은 벽에 걸린 그림 중 하나를 팔게 되고, 벽에는 자연스레 빈자리가 남겨진다. 한동안 진정기에 접어들었던 여자의 우울증이 재발한 것은 바로 그날부터였다. 흥미로운 것은 여자의 반응이다. 그림이 사라진 빈 벽의 공허를 견딜 수 없었던 여성은 고군분투 끝에 친척이 팔아버린 것과 흡사한 그림 한 점을 스스로 완성하여 벽의 빈공간을 채웠고, 이후로 우울증 발작이 진정됐기 때문이다. 멜라니 클라인의 논문에 등장하는 이 여성 환자의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문명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은유들이다. 회화란, 조형예술이란, 혹은 예술 일반이란 공허의 텅 빈 이미지를 메우기 위해 시도되는 심리적 반응이라는 사실에 대한 은유 말이다. 라깡의 임상이론이 말하는바 역시 동일하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란 우리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근원적 불안에 방어하는 성벽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화가들은 바로 그러한 방어적 행위의 가장 근본적인 실천에 속하는 자들이다. 화가들이 마주한 흰 도화지, 텅 빈 벽면의 공허는 화가를 위협하는 파괴적 힘을 가진다. 신경증의 방어적 욕망 속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은 바로 이 공허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며, 그것 위에 색과 형상을 덮어씌운다. 앞서 제시된 사례의 여성 우울증 환자가 그랬던 것처럼, 화가들은 죽음과 같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면의 텅 빈 공간 저 너머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 실체인 그것의 실존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환상의 이미지들을 불러와 미의 향연을 펼친다. 미술의 역사란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의 '겹침'의 역사이며, 미시적 차원에서 화가의 행위 또한 이미지들 위에 다른 이미지들을 끝없이 겹쳐내는 방어적 행위의 작은 역사들이다. 그렇게 겹쳐진 이미지들의 집합들이 산출해 내는 것은 겹침의 겹침, 즉 겹침들의 교집합이다. 전통적 사유이며, 신학적 사유인 고전주의는 이러한 교집합 내부에 실체를, 즉 이데아를, 존재인 그것을 가정한다. 단지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the Nothing)가 아닌 존재가, 죽음충동이 아닌 쾌락이, 실존함을 증명하려 한다.

이미지 이미지 = 존재

허유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함수 역시 '겹침'이다. 그것은 단지 기능적인 차원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색면을 겹침으로써 산출되는 무언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겹침 자체의 철학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겹치면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는 관객이 결정할 몫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허유가 겹침의 철학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나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겹쳐짐의 과정 뒤에 도달하게 되는 장소가 비확정성의 장소이며, 결정불가능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검은색도, 흰색도, 혹은 어느 특정한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는 색의 초과점, 이미지의 비-이미지이다.

이미지 이미지 =

허유 자신의 표현대로 그것은 '오묘한' 이미지이며 '미지'의 이미지이다. 달리 말하면, 겹침을 통해 산출된 작품의 이미지는 이승의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승의 이미지, 현실원칙의 질서가 지배하며, 지배적 패러다임의 선명한 권력이 통제하는 장소의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토피아적 저승 이미지도 아니다. 현실질서의 조건으로부터 상상된 미래의 아름다움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미지이며, 흘러내리는 불안정성의 이미지이다. 아마도 허유 작품의 역설이 자리하는 곳은 그러한 교집합의 속성에 있지 않을까? 흰 도화지의 텅 빈 공허를 은폐하기 위해,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붓을 들었던 화가의 행위가 결국은 또다시 텅 빈 공허의 불안을, 초과인 그것을 출현시키는 역설 말이다. 그리하여 허유의 작품은 기원적인 불안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허용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매혹적인 불안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사로잡히도록 만들고,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안정된 이미지로부터 이탈하도록 꾀는 이미지, 한마디로 불온한 이미지의 성향이 그곳에 있다. 물론 이것은 내가 허유의 작품을 보는 방식일 뿐이다. 각자의 관객들은 아마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이미지들의 교집합의 자리에 자신들의 지식과 환상의 이름을 집어넣으려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의 타이틀이 실체(substance)인 것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실체의 그리스 어원인 substantiasubstare 즉 사물의 아래, 토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이미지의 너머에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명명된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집합들이다. 그렇다면 실체란 모든 종류의 집합들이 교집합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체르멜로-프랭켈 공리를 따라서 모든 집합에 보편적인 부분집합인 그것은 공집합이라는 사실을 단지 언급하고 싶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실체'라면, 내가 그 이름으로부터 보는 것은 오직 이렇게 간단한 집합론의 가르침이 알려주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내게 주는 아름다움은 공백의 껍질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같다. 그것은 이미지들의 종착역, 겹쳐짐의 종착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유의 색깔들이 이제 막 시작되는 어느 장소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균열, 비단에 채색, 57.5 × 57.5cm, 2015


초과, 비단에 채색

월요일만 12시 오픈, 휴관일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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