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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사진·설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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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앤제이갤러리는 오는 2016년 8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이정 작가의 6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일기 ‘이게 다예요’를 모티브로 했다. 이정 작가를 대변하는 아포리아 시리즈의 ‘Hold me tight (2014년 작)’을 포함한 그녀의 새로운 작품, 그리고 설치작품까지 9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전까지 사진 속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들을 통해 표현하고, 발전시켜 왔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이정 작가만의 언어, 그녀만의 언어를 다루고자 했다.


<작가노트>
“바다에다다른뒤로는더이상아무것도모르겠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에서, 문학동네, 1996, p11)

이번 전시는 ‘아무 말도 되지 못한 말들’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마지막 일기 ‘이게 다예요’ (원제: C’est tout)를 모티브로 했다. 나는 지난 십여 년간 텍스트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발전시켜 왔는데, 어느 한 시점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나만의 언어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비록 나는, 죽음을 앞두고 끊임없이 연인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치 글이 씌어지기를 기다리는 흰 종이와 같은, 뒤라스의 처절함과 간절함을 다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숨과 침묵, 중얼거림, 그리고 빈 여백이 가득한 이 책을 통해, 작가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면서, ‘말하고 싶은, 쓰고 싶은 욕망’ 그 자체를 나만의 언어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는 철사를 구부려서 텍스트를 만들었고, 바다에 다다른 막막함을 담은 한 페이지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순간들을 이겨내야 했다. 풍경 속에서 꿋꿋이 서있는 말들이 이제는 나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뒤라스에게 글쓰기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정


어떤 우연하고 낯선 경험으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러니한 삶의 모습들로부터 혹은 그러한 불가해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풍경 속으로 못내 ‘닿으려 했던’ 작가의 애초 작업의 계기들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아마도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이전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변모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작가의 미분화된 작업의 처음 순간들, 그 계기들을 상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다소 생경하고 낯설었지만 그러나 왠지 처음부터 이런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한 몫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유려하고 매끈한 느낌들이었지만 좀처럼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시도들을 거듭했던 것 같고 그만큼이나 묘한 느낌들로 자리했다. 이들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닿으려 했던’, 접촉은 단순히 사진적 행위만으로
제한되지 않은, 이를테면 쓰여 질 수 없는 것을 쓰고자 하는 글쓰기의 행위이거나 보여 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리기의 행위들 같은 것들이 서로 포개진 것들일 것이다. 그 바탕에 작가의 (예술을 향한) 지극히 본원적인 희구나 몸짓들이 가로 놓여 있고, 특히나 이번 전시에서 이를 유감없이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작가는 애매한 의미와 뉘앙스로 전해지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접경 혹은 그 간극과 한계 사이에서 세상에 대한 혹은 작가 개인의 내면적인 어떤 생각과 느낌들을 부단히 접촉하려 하면서 이를 사진 작업으로 담아왔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애초부터 온전하게 담겨지고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황량한 풍경의 모호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세상에 돌고 도는 진부하고 흔해빠진 텍스트를 가시화시키고 있는 익히 알려진 작업들의 경우도 서로 어긋난 것들의 특정한 맥락 효과와 의뭉스럽게 발산하는 네온 빛 이미지로 인해 다른 의미들을 변주하고 증폭시켰고, 막다른 곳에 토해진 사랑의 언어들을 해체하여 덩어리로 보여준 이후의 작업들도 단선적이고 납작한 의미 전달과는 거리가 있었다. 모두 일상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텍스트와 이미지들의 풍경일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애매하고 낯선, 어떤 극단의 상황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그 역설의 느낌들을 배가시켜 왔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투적이고 관행적인 언어들조차도 어떤 특정한 한계 상황, 혹은 서로 다른 이미지의 맥락 속에서 모순적이고 무의미할 수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모순적이고 무의미한 특정한 전언들이야 말로 또 다른 의미의 한 방편일 수 있음을 드러내 온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이미지로서의 언어이자 언어로서의 이미지가 포개진, 그 균열과 틈 사이에서 의뭉스럽기만 한 어떤 막다른 느낌들마저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어떤 (불)가능한 접촉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한된 틀 내에 꾹 눌러 담은 말들처럼 한계 지워진 것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텍스트, 이미지, 혹은 기존 매체의 한계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이번 전시에서는 조금은 다른 낯선 시도를 하게 된다. 그간의 용의주도하고 꼼꼼한 방식들과는 사뭇 다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스스로 자유로울 사유와 몸짓들로 말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무한한 자유로움에 대한 희구나 갈망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간의 작업 활동에서 쌓이게 된 숱한 고민들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펼치려 하지만 여전히 작가의 문제의식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 가로 놓인,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와 한계를 가로지르려 하는 어떤 접촉의 몸짓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로서의 온전한 자신만의 화법, 글쓰기에 대한 고민들을 이어 나간다. 이런 힘겹기만 고민들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몇몇 이들의 텍스트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의 글쓰기에 담긴 사유들을 단초로 삼아 자신만의 어떤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적 고민들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들 익히 알려진 텍스트들조차 한낱 외부의 생경한 것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만의 언어, 글쓰기에 대한 어떤 절실함이 느껴지는데 우연하게도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모티브로 삼은 것도 이러한 절실함을 기반으로 한 어떤 사랑의 담론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의 불가능한 의미의 한계를 가로지르는 접촉의 사례들을 종종 친밀함이나 사랑의 관계에서 확인하곤 한다. 사랑의 텍스트, 이미지들이란 그렇게 모순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것들이다. 사랑에 대한 어떠한 텍스트나 이미지들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각적 현존이 선행하고, 또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에 관한 담론들은 숱한 의미표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그 생생한 감각적 현실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아니 그 단단한 감각적 존재감으로 인해 한껏 더 자유로운 것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이게 다예요’라는 외마디 외침은 얼마나 많은 것들은 함축하고 있는 말일까. 이 짧은 말 속에 이미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어요. (이게 다에요)’ 같은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인을 향한 수많은 느낌과 표현들을 뒤로 한 채, ‘사랑한다고, 그게 다야’라는 외침(혹은 고백, 독백, 중얼거림 같은 것들)은 어떤 말로도 다할 수 없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또 강렬하고 생생하게 전한다. 이렇게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기만 한 사랑의 담론이 언어의 한계마저 넘어 단단하고 농밀한 감각적 현존마저 전할 수 있는 것처럼 작가 역시도 이번 전시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말하기, 글쓰기에 다름 아닌 것들을 시도한다. 그간의 숱한 말로도 미처 전하지 못한 것들을, 그저 그게 다 일 뿐인, 어쩌면 그렇게 아무 말도 되지 못한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이유로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텍스트들은 이제 아예 아무 의미조차 없는 선들(의 이미지)로 과감하게 변모된다. 그래서 텍스트의 한계 사이에 애매하고 모순적인 의미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를 지우거나 무력화시킨 형상, 이미지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텍스트를 발생하게 한 어떤 상황들이나 흔적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칼리그람이나 픽토그램처럼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융된 것들과도 다른 맥락인 것 같다. 이들 형상,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의미의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포화된, 극단의 의미들을 담고 있기에 어떤 정형화된 기호의 틀조차 벗어나고 있으며 잠재적이고 가능한 수많은 의미들로 열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들로 때로는 공백처럼 비워있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랑에 대한 어떤 갈망으로 인해 그 느낌과 표현을 기존의 텍스트로 미처 다할 수 없어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알 수 없이 휘갈긴 낙서들처럼, 혹은 안절부절 하는 안타까움으로 토해내는 깊은 한숨처럼, 사랑이라는 명징한 감각적 현존, 그것이 다 일뿐, 더 이상의 무엇도 아닌 것들처럼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 이미지들이 기존 작업에서 볼 수 있는 텍스트의 단순한 다의성, 애매성, 모순성을 가로지르며, 잠재적인 수많은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것들을 향해 자리매김 된다. 작가 내면의 사유와 느낌들을 우연하고 즉흥적으로 담아내고 형상화시키면서, 그렇게 자유로움에 다름 아닌 것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이번 전시에서의 작가의 설치 작업도 유난히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특정한 매체에 한정되지 않은 작가로서의 면모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표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마저 드는데 미처 못 다한 수많은 말들을 다하기에는 오히려 더 함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내면의 개념들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드로잉처럼 작가는 이들 설치 작업들로 평면에서 미처 못 다한 의미와 표현은 물론 사진 매체처럼 이미지의 특정한 장치와 테크놀로지로 제한되지 않은 직접적인 이미지의 형상화, 텍스트화를 시도한다. 내면에 자리하는 보다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감각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작가로서 고민해왔던 것들, 그렇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 사이에서, 그 의미와 무의미의 간극과 한계 사이에서 서성거리면서 갈등해온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한껏 마음을 비우고 가다듬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발산하는 빛(이미지)은 여기서도 의미심장한 역할을 한다. 모호하고 황량한 대지의 풍경 이미지를 알 수 없는 의미의 존재들로 증폭시켜 온 전작들처럼 작가의 미처 못다 한 의미, 표현들을 함축적으로 가시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를 비어 있는 여백의 공간으로 변모시키면서 작가가 전하려 하는 의미, 표현의 파장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빛의 가시적인 효과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낯선 이미지, 텍스트의 풍경들을 은근한 존재감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특유의 명상적인 분위기와 느낌들로 인해 작업은 물론 작업이 자리하는 공간 자체를 더 주의 깊게 관조하도록 한다. 특히 빛이 일부는 나오고 일부는 나오지 않도록 한 설정은 의미와 무의미의 간극과 한계를 가로지르며, 스스로 자유로운 의미, 그 자체이고자 하는 작가의 어떤 의도마저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그저 사진이라는 제한된 매체가 엮어내는,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에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표현의 경계를 가로질러, 몸처럼 이미 현실적인 감각적인 접촉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녕 사랑하고 있다면 그러한 현실의 감각적 몸의 현존, 관계만으로도 그(녀)를 향한 모든 사랑을 담은 말들마저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것처럼 이번 전시 역시 아무 말도 되지 못한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무의미의 한계 너머의 충만한 의미 표현을 향한 작가의 어떤 욕망들을 가시화시킨다. 그동안 텍스트로도 혹은 그 텍스트 너머의 모호한 풍경으로도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것들을 역설적이지만 꽤나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존의 어떤 말들, 이미지와 형상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말과 풍경이 스스로 존재하도록 하면서 그러한 말과 풍경 사이에 숱한 고민들로 자리해왔던 자신만의 감각적 현존을 비로소 자유로운 방식으로 가시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민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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