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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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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신기루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김성호는 그간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정교한 환영(illusion)의 기술을 통해서 ‘책(들)’을 초현실적 풍경으로 쌓아 올린 회화 작품들에 천착해 왔다. 〔볼륨 타워(Volume Tower)〕(2010~2014), 〔볼륨 빌(Volume Ville)〕(2010~2014), 〔테이블랜드(Tableland)〕(2014-2016)라는 제명의 작품들이 그것들이다. 나아가 LED 전구와 거울의 반영 효과를 도모한 조각적 설치 작품들인 <디코드-인코드(decode-encode)>(2010-2015), 〈미로(maze)〉(2010), <놀이(play)〉(2016)를 통해서 ‘책들’이 함유하는 의미 확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스멀스멀 자라나는 식물의 이미지로 환영(illusion)의 위장막을 만들어 ‘책들’을 뒤덮는 〔신기루(Mirage)〕(2016~현재) 시리즈에 천착해 오고 있다. ‘책’의 탐구를 통해서 비언어의 미술 언어를 다양하게 시각화하는 그의 작업이 일관되게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  


I. 허구의 씨줄/날줄로 구축한 ‘책들의 도시’

김성호의 책들은 도시를 만든다. 고원을 만들고, 탑을 만들고, 마을을 만든다. 그의 ‘책들의 도시’에서 책 한 권(卷)마다의 직육면체 볼륨(volume)은 도시를 구조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모듈(module)이다. 그것은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이며, 대지 위에 건물을 일으켜 세우는 벽돌이다. 때로는 알림판이기도 하고, 거대한 간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김성호의 책들은 ‘도시를 도시라고 말하는’ 지표(index)이자, 기호(sign)가 된다. 

작은 피규어(figure:인간・동물 형상의 모형 장난감)를 ‘책들의 도시’ 어딘가에 놓으면 책의 볼륨은 이제 벽돌이 아니라 아예 커다란 빌딩 또는 동물원이 되기도 한다. 비행기, 배, 자동차 같은 작은 미니어처(miniature) 장난감들 역시 ‘책들의 도시’ 어딘가에 있게 되면, 책들을 마천루로 만든다. 그렇다. 김성호의 책들은 ‘도시를 현대문명으로 번안하는’ 상징(symbol)이다. 

김성호는 책들을 작품의 주제와 소재로 끌어 와서 ‘책이 만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재현’(representation)과 ‘클로즈업’(closeup) 그리고 ‘반복성’(repeatability)은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조형 언어이다. 보라! 그의 작품에서 실재를 모방하는 ‘재현’이란 실재와 처절하게 ‘다른’ 허구의 세계를 낳는다. 실재의 크기를 왜곡하고 변주하는 ‘클로즈업’은 어떠한가? 그것은 현실과 ‘다른’ 망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편집증(paranoia)적 비현실의 세계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반복성’은 그의 작품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위와 아래, 안과 밖을 뒤섞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의 세계를 낳는다.

생각해보라! 편집증이나 정신분열증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지각, 그로 인해 비현실과의 차별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이성과 논리의 총체적인 손상을 초래하는 질병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서 그러했듯이, 예술의 영역에서 이것은 질병이기보다 상투적이고 관성화된 것들을 깨치고 나가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원동력이 되기에 족하다. 책 볼륨의 대지 위에 화분을 가꾸거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피규어와 미니어처에 생명력을 입히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에게서 책은 이제 더 이상 가독성을 전제로 한 유의미한 텍스트들의 논리적 나열과 그것의 조합체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책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한 덩어리 사물로 인식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얼굴을 지우고, 피부를 벗겨내어 종국에 살점 덩어리들만이 남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인간 탐구처럼 극단적이다. 책의 각 표정들을 지우고 책 속의 텍스트들을 씻겨 내어 종국에 종이의 질료들만을 남기거나 볼륨의 형식만을 남기는 사물 탐구가 여전히 실행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II. 신기루로 해체되는 ‘책들의 도시’

김성호에게서 예술적 정신분열증의 세계는 ‘책들의 도시’를 자라나는 식물의 이미지로 가득히 채우고 뒤덮는 최근작 〔신기루(Mirage)〕 시리즈에서 효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는 그의 주요한 조형 언어적 특성인 ‘반복성’을 두드러지게 발현시킴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비현실과 탈현실의 세계를 창출한다. 쌓인 책들의 표면을 뒤덮는 식물 이미지들은 ‘책들의 도시’를 유적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책들의 세계를 신비한 과거로 되돌린다. 그것은 마치 고대 문자가 당대에 소통이 가능한 텍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부 해독되지 못한 채 여러 해석의 버전으로 남겨진 것과 유사하다. 

김성호는 자신의 최근작 〔신기루(Mirage)〕 시리즈를 “회화의 환영성(illusion)을 통해 세계를 재편(再編)하는 작업”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 그의 최근작은 환영의 조형 언어로 기존의 세계를 해체하거나 재배열한다. 여기에 우리가 곱씹어야 할 유의미한 함의(含意)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소실점과 원근 투시도법의 원리가 작동하는 ‘구축적 환영’의 세계 위에, 꿈틀대는 ‘표현주의적 붓질’을 통해 ‘해체적 환영’을 다시 뒤덮는 것이 그것이다. 달리 말해 구조주의의 세계를 봉인하거나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탈구조주의의 세계를 여는 것이다.     

김성호의 〔신기루(Mirage)〕 시리즈는 모호하고 몽롱하다. 신기루는 과학적인 정의로 “대기 속에서 빛의 굴절 현상에 의하여 공중이나 땅 위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이것은 “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일이나 현상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현실의 세계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현현하는 존재이자, 비현실의 세계에서 늘 변신을 꾀하는 마술적 상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기루의 존재론적 특성은 김성호의 작업 도처에 자리한다. 개체와 개체, 개체와 배경을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로 뒤섞인 식물 군집체들의 형상들뿐만 아니라, 붓을 운위(繧儰)하고 LED조명을 설치하는 조형 방식에서도 그것은 발견된다. 보라! 책들을 식물 이미지들로 가득 덮어 나가는 마술과 같은 환영은 물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그의 필법으로 인해서 작품 속 시공간을 야생의 무엇처럼 만든다. 그의 작품은 일견 인간의 가꿈과 돌보기가 전혀 없는 상태의 ‘자연 생태적 식물 군집체’로 가득한 비무장지대(DMZ)의 공간처럼 보이게 만든다. 보라! 비무장지대 혹은 신기루처럼 인간의 가꿈과 돌보기가 통제된 방임의 시간이 지속되는 자연 생태 혹은 원시적 생태계에는 ‘새로운 것들(new things)’과 ‘다른 것들(different things)’로 가득하다. 그것은 이질성(heterogeneous, hétérogénéité)으로 가득한 세계 그 자체이다.   


III. 빼기로서의 리좀(rhizome)과 미끄러지는 신기루 

김성호가 그리는 신기루의 세계는 늘 새로운 변화들로 가득한 리좀(rhizome)의 세계와 닮아 있다. 리좀은 잡초 또는 그것의 일종인 바랭이처럼 뿌리 같은 형태로 변형된 복수의 줄기들을 가진 ‘뿌리 없는 식물’ 혹은 가짜 뿌리를 가진 근경식물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간파하고 있듯이, 뿌리에 본질을 두고 계통과 족보를 중시하는 위계적 체계를 지니는 수목(樹木, arbor, arbres-racines, ) 모델과 달리 리좀은 땅 속에서 복수성의 변형 줄기를 통해서 계통과 족보를 반대하는 반계통학(反系統學)을 실현한다. 

이 부분이 바로 〔신기루(Mirage)〕로 대표되는 김성호의 최근작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즉, 김성호의 ‘신기루’는 들뢰즈가 리좀을 분석하는 ‘연결과 이질성( connection and heterogeneous, connexion et d'hétérogénéité)의 원리’처럼, 항상 다른 것과 연결되고 만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복수성(multiplicity, multiplicité)의 존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리좀의 복수성이란 하나의 우월한 어떤 존재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한 n+1의 복수체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월한 어떤 존재를 없앰으로써 가능한 n-1로서의 복수성이라는 차원이다. 이처럼 김성호의 〔신기루(Mirage)〕 역시 변화로 가득한 복수성의 존재이되 기존의 것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빼기를 시도하는 존재이다. 

김성호는 작업노트에서 자신의 작업 〔신기루(Mirage)〕가 “세계를 구성하는 일반적 요소들을 개인적 사물들로 치환해 통념에서 유리(遊離)하는 과정이자, 그 목적과 무관하게 재배열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것을 그는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헤테로피아(heterotopia, hetero와 utopia의 합성어)적 공간 개념’으로 비유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구조를 해체하고 일련의 질서를 지닌 공간으로 재배열하는 장소 전위 혹은 이소성(異所性)의 전략을 통해서, 그의 말대로 “기존의 구조들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부조리들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노력”을 꾀한 것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그의 작업 〔신기루(Mirage)〕에서 기존의 자연을 통제 가능한 정원들로 묘사하고, 인간을 장난감으로 치환하고, 진리를 단순한 표지판으로 연결하는 등으로 표현된 일련의 ‘빼기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최근 작업은 ‘빼기로서의 리좀’ 또는 ‘미끄러지는 신기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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