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적 그리기
- 이경미의 ‘우주’ 속에서
윤동희 / 영상커뮤니케이션, 북노마드 대표
우주는 인간을 매료시킨다. 인간은 늘 우주를 동경해왔다. 어느 연대기를 살았는지, 어느 위도와 경도에 거주했는지, 어떤 문화적 환경을 영위했는지에 관계없이 인간은 우주를 꿈꾸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시대에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진 후에도, 달에 첫 발을 내딛었던 1969년 7월 20일에도, 행성과 소행성에 탐사선을 너끈히 착륙시키는 지금까지도…… 인간이 우주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독하는 정도에 따라 한 시대가 마감되고, 다음 시대가 열렸다. 우주는 그 자체로 담론을 생산한다. 인간의 구술성은 우주에서 나온다. 이것은 우주의 이야기다.
오래 전 지구에 뿌려졌으나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죽음을 치렀던 작가의 연대기를 돌아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태어난 고양이 ‘나나’를 작가는 필사적으로 지켰다. 사라짐 혹은 상실을 일찍 배워버린 작가는 무의식의 풍경으로 유년시절을 기억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곳’과 아버지가 고꾸라진 세상의 ‘저곳’을 한 화면에 포개었다. 어머니라는 상상계와 아버지라는 상징계, 현실의 공간과 비현실의 이상향.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편집증적으로 채웠다. 저부조 형식의 입체 구조물을 지탱하는 사실적인 아름다움은 형식을 완성시켰고, 무의식을 상징하는 물[水]이 현실을 지우는 풍경은 내용을 완결 지었다. 누가 그랬던가. 좋은 결과물은 지독한 연애소설과 엄격한 과학이 위태롭게 결합할 때 나온다고. 자아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되 스스로 지시하는 세계를 편집증적으로 구현하는 이경미의 그림이 그러하다.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과거의 삶이 남겨준 재료들을 재배치하여 지금-여기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림. 한편에는 완벽한 ‘코즈모폴리턴’의 태도로, 다른 한편에는 ‘미개인’의 감각으로 그리는 그림. 이것은 이경미라는 개인의 이야기다.
이경미는 우주라는 특정한 세계에 작가의 특정한 정체성을 쏘아 올린다. 작가는 큐브 모양의 나무 패널 8면에 대기권과 지각을 결합한 우주를 그리는 작업으로 귀환했다. 8개의 화면은 인간의 운명을 지탱하는 연월일시(年月日時)라는 네 가지 기둥[四柱]을 간지(干支)로 정리한 팔자(八字)를 떠올리게 한다. 캘리포니아 주 마운틴 뷰에 위치한 구글플렉스에 걸려 있는 지도 화면 <리퀴드 갤럭시>도 8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되었다니 묘한 생각이 든다. 우주를 바라보는 일이 ‘천문’이라는 시간과 ‘풍수’라는 공간을 생각하는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우주를 정밀하게 파헤치는 서쪽의 과학과 천지인(天地人)을 숭상하는 동쪽의 뿌리는 결국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주를 통해 인간을 알겠다는 것이고, 우주와 인간 세계의 기본 요소이자 변화의 동인을 살피겠다는 것이다. 때마침 세상은 하늘의 이치[天文]를 인간의 운명의 이치[人文]로 전환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모두가 불안한 까닭이다.
이경미_<Solar System at the Moment>_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_55×55×7cm(each)_Installation view_2017
오래전, 부모와의 인연의 끈이 떨어져버린 작가는 지도를 몸에 지니지 않은 채 지구를 떠돌았다. 대신 그는 우주라는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로 인도하는 그림을 지도로 삼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지도를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갔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 하늘의 달과 별을 올려다보았다. 2세기경, 프롤레마이오스가 지도의 위쪽을 북극으로 잡기 위해 바라보았던 것은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꼼짝하지 않는 별(북극성)이었다. 불안한 호기심으로 지도를 품고 지구를 떠돌던 인간을 우주는 그렇게 지켜주었다. 부모와의 기억을 소거당한 채 문명을 유목하던 작가를 미술은 그렇게 지켜주었다.
시대는 달라졌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해 일상을 구성한다. 지도의 기능도 달라졌다. 과거의 지도가 이곳과 저곳의 공간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면 이제는 나의 현재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준거점이 되었다. 우주를 올려다보고 지도를 그리며 세상의 드넓음에 전율했던 인간은 자신만의 지도를 보유한 세상의 배꼽이 되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유추하는 것보다 나의 현재 위치가 중요한 시대, 나의 몸이 도달하지 않은 장소를 SNS의 풍경으로 소유하는 시대, 전 세계 지도와 건물 안팎을 즉각적으로,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에 쏙 들어가게 만드는 시대. 이런 시대에 이경미는 우주를 그린다. 구글 맵스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컴퓨터에 입력한 뒤, 거리 차원과 위성 차원에서 볼 수 있도록 렌더링하고 그 화상을 화소로 나눈 응용과학의 시대에 ‘고작’ 그림을 그린다.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건 ‘태도’가 아니던가. 당연히 이경미의 그림은 거대 기술기업의 테크놀로지와 다르다. 더 인간적이고, 더 감정적이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시차’(parallax)다. 별과의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비약이 심한 관측법을 내걸었다. 전시장 바닥에는 볍씨를 깔고, 서너 개의 망원경을 설치했다. 철저히 작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측하고, 알고 싶다는 욕망의 시스템을 구현했다. 생각해보면 우주는 늘 지구보다 과잉이거나 결핍으로 존재했다. 우주를 몸으로 겪을 수 없어서 인간은 지나치게 우주를 상상했고 그만큼 무력했다. 그 시차는 극복할 수 없었다. 시차와 비약. 그것이 예술의 힘이다. 오래전, 기술이 예술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 조건은 그것이었다. 시인이 ‘다른 말들을 찾아 헤매는’(신형철) 존재가 되었을 때, 그리는 자가 ‘다른 이미지들’을 찾아 헤맸을 때 예술은 기술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사실 세상에 다른 말과 다른 이미지는 없다. 다르게 보일 뿐이고, 다르게 쓰일 뿐이다. 그 다름은 대부분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데서 나온다. 위성 항법 장치가 제공하는 경로 계획보다, 실시간 교통 정보보다, 스마트폰에서 구글 맵스를 사용하여 좌표를 설정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 쓰임새가 부족한 붓과 물감을 어떤 이는 유용하게 탈바꿈시킨다. 기술은 눈앞의 삶을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는 자는 자신이 받은 예술적 인상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관객이 자신을 보게 만든다. 우주를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경미의 능력은 정확한 시선이나 개념의 정밀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보다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서로 다른 생활 세계의 경이로움을 믿으라고 권면한다. 지구의 시공간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작가의 기운(氣運)이 느껴지고, 현실의 한 부분을 잘라내어 분투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무위(無爲)가 전해진다. 그 깨달음의 순간에 ‘나’라는 존재는 흐릿해진다. 미술을 하는 자에게 자아는 거기까지로 족하다. 프로페셔널 아티스트는 나를 딛고 일어나 세계를 그린다. 아마추어는 자아에 빠져 제자리에서 동동거린다. 그러니 무엇이 그려졌는지를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리는 자가 고민한 세계를 보아야 한다. 그리는 자를 추동케 하는 충동을 느껴야 한다. 그 미술 ‘이전’의 마음을 직시할 때 미술은 새롭게 보인다. 작가의 삶 뒤에서 일어난 경이로움을 관객이 이해하는 지점에서 예술은 격발한다. 우리는 이경미의 우주 앞에서 지구를, 행성을, 그리고 푸른 우주를 상상하게 되었다. 세상의 극점을 떠올리고, 이름 없는 장소를 꿈꾸게 되었다. ‘이곳에 있기’와 ‘그곳에 있기’를 이미지로 연결하는 이경미의 작업이 머무는 동안 전시장은 우주와 지구 사이의 공동구역이 된다.
사실, 그리는 자가 무엇을 그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미술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지금 그리고 있다는 것, 아직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설령 꼬깃꼬깃 구겨지는 순간에도 미술과 대면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그리는 자의 의무다. 그렇기에 그리는 자는 아무거나 그려서는 안 된다. ‘막’ 그린다는 것은 형식의 반복을 견디고, 그리는 행위를 일상과 맞바꾸고,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고비를 극복하고, 더는 그릴 것이 없다고 자복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본능 같은 그림이다. 이경미의 그림이 그러하다. 편집증과 도착증을 강렬히 오가는 그림의 기세는 화가의 본능이 주도했음을 일깨운다. 작가는 실제로 있는 곳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을 자신의 힘으로 하나의 세계로 종결시킨다.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낯선 세계가 되고, 낯선 세계는 일상이 된다. 그 교차점에서 자아는 타자로 연결되고, 나의 기억은 공통된 기억으로 승화된다. 세상이 달라졌다. 미술도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도도한 기술의 시대에 그리는 자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그림, 우리에게 그리는 자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그림, 기술의 텍스트가 보유하지 못한 예술적 문맥을 품은 그림 앞에서 우리는 인간임을 느낀다. 미술은 다층적 해석을 유도하는 인류학적 그리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