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추구와 소통
오랜만에 개인전을 여는 박효민 작가의 그림은 가시적 현상 너머에 있는 단면 -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 을 파악하여 조형화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일관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모든 사물의 존재 근거가 되는 근원적인 것을 예술 작품에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형태를 위주로 묘사하면서 신을 나타내는 방식과 신을 위주로 하면서 형태를 신에 종속시키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작가는 도시의 풍경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파악한 신을 드러내는데 위의 첫 번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대상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저 스쳐지나가거나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간과해버리거나 혹은 다른 대상에 신경을 쓰는 나머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때 얼핏 지나치기 쉬운 일상적인 도시 환경과 그 속에 있는 인물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이를 묘사하는 것이야 말로, 신을 파악하는 첩경임을 작가는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대상의 묘사가 거의 선적이며 사진을 찍은 것 이상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므로, 숨은 그림을 찾듯이 하나하나 쫒아가다 보면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대상의 모습 ․ 구조 ․ 표정 ․ 색채 ․ 움직임 ․ 특징 등을 알아내면서 “아! 그랬었지.”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의 야경에 나타나는 건물들 간판에 새겨진 각종 글자체, 가게 앞에서 흥정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의 동작, 조명에 따라 달라지는 돌로 포장된 거리의 색채, <Dear John Letter>의 길거리에서 돌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손동작, 간이 점포에서 카드를 고르는 젊은 여인들의 뒷모습, <revolution> 간판 글자의 각종 색채와 입구에 보이는 어색한 색채들의 어울림, <관조(Contemplation)>의 어망과 부표들, 멀리 보이는 대형 크레인들의 부조화, <sniper>의 저격용 총을 감싸고 있는 헝겊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을 감상하는 순간 그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이야기를 걸어온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작가가 바라는 것처럼 쉽게 파악되지 않으며 또 작가가 의도한대로 감상자가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파악한 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열망 외에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바램도 지니게 된다.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핸드폰과 같은 소도구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sniper>에는 이러한 간극과 연계된 작가의 고민이 구체적으로 부각된다. 작가는 이를 나타내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먼저 화면의 외곽을 통상적인 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화판 몇 개를 서로 어긋나게 이어 붙인 듯이 일그러뜨린다. 다음으로 목표물을 향하여 발사된 저격용 총알이 남긴 파열 흔적을 통해 간극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알이 약간의 흔적을 남긴 채 간극을 뚫고 나갔으므로 간극이 극복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마련되었다고 낙관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뚫고 지나가긴 했으나 대부분의 간극은 여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작가와 감상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여인의 표정도 임무를 완수하고 안경을 벗은 프로 저격수의 만족스런 모습 같기도 하고 목표물의 한가운데를 적중시키지 못하고 그 부근을 맞추어 약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간극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신의 파악이라는 것이, 결국 작가마다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 및 예술관에 의지하여 세계와 직면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특성에 있다. 이에 더해 감상자가 작가 또는 비평가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경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이방인>이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방인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생소한데다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단지 전등불이 환히 켜져 있는 거리이므로 일단은 안심이 되는 면도 있으나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낯선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이 겪는 당황스러움 ․ 두려움 ․ 호기심 ․ 낭패가 곁들어진 느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느낌은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두려움이 해소되려면 우선 그 세계를 이해하고 규정함으로써 그에 따른 질서와 체계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이다. 예술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제시하는 것에서 그 가치를 발견한다. 이렇게 발견한 세계를 감상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소통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소통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므로 새로운 세계 즉 신의 제시보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직면하였을 때의 생소한 느낌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그래서 감상자와 서로 소통하기 쉬운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방인>을 보면 한 순간에 얼어붙은 듯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어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의 그 순간적 상황을 잘 포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생소하면 기존의 판단 기준으로 시비선악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의 기능이 순간적으로 정지되는데. 이 그림은 그러한 순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도 흔하지는 않지만 갑자기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자기만 완전히 소외된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방인>이 바로 그런 순간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개 ․ 새 ․ 말 등 다양한 동물 그림은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들에게 무지함이나 잔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는 따뜻하고 애정에 넘치는 마음으로 그들을 보듬어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이 남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동물의 형태는 물론 눈을 통해 감정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도시를 그린 그림들이 <revolution>을 제외하고는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비해, 동물 그림에서는 화면의 반 이상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특히 아프간하운드를 주제로 한 <contemporaries> 春夏秋冬 시리즈에서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신을 나타내는 방법의 전환이다. 다른 그림에서는 대상의 많은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통해 신을 전달하려고 시도한 반면 여기에서는 아프간하운드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얼굴의 일부분만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하는 방식을 통해, 신을 위주로 하면서 형태를 이에 부속시키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 아프간하운드의 가장 특징적인 눈 ․ 코 ․ 수염과 가슴의 털만이 남고 다른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에서 그 전조를 엿볼 수 있지만, 작가는 그림의 제재를 바꾸고 또 크기를 훨씬 확대하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동시에 색채의 구사도 최대한 억제하여 초록색, 붉은 색, 갈색과 흑색 계통의 모노톤 효과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 색채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오방색을 연상시킴으로써 근원적인 것에 다가가려는 작가의 의도를 넌지시 보여준다. 형태와 색채의 간결함과 여백은 독립심이 강하면서도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극도로 주의 깊은 아프간하운드의 성질을 잘 나타내준다. 아프간하운드는 허공에 떠 있으면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눈을 통해 또 턱수염 비슷하게 그려진 가슴의 털을 통해 많은 세파를 겪으며 세상을 살아온,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달관하여 가시적인 것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아프간하운드를 만나게 된다. 작가는 형태와 색채를 지극히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아프간하운드의 신은 물론 작가 자신의 신을 투사하고 있다.
철학박사 미학전공 백 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