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7-02-08 ~ 2017-02-14
김유란
무료
+82.2.737.4678
1. 전시개요
■ 전 시 명: '다시보기' 2017년 상반기 기획공모전 김유란 ‘하고 싶은 말’展
■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갤러리 도스
■ 전시기간: 2016. 2. 8 (수) ~ 2017. 2. 14 (화)
2. 전시내용
갤러리 도스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자 일 년에 상반기, 하반기 두 번의 공모전을 기획하고 있다. 공모전에는 매번 새로운 주제가 정해지게 되며, 같은 주제를 가지고 각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세계로 참신하게 풀어내는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2017년 1, 2월 상반기는 ‘다시보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정빈, 권다예, 최옥영, 이형린, 장인희, 김유란 총 6명의 작가를 선정하였으며 2016년 12월 28일~ 2017년 2월 18일까지 각 작가의 개인전이 연이어 릴레이 형식으로 펼쳐지게 된다.
말과 말 사이에서 -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유란의 ‘하고 싶은 말’전은 하지 못한 말에 얽힌 이야기이다. 개념미술이 아닌 한 그림은 말이 없다. 만화처럼 말풍선이 달려 있으면 편하겠지만, 만화는 그러한 해결책 때문에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말풍선에 의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그림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훌륭한 화가의 자질일 것이다. 사실은 모든 작품 발표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공공영역에서 하는 것이니 만큼, 이러한 전시제목은 동어반복적일 수 있다. 그것은 작품이 일종의 조형언어라는 것일 뿐 아니라, 작가는 전시를 기회로 직접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출발로 해서, 수많은 제도 속에서 말을 매개로 한 소통의 출발점일 뿐이다. 작품에 대한 말은 잘해도 못해도, 심지어는 작품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는 순간조차도 뭔가 불편한 것으로 남는다. 특히 맨 마지막 문제는 그렇게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왜 힘들게 그림으로 그리나 하는 의문을 낳을 수 있다.
말은 최선의 경우에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근접할 수 있을 뿐이지 일치될 수 없다. 단적으로 아직 우주나 생명의 비밀이 아직 안 풀려진 것은 그러한 불일치에서부터 온다. 말과 사물의 거리에 대한 얼마나 많은 철학적 논구와 예술적 성찰이 이루어져 왔는가. 재현이나 표현의 문제는 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또는 확장하고자)하는 추세는 말과 사물의 괴리가 인식되기 시작한 근대이후 문예사조의 중심문제였다. 작품을 그자체로 봐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관객들은 끝없이 물어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요?’,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가요?’ 라고. 김유란의 작품은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말을 준비해야 할 추상미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촘촘한 재현주의에 충실한 작품도 아니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동어 반복이 아니라면, 말에 대한 말을 주제로 하는 메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시부제에 묶여진 작품들은 작가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말에 대한 관심은 유년시절 가족 이외의 사람과는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정확한 병명까지도 말해주었는데, 그러한 명칭이 있다는 것은 나름의 안도감을 준다. 명명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은 해결방법이 있음을 암시한다. 말에 대한 어려움은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기 보다는 보편적인 문제이다. 말이란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이며 사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징적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고, 이 우주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다.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국어 외에도 이후에 제 2의, 3의...로 계속되는 지배적인 언어의 취득이 요구된다. 작가의 유학생활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말은 소통의 도구이지만 이 도구가 다시 인간을 옭죌 수 있다. 말의 양면성은 세계를 특징짓는 수많은 역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김유란은 스스로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말에 관련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그림은 말 그대로 소통과 치유였다. 말로 안 되는 것은 그림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화면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었을 때 같은 문제가 회귀한다. 작품에 대한 말은 물론, 작품 자체가 말인데 그 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또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며 이러한 과정은 삶이 이어지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한,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좀 더 강도 높은 대면, 거의 대결이라 해야 할 상황이 펼쳐진다. 이 대결은 매번 ‘영도(零度)’(롤랑 바르트)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즐겁고도 괴로운 게임이다. 그림은 치유이지만 또 다른 병의 원인도 될 수 있다. 자연이나 타자와의 만남은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유란의 작품에는 이러한 조우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그것들은 조우 그 자체라기보다는 조우 이후에 대한 기억과 반성, 즉 추체험이다.
자유로운 붓 터치로 바람결에 날리는 향긋한 풀내음이 날 것 같은 작품 [서서히 사라진 기억]은 도시 속 공원에서 행복하게 놀았던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행복했던 순간은 매우 짧지만 기억은 길다. 작품은 그러한 기억을 다시 연장하는 기회가 된다. 자연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지나갔기 때문에 또한 슬프다. 그림을 포함한 언어는 이제 없는 것을 말한다. 작품 속의 도상들은 이미 멜랑콜리의 기운이 있다. 화면 중간쯤에 잘린 나무둥치는 다른 이미지들보다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비록 완전히 죽지 않고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고 있지만, 그나마 가을 잎새처럼 누런 잎이 생기고 있다. 원초적 자연이라고 할 수 없기에 위험하지 않은 공원의 숲은 놀이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이 또한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숨은 그림처럼 풀숲에 거려져 있는 인간의 실루엣은 마치 땅으로 돌아간 인물처럼, 또는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작가로 추측되는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또 다른 푸릇한 숲 그림에서도 인체는 등장하지만 손과 발 등 부분들로 나타난다. 기억의 잔상인 숲은 더욱 거칠게 그려졌다. 자연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넉넉한 무대가 되지만 인간들과의 만남은 그렇지만은 않다. 작품 [몇 마디 대화 후…]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남자가 등장한다. 무엇의 예술인 그림 속 남자는 몸짓이라는 무언의 언어를 날린다.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거대한 손은 방어적이며, 그러한 행위가 일어난 동안의 침묵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이 말이라면 손 또한 그렇다. 손과 두뇌는 같이 발전한다. 그래서인지 손과 눈을 바로 연결하는 미술은 인지기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유용한 도구로 간주되기도 한다. 수화라는 손의 언어도 있지만, 손과 언어의 관계는 보다 근본적이다, 가령 ‘말을 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언급은 노동하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된 이유를 철학적으로 조명한다.
김유란의 작품에서 손은 상대와의 어색한 상황도 표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득 들고 있는 만족스러움도 표현한다. 커피 잔을 가득 들고 있는 작품은 다른 부분에 비해 손이 강조되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반바지 입은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 [춥게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역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강조하는 화법을 유지한다. 자세한 묘사가 말에 해당되는 부분이라면, 붓질이 드러나는 거친 표현은 침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 자세히 그리지 않는 김유란의 작품에서 침묵은 말만큼이나 중요하다. 작품 [나와 너]는 작가가 목격한 두 유모차의 만남에서 시작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의 두 아이는 잠깐의 우연한 만남 동안 그들만의 소통을 한다. 유모차 끌고 있는 어른들은 모노톤으로 처리되어 있는 반면 아이들은 초록빛 융단이 깔린 듯한 바닥, 그리고 잡다한 배경을 지워버린 검정색으로 돋보이게 하여 우연한 만남을 극적인 사건처럼 표현했다.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들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 [우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어]에서도 드러난다. 남자는 아이의 키 높이에 맞춰 다리를 구부리고 마주하며 둘 다 팔을 뻗어 적극적인 신체언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서로의 표정이 전혀 안 읽히게 표현되어 있음으로 인해 그 둘이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는 의문에 붙여진다. 작품 [말하지 않되 말하고 있는]은 오른 편의 앉아있는 개와 왼편의 서있는 사람을 마주하도록 배치했다. 작품 속 인간은 동물과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지만, 인간이나 개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김유란이 소통의 대상으로 삼는 타자는 아이와 동물, 자연과 사물 등 광범위하다.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필요하다. 작품 [눈사람, 그날의 기억]에서는 눈사람을 만드는 엄마와 아이보다는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이 더 눈에 들어온다. 대상은 인간을 대신하여 말한다. 김유란의 ‘하고 싶은 말’은 소박한 희망사항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말/침묵에 관한 깊은 의미의 층을 건드린다.
말은 문학 뿐 아니라 현대철학의 주요한 주제였다. 그에 관련된 대표적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사실들은 정의될 수 없다. 이 철학자는 언어를 엄격한 사유의 중심에 두었지만, 언어 만능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논리 철학 논고]에서 대상(사물, 존재물)이라는 낱말이 고유개념어로 쓰이는 곳에서는 언제나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지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된다. 사물들의 선천적인 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집이다’라고 말할 때, 무엇이 ‘이것’인가를 묻는다. 삶의 규칙들이 비유의 옷으로 포장되지만, 이 비유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서술하는데 봉사할 수 있을 뿐, 근거 짓는 데는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과 사물의 지시 관계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 멀찌기 벌어져 있다. 말과 사물의 간극에 관련된 사유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이에 대한 미셀 푸코의 해석 등으로 풍부하게 제시된 바 있다. 이 간극 때문에 지시된 사물은 미지의 것이 된다. [논리 철학 논고]에서는 보여 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는 논제가 나온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의 영역이 작가들에게는 예술적 영감의 광대한 영역이 된다. 특히 관습적인 언어방식을 해체하고, 그 해체의 파편들과 간극에서 작업하고자 했던 현대 예술가들이 사물들에서 발견한 것은 이성의 동일성을 비켜가는 타자의 언어들, 즉 침묵이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제 3자가 듣기 마련이며, 그 제 3자가 바로 침묵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침묵은 오늘날 아무런 효용도 없는 현상이다. 그에 의하면 침묵은 사물들 속에 들어있는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강화시켜 주고 사물들이 이용당함으로서 입게 되는 손상을 완화시켜 준다. 피카르트는 사물의 존재성이 침묵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침묵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침묵 대신에 판을 치는 것은 공허한 말들과 소음들이다. 피카르트는 과학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인간과 대상간의 진정한 만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술은 과학과 기술이 다 충족시키지 못하는 간극을 주목해 왔다. [침묵의 세계]는 인간이 대상에 이르기 전에 대상은 미리 장악되고 그리하여 대상은 하나의 과학적 결과를 제시할 뿐이라고 하면서, 과학적 세계 속의 인간은 침묵하는 실체를 갖지 못하고 매순간마다 그 앞에 제공되는 지나치게 많은 사물들로 인해 압박을 받는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너무도 많은 사물들에 부딪히기에 인간의 영혼에는 이젠 어떤 침묵하는 평안도 없고 다만 침묵하는 불안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김유란의 작품 [몇 마디 대화후…]는 그러한 불편한 침묵을 표현한다. 또한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자세히 그리지 않은 부분 역시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피카르트는 과학의 비유를 들었지만, 그것의 응용영역인 기술은 그러한 모순을 증폭시킨다. 현대인은 새로운 기술적 관계망을 통해 더 많이 소통하지만 소통에 더 목말라한다. 그림이라는 무언의 언어는 원활하지 않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는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머리와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수많은 상념들을 이성의 빛 아래 한 줄로 세우기를 권하는 시대에 회화라는 동시적인 언어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작가는 끊임없이 그 영역을 지키고자 한다.
<‘다시보기’ 기획의도>
일반적으로 다시보기란 지나간 영상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찾아서 보기위한 서비스를 뜻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접하기란 힘든 일이다. 본방을 사수하지 못한 그들은 시청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찾아 ‘다시보기’의 기능을 이용하여 시청하기도 한다. 보통은 인기가 많고 화제가 되는 컨텐츠가 인터넷과 SNS등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보여 진다. 여기서 무언가를 시간을 들여 다시 본다는 것은 제때 시청하지 못했을 때의 궁금함, 즉 대중의 호기심을 대변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라도 다시 보기의 결과는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보기’는 어떤 대상을 다르게 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언가를 다시 본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과거를 추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일상에서 잊혀 지기 쉬운 감성을 일깨워주며 자의식을 자극한다. ‘다시보기’라는 말은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의 평범한 대상들에게 다시금 집중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다시보기’라는 공모주제는 예술이 가진 본연의 역할을 대변하는 단어이며, 대중과의 공감을 위한 첫머리이기도 하다. 갤러리 도스는 이번 공모전을 통해 공감을 바탕으로 관람객과 작가 간의 다양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예술에 대한 해석은 관람객에게 열려있으며 이번 전시가 일상의 관성에 무뎌진 감성을 다시금 떠올리고 참신한 자극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서정빈, 권다예, 최옥영, 이형린, 장인희, 김유란 6명의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과물들은 관람객들에게 현실의 ‘다시보기’의 기능을 선사할 것이다.
_우린 서로 다른 말을 하고있어_, 캔버스에 유채, 113×145(cm), 2013
바다, 그 날의 풍경, 캔버스에 유채, 120×150(cm), 2015
3. 작가노트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 물결 속과 같다. 불규칙적이고 예측가능 하지 않기에 어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기쁨과 아쉬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하루하루 알게모르게 자라나는 식물의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번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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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과 변화, 축적되는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는 우리가 관계맺는 모든 관계에 대한 믿음과 닮아있다.
추억이 뒤죽박죽 되었네, 캔버스에 유채, 91×116.8(cm), 2016
생각은 마음을 가리는 그림자, 캔버스에 유채, 80.3×116.8(cm), 2016
4. 작가약력
2015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전공 졸업
2012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전공 졸업
개인전
2017 하고 싶은 말, 갤러리 도스, 서울
그룹전
2016 2016 제주아트페어, 제주
2015 Art in London Work in Seoul 15X15, space bm, 서울
2014 Art in London Work in Seoul 14X14, Salon de H, 서울
2013 감정의 늪,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Expert Class, 경재정선기념관, 서울
틀을깨다, 경재정선기념관, 서울
2012 MULLTIPLAY, 성북구립미술관 분관, 서울
2009 합병증-과잉 혹은 결핍, DIO ART CENTER, 인천
버거운 마음, 캔버스에 유채, 89.4×15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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