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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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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된 언어를 갱신하는 침묵의 기표

이선영 (미술평론가)

나란히 찍혀진 3개의 점으로 표기되는 문장기호인 말없음표, 그리고 1년 365일 중 휴일을 제외한 날수인 251이 결합된 ‘251_ellipsis’ 전은 일상적 직업의 시간과 그 외의 시간 즉 작업의 시간을 맞세운다. 말의 명료한 구사는 모든 재현적 활동의 기반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재현적 활동만을 생산으로 간주한다. 공적 영역에서 침묵은 어색함, 서툼, 착오, 망각 등으로 논리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므로 억제, 배제되어야 한다. 말중심주의Logocentrism 사회에서 말은 공적영역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홀로 ‘끄적거리는’ 작업의 시간은 그림자 노동shadow work으로, 대부분 사회적 피드백이 없는 고독한 시간이다. 작가는 그 시간에 스스로와 대화한다. 누구와의 협업과도 거리가 있는 이영희의 작품들이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방식을 고수한다. 대화는 고갈된 말에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영희의 대화법에서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결정타는 없다. 해체주의 식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향한 끝없는 보충과 대리가 있을 뿐이다. 시작과 종점 그리고 삶과 죽음이 연결된 순환구조 속에서 접힘은 또 다른 펼침을 낳을 것이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식물과 동물은 호환성을 가진다. 그 모두는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 언어적으로 욕망한다. 욕구와 달리 욕망은 끝이 없다. 작가가 기호와 이미지를 동원하여 무한히 번식시키는 이 증식된 말속에 작가는 있으면서도 없다. 그것은 지시대상의 부재인 이미지와 메시지가 없는 침묵이 끝없이 덧붙여지는 식으로 배열된다. 이영희의 침묵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아직 말이 안 되는 상태, 기호들이 정확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떠도는 순간을 말한다. 최초에는 지시대상과 그 이후에는 기의와 분리된 기표들은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향하듯이 그렇게 정확한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빈 공간을 배회한다. 이영희의 작품에는 의미의 순간보다 그러한 순간을 가능케 하는 모색의 순간이 더 많다. 말없음표 기호로부터 발생하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의미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차지하는 무의미의 위치를 알려준다. 영상에 드러나는 등장인물은 1~251명의 youngheelee이며 그녀들은 떠도는 말과 이미지의 조합 속에서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물속에 떠도는 입자들처럼 안정된 순간은 없다.

카오스가 코스모스의 기원이듯이, 확실성의 기원은 불확실성이고, 의미의 기원은 무의미이며, 말의 기원은 침묵이다. 이영희가 전시 주제로 삼은 ‘말없음표’는 ‘말/없음/표’ 라는 세 항목 모두에 부재를 내포한다. 이 세 겹의 부재를 묶어줄 수 있는 것은 주체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영희는 이 전시에서 자신을 251개로 분열시켜 그들을 타자처럼 바라보고 대화하고 분석한다. 예술가가 이러한 부재의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부정이나 자학이 아니다. 본질적 자아가 아니라 미지의 자아를 생성하고 만나기 위한 것이다. 말해진 것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이영희의 작품에서 의미의 장은 육체나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 말이 방해받을 때 또는 제거되었을 때 더 드러나는 것은 몸과 무의식이다. 말의 주체가 아닌 대상인 육체는 말이 없다. 소비사회에서는 비밀보다는 떠벌림이 모든 것을 더 빨리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더듬어진 말, 생략된 말에는 소비를 통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긍정적 힘이 있다. 이 힘은 침묵 속에 침몰한 것을 다시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선영 전시평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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