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집시의 자화상
― 심선희 근작전
김복영 / 미술평론가⋅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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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 집시gypsy라 하면 의당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를 떠올린다. 그림의 무대는 시간으로 해가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짙게 드린 산등성이의 저녁이다. 삶에 지친 집시 여인이 만도린을 옆에 놓고 깊은 잠에 들었는데, 먹이를 찾는 큰 몸집의 사자가 집시의 몸 냄새를 맡고 다가와 응시하는 장면을 다루었다. 그의 <꿈> 또한 이와 유사한 장면을 그렸다. 집시 대신 왜소한 나신의 여인이 숲을 소파로 해서 누웠는데 숲 아래선 음산한 뱀이 몸체를 이동하고 어디선가 갈대 피리소리가 홀연히 들려오는 원시 목가牧歌풍의 그림이다.
루소는 그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다갈색의 머리칼에 도미나 잉어과의 물고기처럼 정처 없이 유영하고 배회하는 보헤미안의 천성을 타고났다. 전직 세관원을 퇴직하자 이내 몰입한 게 그림이었다. 그림이야 말로 그가 삶의 자유를 지탱해주는 최선의 안식처였다. 배운 적도 없는 그림임에도 천성만으로 오직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선택했다. 그가 제작한 그림은 즉시 미술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알아본 건 당시 살롱을 풍미했던 앵그르계의 작가들이 아니라, 가난한 노부부와 광대를 그리던 ‘청색시대’ 피카소의 주변 작가들이었다. 이들이야 말로 경직된 당시 살롱풍을 뒤로하고 고갱이 그처럼 먼 곳(타이티) 까지 찾아가야 했던 청정 감성파들이었다. 그들은 루소의 그림에 즉각 전율과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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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심선희의 근작전에 즈음해서 루소를 먼저 말하는 건 이 두 사람이 교묘하게 감성적 쌍을 이룬다는 데 있다. 그녀는 루소가 그랬던 것처럼, 상상의 집시가 되어 세계를 누비면서 여러 곳의 풍물을 청정한 감성으로 그렸고 그림 그리는 동기나 방식에 있어서 동류의 삶을 갖고 있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그러나 루소와 달리 미대를 나온 전업화가가 할 수 있는, 가난한 집시가 아니라 화려한 집시의 그림이다. 꾸밈없는 보헤미아니즘의 시선으로 일격을 가하듯이 풍요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 시대의 세상사를 그려낸다. 그녀의 그림은 물질문명의 극을 달리는 21세기 시대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루소가 그랬듯이, 그녀 또한 유년 시절부터 환상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성년이 되어 정처 없이 세계를 유랑하면서, 자신의 꿈꾸는 집시 여행에서 조우했던 사람들의 고독과 풍요한 삶의 이면을 묘사한다. ‘언젠가 스케치 여행으로 어머니와 둘이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들렸는데 거기서 만난 순수한 집시 가족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노트」 2015)고 말하는 데서 타고난 집시 기질이 묻어난다.
근작들은 크게 3가지 부류의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백야의 나라 모스크바와 생패터르스부르크 에르미따쥬 미술관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만난 것들을 소재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핀란드 헬싱키를 향한 기차 시벨리우스호를 타고 가다 본 자작나무 숲과 호수를 지나 노르웨이 피요르드에 이르는 보랏빛 환상과 동화의 나라 덴마크의 인어공주를 만나기까지의 체험적 주제를 다룬다. 여기에다 북유럽⋅서유럽⋅캐나다⋅미주⋅동남아⋅남태평양이 자신에게 각인시킨 소재들을 크로스오버한다. 마지막은 작가가 그토록 좋아하는 도시의 음악여행을 다룬 주제들이다. 이것들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샹송,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명성황후, 수위니 토드 등 팝페라와 혼성테너 음악콘서트에서 얻은 영감을 회화적으로 번안한, 이를테면 음악과 회화를 교감시킨 작품들이다.
뮤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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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의 집시 여행에서 얻은 소재를 다룬 작품들은 주로 화려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프리마돈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첼리스트, 하얀 피아노와 흰옷의 피아니스트와 흰의상의 성악가, 검은 피아노와 검은 의상의 피아니스트와 검은 의상의 성악가를 동급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다 배경으로는 꽃마차, 꽃사슴, 에펠탑, 화려한 돔의 폐르샤풍 궁전, 이름모를 꽃과 고기, 고급와인 테이블, 꽃무늬 의상, 화려한 침실과 카펫 같은 환상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경을 다룬다. 청색조와 적색조의 순도 높은 화려가 눈길을 끈다. 프리마돈나와 첼리스트. 피아니스트의 주인공들이 꽃무늬가 요란한 의상을 걸치고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화려한 여행복과 테가 큰 요란한 모자를 착용한 큰 눈을 가진 이국 여인들이 이들과 어울린다. 진시황제가 거느렸던 궁중 여인들과 전성기의 로마 황제의 여인들이 21세기의 분장을 걸치고 다시 등장한 것 같다.
근작들은 이전의 ‘환상의 뮤직드림’을 다루던 시절을 전후해서 제작한 작품들 보다 한층 화려한 색채와 순도를 더한 컴포지션을 구사한다. 대다수의 작품이 청색조라면 삼분의 일 정도가 적색조다. 어느 작품일지라도 청적靑赤의 색상대비와 중간톤의 청자靑紫와 적자赤紫 의 색상대비가 근간을 이룬다. 이보다 더는 밝은 톤과 어둔 톤의 명도대비가 화면의 뼈대를 구축한다. 작품들은 작가 자신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오데트와 지그프리드왕자로 상징되는 북구 요정의 이야기를 현대버전으로 전치하는 맥락을 보여준다.
이를 내용의 기조로, 자신이 집시가 되어 다스리는 세상을 드라마풍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를 회화적으로 번안하기 위해 화면의 전경은 연극 무대에서처럼 주인공이 자리하고, 중경과 원경은 차례로 조연들과 배경을 설정한다. 전경의 주인공은 클로즈업과 클로즈다운을 살려 영화의 스크린 기법으로 구성했다. 인물들과 소재들을 전중후로 서열하는가 하면, 상공에서 보는 부감시(over-looking-view)를 원용하고, 화면을 좌우로 나누는 균형구성을 구사했다. 일견 샤갈이 만년에 떠나온 눈 내리는 고향을 회상했던 선례를 상기시키면서도 이를 과감하게 그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데 성공한다. 그럼으로써, 근작들은 생애의 후기를 맞는 작가가 자신이 걸어온 삶을 순연한 집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삶의 무한한 기쁨과 감사를 랩소디(rhapsody)로 번안한 화풍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작가가 작품에 등장시키고 있는 주인공들은 돌이켜 보면 모두가 그 자신의 자화상이다. 이들은 그 스스로가 마음에 묻어둔 젊은 날의 초상이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옛 모습을 상상공간으로 불러들여 그 자신의 ‘아니마’(anima)를 그리는 자화상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아니마는 청순한 요정의 모습으로, 결코 어둡거나 노쇠하지 않다. 아주 젊은 아니마들이다. 그녀는 이들을 현재로 불러냄으로써 우리 시대의 이미지를 생산함은 물론, 대중들이 이를 감상하고 소비할 기회를 마련한다. 아니 적어도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회현실을 간접적으로 풍자한다. 이것 만으로도 그녀의 근작전은 우리의 구상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리라 확신한다.
201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