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이응노미술관 소장품전
돌, 나무, 종이
❍ 종이, 나무, 섬유, 돌, 세라믹 등 재료별 특성으로 살펴보는 이응노의 예술
❍ 신소장품 <마스크(1965)>, <옥중에서(1963)> 최초 공개
❍ 세라믹, 타피스트리, 콜라주, 조각 등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90여점 소개
■ 기획의도
이응노미술관은 2017년 첫 전시로 소장품전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돌, 나무, 종이, 세라믹, 패브릭 등 이응노가 즐겨 사용했던 재료를 중심으로 작품이 가진 물성과 마티에르를 통해 이응노 예술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1965년작 <마스크>와 1963년 문자추상 회화 <옥중에서>는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신소장품이다.
이응노는 ‘용구의 혁명’을 언급하며 창작 방식을 대담하게 실험하는 새로운 지성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으며, 1959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 다채로운 재료 사용을 통해 순수 형식 창조로 변화해가는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을 간파했다. 결국 재료의 혁신을 통해 모더니즘 미술에 접근하는 것이 당시 이응노의 중요한 미학적 과제였다. 이 소장품전은 재료의 물질성과 마티에르에 주목해 재료의 특질을 순수 형태로 끄집어내는 이응노의 창작 방식에 주목한다.
이응노에 영향을 끼쳤던 앵포르멜 사조는 물질에 내재한 잠재적 형상에 주목하고, 재료의 물질성을 내세우며 형태 해체를 시도한 예술이다. 장 뒤뷔페, 포트리에와 같은 화가들이 타르, 시멘트, 모래, 바니시 등의 재료를 통해 회화 표면의 거친 마티에르와 물성을 강조해 비정형의 미학을 주창했듯이 이응노는 종이, 풀, 섬유의 재질을 활용해 평면에 다양한 물성과 질감을 구현했고 비형상의 추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방식의 재료 활용은 조소와 같은 입체작업에서도 발견된다. 나무, 돌, 세라믹을 사용한 작업은 사물을 모방하기 보다는 재료 자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20세기 조각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미술사적 문맥에서 크게 유기체적 생기론, 원시적 애니미즘, 앵포르멜, 기호 & 문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유기체적 생기론이란 장 아르프, 헨리 무어처럼 생물체의 외형이나 자연을 암시하는 유기적 곡선을 통해 사물 속에서 생명력을 찾는 작품을 포괄한다. 이응노의 세라믹 작품을 이런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시적 애니미즘은 자코메티, 브랑쿠시가 아프리카 미술에서 조각의 생명력을 발견하였듯이, 물질 속에 내재한 원시적 힘을 찾아 단순 재료를 특수한 사물로 거듭나게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토템>을 비롯한 이응노의 나무, 돌 조각은 그 원시적 형태를 통해 강한 표현력을 발산한다. 특히 나무에 전각의 장법을 활용하거나, 종이로 쑨 풀죽으로 만든 작품엔 한국적 감수성이 짙게 배어 있다. 표현성을 강조하는 이런 경향은 앵포르멜의 충동적 이미지와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또한 문자 형태를 응용한 조각에서는 기호를 가지고 추상을 구성하는 이응노의 일관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시도의 바탕에는 재료의 특성에 감응하는 작가의 눈과 손이 있다는 점이다. 이번 소장품전은 돌, 나무, 종이, 세라믹 그리고 그것들이 공간 속에서 관객과 만나 일으키는 예술적 감흥에 초점을 맞췄다. 이응노미술관장 이지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와 재료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상해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밤나무, 1972, 태피스트리, 313x263
■ 전시구성
전시는 총 4개의 섹션으로 재료별로 각 전시시를 구성했다. 이응노가 여러 가지 재료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각 재료만의 특질이 어떤 조형성을 나타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 1전시실 – 종이와 패브릭
한지를 비롯한 종이는 이응노가 평생 사용한 재료이다. 이응노는 종이를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 이외 종이가 가진 물질성과 마티에르를 작품 창작에 적극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에 창작한 종이 콜라주 시리즈는 잡지, 신문, 한지를 구기고 찢어 붙인 후 그 위에 살짝 색채를 덧붙인 작품이다. 이응노는 종이의 불규칙하게 찢어진 단면, 구겨진 표면 굴곡, 눌리거나 접힌 단면을 추상적, 구성적으로 활용해 평면 위에 부조 형상을 창작하는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20세기초 피카소, 브라크가 콜라주를 시작한 이래 서양의 종이 콜라주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지만, 독특하게도 이응노는 종이의 질감, 물질성에 주목해 종이를 마치 조소의 재료처럼 사용했다. 솜이나 종이 풀죽은 그 촉각성을 잘 드러내는 대표적 경우로 콜라주 표면의 비정형성은 1970-80년대를 거치며 창작된 수많은 조각 작품의 형태적 원형으로 볼 수 있다. 패브릭 역시 중요한 재료이다. 1970년대 이응노는 마, 융 그리고 각종 직물 천 위에 작업을 했고 직물의 질감을 시각적 효과로 활용했다. 패브릭은 물감이 낼 수 없는 색다른 질감과 느낌을 표면에 부여해 작품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 실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결, 염색이 스며들어 색을 만드는 뉘앙스, 요철이 있는 표면 등 회화, 콜라주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섬유이다. 타피스트리의 경우 1972년 프랑스 국립 모빌리에가 처음 이응노에게 모델을 주문한 이후 프랑스 직공기술과 이응노의 문자추상이 만나 염색, 재료의 완벽한 조화를 실현했다. 이응노의 회화적 언어가 직물 언어로 바뀌면서 나타난 색다른 표현이 특별하다.
▲ 2전시실 – 세라믹
이 세라믹 작품들은 사물을 묘사한 전통 조소가 아니라 재료의 특성 자체가 주제가 되는 무의미, 무형태의 작품이다. 이응노는 1980년대 프랑스 국립 세브르 도자공장과의 협업을 통해 접시를 비롯한 많은 세라믹 작품을 남겼다. 이 전시실에는 접시 작품은 제외하고 순수 조형물만 골라 배치했다. 세라믹은 차가운 표면과 매끈한 질감을 가진 딱딱한 물질이지만 불에 굽기 전 작가가 흙으로 빚은 부드러운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매체이다. 손으로 조물거리거나 흙을 만져 형태를 빚는 과정이 마치 작가의 인장처럼 작품의 겉표면에 남아 제작과정을 유추해보거나, 손이 직접 만들어낸 자연스런 곡선과 형태에 주목하게 된다. 세라믹은 흙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손과 눈이 무형태 속에서 형태를 끄집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사물에 숨겨져 있던 생명력, 원시성, 운동성이 다양한 곡선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진흙의 물렁한 재질감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형태와 곡선은 세라믹이라는 재료를 단단한 재료가 아닌 무른 재료처럼 보이게 한다. 이 무른 형태는 닫힌 형식이 아닌 열린 형식으로 재료가 지닌 확장성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이 확장성은 고전 작품의 닫힌 형식과 대비되는 현대 조소의 특징이다. 자연을 닮은 유기적 형상, 불규칙한 모양, 액체적 흐름을 형태의 기본으로 활용하고, 작품의 내외부가 전시장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등 이응노의 세라믹은 비형상성의 입체적 특성을 대담하게 실험하고 있다.
▲ 3전시실 – 나무
목조 작품들은 나무 고유의 거친 재질감을 앵포르멜 형상에 이용하거나 혹은 매끈하게 가공해 생물체 형태를 구성하거나, ‘발견된 오브제’ 개념을 활용해 나무 토막 자체를 작품으로 생산하는 등 다양한 양식의 작품이 뒤섞여있다. 대체적으로 1960-70년대 현대조각의 흐름을 반영한다. 여기 놓인 대부분의 목조는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나무 자체가 지닌 물성, 질감을 주제로 삼고 있다. 나무는 끌과 정으로 깎은 표면에서 쉽게 앵포르멜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는 재료이며, 나뭇결의 곡선이나 끌로 파낸 거친 표면 그리고 잘라진 단면을 그대로 비정형 오브제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이다. 이응노의 나무 조각은 크게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재질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작품의 감정적 요소들이 달라지는 경향을 관찰할 수 있다. <토템>, <얼굴>은 샤머니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형태를 강조해 재료 속에서 원시적 생명력, 두려움, 공포와 같은 주술적 느낌을 이끌어낸다. 문자 형상을 서로 결합하고 깎아낸 일부 작품은 문자추상을 입체적으로 실험한 작품처럼 보인다. 또 소라고둥 등 생물체의 형상에서 따온 곡선을 응용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자연을 닮은 흐르는 듯한 선으로 편안하고 유유한 느낌을 이끌어낸다. 유기적 곡선은 사람들이 팔을 들고 서 있는 군상 혹은 춤추는 인물들의 모습으로 추상화된 형태로 변화해가기도 한다. 한편 구두의 형태를 뜨는 나무틀에 그림을 그려 넣어 일상적 오브제를 예술적으로 변용시켰다. ‘발견된 오브제’ 방식을 적용해 특별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 4전시실 – 돌
돌을 재료로 삼은 작품은 이번 전시 중 가장 적지만 돌을 활용하는 방식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은 이응노에게 최초로 조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재료였다. 이응노는 1955년 경주 여행에서 ‘금강역사’ 등 신라시대의 불교조각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는다. 다루기 힘든 돌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토실토실한 살”과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인체를 조각해낸 신라인들의 솜씨에 감명받은 이응노는 이후 유럽으로 건너간 후에 본격적으로 입체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 전시된 석조 작품들은 본격적인 조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돌 자체를 예술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깎거나 쪼아 형상을 만들기보다는 돌의 본래 형태를 보전하며 그 표면에 색을 칠하거나 문양을 새겨 넣어 장식적 기법을 덧입혔기 때문이다. 주변의 흔한 사물의 하나인 돌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작가의 생각에 주목하게 된다. 이응노는 돌 위에 색을 칠하거나, 문자추상과 군상의 모티브를 새겨 넣어 딱딱한 표면에 표현적 활기를 불어넣는데 이것은 마치 재료를 가지고 생동감 있는 형상을 빚어내는 조각가의 테크닉과 유사하다. 붉은색으로 데코레이션한 돌은 마치 바위 위에 새겨진 비문처럼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일종의 토템과 같은 신비한 아우라를 내보이고 있다. 느낌없는 무생물에 불가사의한 의미를 덧붙였다는 점에서 돌이라는 자연적 오브제를 미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의 감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대표작품
마스크, 1965, 65x130cm, 나무에 종이부조
종이를 풀에 개어 만든 부조 형상을 나무판에 붙인 작품으로 일그러진 얼굴 형상에서 원시적 표현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1960년대 이응노는 얼굴, 탈을 주제로 민속적, 원시적 특징을 두드러진 사람 얼굴 형상의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동시에 종이와 풀로 곤죽을 만들어 쓰거나, 종이에 먹을 칠하는 등 한국적 재료에 대한 감성적 접근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작품은 거친 마티에르와 재료 사용의 독특함에 관해 앵포르멜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단순하고 과장된 원시적 표현성으로 격양된 감정을 이끌어내며, 일그러진 얼굴 형태에서 공포감마저 느낄 수 있다. 원시 조형물에 깃든 초현실적 에너지, 자연의 생명력을 숭배하는 토템과 같이 이 부조 작품은 샤머니즘적 느낌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손가락으로 종이 곤죽을 빚은 결이 표면에 미세하게 남아있으며 작가의 손놀림은 그대로 표면 질감이 된다. 종이 콜라주 작품이 평면 위에 종이를 붙여 부조적 표면을 만들어냈듯이 이 작품은 한걸음 더 나아가 종이 부조의 완전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로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흐르는 듯한 형상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요동하는 형상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 생명력에서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종이의 재료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
<구상>, 연도미상, 15x22x10cm, 세라믹
20세기 조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미완성에 가까운 형상을 통해 완결성보다는 열림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 비형상 혹은 무형상을 추구하는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은 울퉁불퉁한 모양에서 나오는 곡선의 흐름을 통해 유동적인 형태를 추구했다. 이 작품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습을 추상화한 듯이 보여 ‘군상’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제목에 얽매이기보다는 형태와 재료의 물질성 자체에 주목하게끔 만든다. 흐르는 듯한 곡선은 일률적으로 흐르기 보다는 다양한 방향으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며 작품에 정중동의 운동성을 부여하며 시각적인 쾌감을 만들어낸다. 마치 여러 명의 사람이 엉켜있는 군상과의 관련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련되고 굳어있는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연이 가진 흐르는 곡선을 본떴다는 점에서 유기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흙을 주무르고 빚은 손가락의 움직임과 촉각적 느낌을 그대로 살리며 세라믹으로 구워내 흙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진득거리는 질감이 세라믹의 재질로 변하면서 두 재료의 특징이 함께 드러나고 있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어떤 형상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과 눈으로 형태를 찾아가는 작가의 미학적 모험이 대담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돌덩어리에 갑골문 형상의 글자를 새긴 작품으로 고대의 갑골문 비석을 연상시킨다. 최소의 가공만이 가해진 거의 자연 상태의 돌 조각을 오브제처럼 사용하고 있으며 자유로운 획으로 한자를 추상화처럼 풀어내어 마치 그림문자처럼 표면에 새겼다. 문자를 구성하는 선은 행초서를 현대적 활용한 이응노의 서체적 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응노는 고대 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형상과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문자추상을 창작했다. 비문의 갑골문을 회화가 아닌 입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문자추상의 입체적 변형으로 볼 수 있으며, 회화의 평면적 한계를 넘어서 돌이라는 물질적 실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비석의 풍화된 표면, 그림문자와 유사한 한문의 조형성이 돌 위의 ‘콤포지션’으로 나타난다. 돌의 비스듬한 형태를 프레임이라고 보고 문자를 내용이라 본다면 형식과 내용 모두 정형성을 벗어나 형식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미감이 느껴진다. 단순한 돌 조각을 우아한 추상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가의 감각에서 비범함이 느껴진다.
이응노는 1960~1980년대에 걸쳐 나무를 재료로 다수의 환조, 부조 작품을 남겼다. 잘려진 나무토막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나뭇결을 두드러지게 강조해 시각적 리듬을 만들고, 최소한의 가공으로 목재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며 작품에 응용했다.‘마천루’라는 제목은 잘게 자른 나무 조각들이 빌딩숲처럼 빽빽이 들어차있는 이미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종이 콜라주의 부조 표면처럼 보이는데 재료의 물성과 벌집과 같은 표면, 군데군데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1960년대 종이 콜라주와 유사하다. 나무를 마치 콜라주 작품의 종이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나무의 거친 질감, 균질하지 않는 형태와 높이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밀도높은 형상이 시각적 자극을 만들어내며 동시에 무질서한 앵포르멜적 양식을 구성한다. 콜라주의 종이가 종이의 까칠한 질감을 감각적으로 활용했듯이 이 작품에서는 나무의 쪼개진 단면이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