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제목 : 황홀한 숲
전시 작가 : 장 한
전시 일자 : 2016년 11월11일 – 12월 10일
전시 장소 :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158길 8 2층 그리고(GRIGO) 갤러리
“깨어났을 때, 그 공룡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 아우그스토 몬테로소
장한은 검정색 배경위에 무채색으로 풍경을 그린다.
장한은 일반적으로 실제로 보거나 경험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풍경화와는 달리 다양한 경로로 수집된 기존의풍경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상성을 제거하여 기호화된 관념적인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적막하고고요한 명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장한이 <황홀한 숲>전을통해 100호 연작으로 선보이는 ‘검은 숲’ 시리즈와 절벽, 폭포, 산등을그린 무채색 풍경화들은 동서양, 고전과 현대의 시공간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시도로 채워져 있으며 관객들로하여금 현실과 분리된 풍경에서 오는 단절감과 무관심성, 심적 거리를 두는 관조 방식을 통해서 거대한적막감만을 남기는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장한은 어느 눈 내리는 날의 풍경을 바라본 경험이 이번 작업방식의 시작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눈 내리는 날 바라 보았던 어떤 순간의 풍경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채워야 마땅한 것들이 마음 속에 무한한공허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번 연작을 준비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보기 위해서 대상을 제거하고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대상과 색을 절제하면서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비물질적인 물질을 통해 가장깊은 곳의 심오한 존재를 건드리는 방식으로서 그는 검은 배경을 선택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서 장한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색을 과감히버렸다. 그리하여 감성을 자극하는 일체의 색들로부터 벗어나 차가운 무관심으로 오직 명도와 조형만을 그자리에 남겨둠으로써 내 그림에서는 색이 주는 감정의 스펙트럼 역시 줄어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내 그림이 다양한 색에서비롯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거대한 고요함 혹은 적막함을원한다. 이렇게 그려진 무채색의 풍경화는 색이 없음으로 인해 더욱 현실에서 단절된 새로운 풍경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리고 내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지는 검정 배경은 내가 원하는 거대한 고요함과 적막감, 그리고 단절된 느낌과 연결된다. 나에게 이 검은 색의 배경은 우주공간처럼그 공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숨겨진 무한한 공간이다. 마치‘0(zero)’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가득 채워질 수도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어두운 공간으로써 때에 따라서는 배경에 드리워진 어둠이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 2016년 장한 작가 노트 중에서
장한이 선택한 검은색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 되어진 무채색의 풍경들은 그 후, 작품에서 그의 손에서는 감지되지 않는 추상적인 느낌만이 남게 되었다. 고요하고불화하는 것들, 다가와 사라지는 것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인식의 영역 안에서 경계를 확장하며 어둠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심미적인 선택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것,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 이것이 어떤 순간에 이르러서는전체가 되어 버린 것을 구현하고 있다.
장한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실패함으로써, 텅빈 공허를 통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함으로써, 그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시작하고 무언가를 찾게 만들기를바라고 있다.
아무쪼록 이번 전시를 통해서 무채색의 풍경 뒤에 오는 거대한 고요함과 적막감,혹은 어떤 소리, 그리고 우주 공간 같은 깊은 어둠, 무, 그 속을 여러분도 천천히 걷게 되길 바란다.
<장한 소개>
장한은 1991년 한국에서 태어나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을 하고있다. 그는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2012년정다방 프로젝트에서 ‘내가 불행한 이유를 알겠다’와 2015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블라인드 데이트’ 등 두 차례 그룹전에 참여해왔다. 2016년 11월 그리고(GRIGO) 갤러리에서의 ‘황홀한 숲’전이 첫 개인전이며 2016년12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그룹전 ‘블라인드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
Hann Jang
진행 : 그리고 갤러리
인터뷰 및 글 : 천미림
날짜 : 2016년 9월 19일
Q. 이번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이번 전시의 주는 ‘검은 숲’이다. 예전 전시 「내가 불행한 이유를 알겠다(2012)」에서 붉은 풀숲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 때 풀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풍경을 흑백으로 다시 가지고 왔다. 밤에 보는 풀은 색다른 느낌을 준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에 빛을 받은 부분만 빛나 보이고 나머지는 어둡게 보인다. 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마치 죽어있는 것이 생명 없이 매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무력한 느낌이 좋아서 이번 전시에서는 검은 풀숲을 그렸다.
전시를 준비할 때, 작업을 디스플레이하거나 공간을 연출하는 부분에 집중한다. 전시장으로부터 관객이 어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예전에 앤디워홀의 전시를 보고 텅 비어있음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전시로부터 어떠한 감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러한 느낌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Q. 풍경작업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풍경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미대를 다닐 때 근처 공원에 혼자 산책을 많이 다녔다. 낮에는 사람이 많고 밤에는 조용한 공원이었는데 그 때 그 곳에서 야외스케치를 자주 했었다. 그 때부터 풍경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시간에 스케치를 하다 보니 풍경에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구도도 쓸쓸해졌다. 사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때는 죽은 스타들 같은 인물도 그렸었다. 그런데 실제 인물과 얽힌 공허함을 다루는 작업과정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 때 유일하게 그리고 싶은 것이 풍경이었다. 풍경은 다른 대상들과 다르게 말없이 그냥 있는 느낌이나 태도, 에너지를 준다. 때문에 풍경작업을 하고 있다.
Q. 작업의 주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가.
항상 머릿속에 생각하는 단어들이 있긴 하다. 공허, 침묵, 고요, 검정 같은 것이다. 이런 단어들이 갖는 의미가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게 필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초조한 마음이 들 때마다 차분하고 조용한 무언가에 대한 필요를 느꼈다. 그러면서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허, 침묵 같은 단어를 작업에 직접 들여보내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객들이 내 작업 앞에서 멍하게 그림을 보면서 이러한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동적인 작업과는 다른 차분한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무채색을 쓰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이다. 무채색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고요한 느낌을 확실하게 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Q. 다른 매체가 아닌 회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개인적으로 회화를 좋아한다. 전시도 회화가 있는 전시를 주로 본다. 작업을 할 때 매체가 주는 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재료로 과슈(gouache)를 주로 쓰는데, 나의 작업을 보는 사람들이 나의 재료에 대해 자주 묻는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크릴을 썼었는데 반사가 되는 질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재료를 찾다가 과슈를 쓰게 되었다. 포스터칼라처럼 매트한 질감이 마음에 들었다. 유화는 빨리 건조되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다.
Q. 일상에서 작업에 영감을 주는 것이 있는가.
사실 일상이 너무 지루해서 작업을 한다. 작업을 안 할 때는 책도 읽고 음악도 듣는다. 예전에는 Sartre의 『구토』나 『닫힌 방』 같은 실존주의와 관련한 책을 주로 봤다. 요즘은 이상하게 글이 잘 안 읽혀서 예전처럼 자주 보지는 않는다. 음악은 James Blake를 주로 듣는다.
Q. 무채색의 선호 자체가 작업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전 전시 「내가 불행한 이유를 알겠다」 까지도, 다양한 색이 배제되어있기는 하지만, 붉은색을 쓰기도 했다고 했다. 무채색이 작업방식에서 갖는 의미와 지금 사용하는 무채색으로 정제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색을 다양하게 썼었다. 의도치 않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느낌을 중요하게 표현하려다 보니 점점 사용하는 색이 줄어들었다. 색을 선택할 때는 색이 주는 톤이나 느낌을 고려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색을 조정하던 어느 날, 밖에서 전화통화를 하다 눈을 맞은 밤이 있었다. 그 날, 눈이 조용하게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것에 약간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때부터 흰색과 검정색의 무채색 그림을 처음 시도해보았다. 이후 죽은 스타들을 주제로 작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채색으로 작업하고 있다.
Q. 대상으로서 다루어지는 풍경들의 수집, 선택에 접근하는 작가만의 방식이 있는가.
직접 촬영하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수집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직접 만든 이미지보다 외부로부터 얻는 이미지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무엇을 그리겠다고 떠올린 뒤, 그 대상이 되는 이미지를 찾는다. 이미지를 찾을 때 딱히 제약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풍경은 잘 그리지 않는다. 도시라는 특성상 풍경 자체가 좀 복잡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레이어가 없거나 너무 많은 오브젝트가 있는 풍경은 선호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작업자료로 주로 사용한다.
Q. 작가노트를 살펴보면 ‘관념으로서의 풍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작가 스스로의 창작활동이 관념의 이미지로 변환된다고 한다면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로서의 관념’은 무엇인가.
이제껏 여러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다. 예술은 나에게 있어 거창하지 않다. 따라서 예술로서의 관념도 아직 딱히 무엇이라 정의내리기 어렵다.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꼭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지는 않다. 풍경을 다루는 작업들 중에서 풍경에 어떤 주제나 메시지를 담아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르다. 나는 풍경이 주는 느낌에 집중하기 때문에 굳이 서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말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그림으로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Q. 작가는 대체로 산, 물, 안개처럼 거대한 자연을 다루는 것 같다. 수많은 자연적 대상 중에 거대한 자연이란 이론적으로는 전형적인 숭고(sublime)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숭고한 자연이 주는 공포는 사실 다소 정형화된 주제일 수 있는데, 작가는 거대한 자연이 주는 공허함과 공포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려하고 만지는지 궁금하다. 만약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라면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언젠가 주변에서 나의 작업을 보고 숭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자연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작가들은 자연을 직접 경험하고, 숭고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2차 이미지를 보고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자연적 이미지나, 숭고를 다룬 이미지들이 사용하는 구도나 느낌을 반복적으로 생각한다. 작업할 때는 구도를 가장 생각한다. 누군가 내 그림은 와이드(wide)한 구도가 없고, 렌즈를 줌-인(zoom-in)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사실 내 작업은 풍경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흔히 생각하는 풍경은 아니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다. 언젠가 산을 반복해서 그린 뒤 그림을 모아봤더니 증명사진을 찍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숭고 자체를 작업의 효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Q. 배제와 절제는 빈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은 감상하는 관객들에게 상상과 공감의 여지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자신의 작업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방식의 미적경험으로 소비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내 작업을 볼 때 관객들이 멍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절제와 배제는 내가 관객에게 감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제 그림을 보고 지나가는 말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왠지 내 그림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느낄 수 없음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무소리도 없는데 그 순간이 좋을 때가 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Q. ‘내가 어떻게 느꼈는가’가 작업의 중심인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의 삶이 변하는 대로 작업 방향이 많이 바뀔 것 같다. 앞으로의 작업의 흐름을 예상한다면?
사실 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런 일상들을 의도적으로 굳이 그림에 끌어들여오려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작업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일상이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통해 나 스스로나 주변을 드러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렇다고 그런 주제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렇지 않은 작업들이 나에게 더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다. 허무주의자가 그리는 그림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줄 작업들은 이전보다 이미지들이 더 가깝게 와있다. 다시 말해, 멀리 있는 풍경보다는 가까운 풀을 그렸다. 다음 작업은 이번하고는 또 다르게 더 멀리 있는 이미지들, 그리고 더 많은 여백을 가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텅 비었다는 느낌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여백이 많고 텅 비어보이는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Q. 최근 작업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 혹은 집중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어떤 우주적인 공허함을 작업에 담아내서 보여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런 공허함을 사람들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 공허를 담아내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그림이 박제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박제는 살아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 죽어있다는 점에서 나의 작업적 부분과도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