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좌의 옻칠회화, 통영의 자연미를 담은 서정시
글_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ㆍ미술사 박사)
망중한
망중한(忙中閑), 너무나 ‘바쁜 가운데에 만나는 한가로움’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쁘다. 바쁠수록 쉬어가라는 말도 있듯, 아무리 바쁘다 해도 짬을 내어 쉬어갈 때 비로소 일의 능률도 오르는 법이다. 김정좌 작가의 같은 제목 <망중한> 작품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두 마리의 황소가 연인이나 부부 이상의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거나, 마치 둥그런 언덕처럼 가로 누운 황소 한 마리 모습에서도 더없이 넉넉하고 편안함이 풍겨 나온다.
이 <망중한>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배불리 먹고 나서 배를 두드린다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이란 옛말이 떠오른다. 또한 ‘등 따습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행복의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는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풍족한 즐거움, 아무 걱정 없는 태평성대(太平聖代)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김정좌 작가는 그런 평범하지만 진정어린 희망을 황소 그림에 담았다. 황소의 눈빛이 따뜻한 정감이 넘치고, 그 자태에서 친숙한 나와 가족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 역시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겠다.
통영과 동백
김정좌의 <망중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서 살까? 그토록 평화롭고 행복한 햇살이 가득한 곳…. 김 작가는 역시 그림을 통해 ‘통영’이라 답한다. 실제로 ‘통영항’이 등장하는 작품 속의 모습들도 한가롭기 그지없다. 마치 배를 깔고 누운 황소처럼, 세상의 온갖 고뇌들은 물결에 씻겨 평온함만 남은 듯하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마음에 고향의 정감을 그리라 하면 이와 같지 않을까. 적당한 높이로 중첩된 산등성이와 어깨를 서로 촘촘히 맞댄 집들, 바람 자는 물결에 몸을 맡긴 배들의 모습들에서도 여지없이 행복의 기운이 넘친다.
그런데 정작 ‘행복의 세레나데’를 전할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바로 동백꽃이다. 김정좌 작가의 동백그림은 크게 동백을 점점이 흩뿌린 듯 연출한 숲 모습과 꽃송이를 크게 클로즈업한 ‘환희’란 제목의 작품이 있다. 동백(冬柏)이란 이름은 ‘겨울에도 능히 아름다운 꽃을 피워 홀로 봄빛을 자랑하는’ 데에서 연유했다. 또한 동백꽃은 ‘향기가 없는 대신 그 빛으로 새를 불러 꿀을 제공’한다 해서 조매화(鳥媒花)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새마저도 홀려내는 동백 빛깔의 아름다움과 통영의 햇살이야말로 김정좌 그림을 빛내는 자양분이 아닐까.
옻칠회화
황소, 항구, 풍경, 동백, 폭포, 학…. 김정좌의 그림에는 매우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앞서 말한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행복한 일상의 소중함’과 하나같이 모두 ‘옻칠회화’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옻칠의 깊은 맛과 멋스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을 더욱 발한다하여 ‘천년옻칠’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특히 통영지역은 옻칠한 제품에 자개조각을 다양한 모양새로 붙여 장식하는 ‘나전칠기(螺鈿漆器)’로 유명하다. 통영의 전복ㆍ소라ㆍ조개껍데기의 모양과 색이 워낙 화려하고 고급스럽기도 하다.
김정좌 작가는 고향이기도 한 통영지역 특유의 가치들을 그대로 작품 속에 옮겨내고 싶어 한다. 통영의 아름다운 자연을 작품에 제대로 담고 싶은 ‘본능적인 열정과 욕구’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학교 공예과에서 건칠을 전공한 이력은 그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2000년에 접어들어 지속적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연구한 결과, 옻칠이 지닌 회화적 느낌표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본인만의 독창적인 ‘옻칠회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통영 나전칠기 토대위에 다양한 재료들(자개ㆍ계란껍데기ㆍ두부ㆍ금박ㆍ금분ㆍ은박ㆍ은분…)이 합쳐져 특유의 광택미와 장식미는 물론 보존성과 향균 효과까지 곁들인 작품이 탄생했다.
관념초상
김정좌 작품의 이색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일부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관념성’이다. 전통회화 장르의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에서나 등장할 법한 학(鶴)이나 폭포 소재의 그림은 무척 인상적이다. 자개와 계란껍질 등을 이용한 섬세한 표현은 매우 정적이면서도 함축적인 면모를 과시한다. 마치 수행자나 도인(道人)이 살 법한 그림 속 장면에선 작가적 인내와 고뇌가 엿보인다. 한 점의 작품을 얻어내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감내하는 과정이야말로 수도자의 삶과 다름없을 것이다.
김정좌의 옻칠회화 제작과정은 매우 까다롭고 난해하다. 동시에 신중함을 요한다. 나무판은 사계절 기후 습성에 따라 계속 뒤틀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앞뒤에 여러 번 거치는 보강작업은 최소 50회 이상을 반복하게 된다. 물론 바탕화면의 평탄작업 이외에도 초칠ㆍ중칠ㆍ상칠 등과 그 사이사이 회화적 표현이 가미되어야만 비로소 한 점이 태어난다. 아마도 김 작가가 단순히 그림 그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지금의 작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어쩌면 ‘통영이 지닌 미감 자체를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남다른 의지가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김정좌의 그림을 보면 고향의 정감이 그렇게 물씬 느껴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