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5. ~ 2017. 1. 29.
이준석, 오월 그림
“가슴마다 꽃으로 피어 있으라”
임종영(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Ⅰ.
1980년 5월 27일 새벽,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전남 도청에 남아 광주를 지키는 시민들이 있었다. 동이 채 트기도 전에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해 밀려오는 진압군에 맞선 그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군부의 총칼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된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이었을 것이다.
1980년 미술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준석은 오월 광주를 직접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1983년 군 전역 후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소위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그림들을 그려오고 있다. 작가 이준석이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일관된 주제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마도 엄혹했던 군사 독재정권하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시대적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작가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일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매년 작업성과가 두드러진 지역 중견작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올해에는 오랜 세월동안 일관되게 오월 광주와 사람이 희망임을 그려온 이준석 작가를 초대해 그의 판화, 회화, 설치 작품, 그리고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와 지역 미술운동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Ⅱ.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민중미술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980년대 초, 중반 가장 강력한 표현매체는 단연 판화였다. 판화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특성과 제작의 용이함, 흑백 대비에 의한 강한 표현효과 등으로 작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쉽게 접하고 활용하였다. 특히 대학에서는 판화반이 만들어질 정도로 판화 운동은 가히 선풍적이었다.
이준석은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망월묘역의 느낌을 표현한 <묘지 가는 길 Ⅰ, Ⅱ, 1983년>, 오월 희생자들의 시신더미를 하나의 무덤으로 형상화시킨 <인산, 1984년>,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던 리어카에 실려 있는 시신과 오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귀가, 1985년>를 고무와 나무 판에 새겨 넣었다. 이후 그의 판화 작업은 오월광주로부터 주변 풍경이나 일하는 사람들로 점차 그 시선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당시 제작되었던 그의 판화 작품 이미지들은 대학신문, 교지, 신문 삽화, 깃발 등에 두루 활용되었다.
이준석은 판화작업 기간 중 독일 케테 콜비츠의 판화 작품과 1930년대 노신이 주도한 중국 목판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민화, 풍속화 등 민족적 전통 형식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였다. 1986년에는 김경주, 조진호, 최상호 등과 함께 ‘광주목판화연구회’를 창립하여 <오월시 판화집> 등을 출간하는 등 지역 목판화 운동의 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Ⅲ.
이준석은 “그리고 싶은 그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겠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그 시대에 꼭 있어야 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작가정신이며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해야 할 당연한 화업(畵業)이다.”라고 말한다.
화가라면 누구나 오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도의 풍광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마음 편히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오월은 아름다운 남도의 풍광보다는 잊을 수 없는 광주의 아픈 기억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 반미와 조국 통일운동,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참교육 운동 등 그야말로 광범위한 계급, 계층에 의한 사회변혁의 물결로 넘쳐났던 1980년대에 이준석은 청년 시기를 보냈다. 어쩌면 광주민중항쟁을 직접 체험하고 대 변혁의 시기를 살아왔던 작가로서 시대에 꼭 있어야 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 작가적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개인 작업보다는 집단창작을 통해 조직에 복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월광주’는 평생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해 왔고, 그는 선택이 아닌 숙명처럼 민중미술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작가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는 <화엄광주> 연작은 오월광주와 광주정신이 확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준석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황지우 시인의 <화엄광주>라는 시를 읽고 “보살의 만행이 꽃처럼 피어나 이 세상을 장엄하게 한다.”라는 뜻의 ‘화엄(華嚴)’처럼 오월광주의 아픔과 희생이 사람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오월광주를 <화엄광주> 연작으로 담아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제작된 7점의 <화엄광주> 연작은 표현방식에 있어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열사들의 정신이 널리 확산되어 민주주의 꽃이 활짝 필 수 있기를 바라는 일관된 주제를 담고 있다.
이준석은 오월광주를 주제로 한 작품 외에도 평화와 폭력을 대비시킨 <평동마을의 오후, 1993년>, 희망이 사라진 농촌을 표현한 <붉은 대지의 노래, 1994), 자본과 힘의 논리를 앞세운 미국을 조롱한 <War Game, 2001년>, 사람이 희망임을 강조한 <당신이 희망입니다, 2008년>, 자본 권력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 <나도 프라다, 2015년> 등 시사성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그려왔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설치작품인 <오월의 소리, 2016년>와 1984년 목판화 작품인 <인산>을 대형 회화작품으로 다시 그린 <인산, 2016>이다. <오월의 소리>는 항쟁 당시 사망자 명단을 발표하는 소리, 도청을 사수하자는 긴박한 방송 소리가 전시실 천정에 설치한 풍경(風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면서 오월 광주를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지듯 오월정신이 널리 확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인산>은 오월 희생자들의 시신을 하나의 무덤형태로 표현한 1984년의 판화작품을 대형 회화작품으로 변화시킨 작품이다. 판화 작품 <인산>은 이준석의 첫 번째 목판화 작품으로 당시에는 사회적 분위기상 외부로 공개할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새롭게 탄생한 <인산>은 그 크기만큼 강한 이미지로 당시 처참했던 오월 광주의 상황을 말해준다.
Ⅳ.
1984년 ‘민중문화연구회’, 1986년 ‘광주목판화연구회’, 1988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로 이어지는 미술운동 조직 활동을 하면서 이준석은 개인 창작보다는 반독재 민주화와 반미 자주화 운동 과정에서 요구되는 판화, 걸개그림 등 대중적이면서 현장성 높은 시각매체물을 제작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작가로서 왕성한 작업을 해야 할 청년기에 이준석은 미술운동 조직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면서 미술이 사회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시대모순을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1980~90년대 이준석은 미술운동을 통해 사회와 미술과의 관계, 미술가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변함없는 그의 성격처럼 앞으로도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림들을 그릴 것이다. 우리시대는 여전히 민중미술작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번 전시를 계기로 마음 속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모색해 나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