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시 소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결국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순간이나 존재하는 순간이 아름답다는 정도가 갖는 선호도의 차이일 뿐,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는 관객이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듯, 제 작품을 멍하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_ 김태호
파주의 이른 아침에는 간혹 지독한 안개가 낀다. 늪지 주변으로 세워진 도시의 풍경과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는 안개 속에 파묻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형상이 사라져간다. 김태호의 작품은 마치 안개가 자욱한 파주의 풍경과 같다.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를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하는 그의 풍경화는 사실을 그대로 옮기거나 기억 속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본래의 형태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안개에 갇혀 사라져가는 사물을 바라볼 때처럼 김태호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한다.
김태호는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 혹은 나무 입방체에 아크릴 물감을 수십 번 덧칠했다. 은은한 광택을 머금은 입체이자 평면인 작품은 제각기 다른 크기를 지니고 있으며, 방향이나 보는 시간의 빛에 따라 다른 색감으로 나타난다. 어떠한 형상도 담고 있지 않지만 풍경화다. 김태호는 덧칠을 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사건, 인상으로 남은 이미지를 층층이 쌓아 올렸다. 오히려 수많은 형상을 겹쳐 결국에는 색면이 된 풍경은 기억 속의 대상이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을 일러준다.
이미지는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에 감정의 작용이 더해져 기억 속의 이미지는 처음 보았던 그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고정된 이미지의 존재를 부정한다. 김태호는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담지 않은 풍경화에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바에 따라 수만 가지로 변화하는 이미지를 담았다. 텅 비어 보이지만 색과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화면 안에는 잊어버렸던 기억으로 이끄는 풍경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태호는 대규모 설치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 공간을 드로잉 하듯이 채웠다. 넓은 공간은 그의 작품으로 조금씩 여백이 지워져갔다. 전시 공간 속의 작은 풍경화들은 여럿이 모여 다시 하나의 커다란 풍경을 이룬다. 그 안에는 안개가 자욱한 날의 아침도, 햇살이 반짝이는 날의 오후도 담겨있다. 김태호는 사라짐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 말한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내가 바라보는 이미지와 같거나 다를 수도 있지만 모두 한순간의 상황으로 기억되며 이내 사라질 것이다.
현민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큐레이터
사라진 풍경 김태호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Installation view, 2017
김태호 Kim Tai Ho, Scape Drawing, 182x227.2cm, acrylic on canvas 2017
김태호 Kim Tai Ho, 헤이리 스튜디오 Installation view, 2017
2. 아티스트 인터뷰
Q. 개인마다 기억하는 풍경은 다른 이미지로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겐 도시의 모습 혹은 바닷가의 모습 또 다른 이에게는 논밭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풍경이 있지요. 어린 시절의 특정한 기억이 현실의 이미지와 연결이 되나요?
// 물론입니다. 풍경이나 사람의 모습, 사건이 중첩되지요. 시간과 장소, 사건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쌓여가는 것일 텐데요. 그 결과로 눈 덮인 들판처럼 이미지가 사라지죠. 내게는 특히 5-7세 사이에 살았던 시골에서 본 여러 이미지가 평생을 지배하는 것 같아요.
Q. 작품은 각각이 풍경인데 모두 조합되어 하나의 큰 풍경을 다시 이루나요?
// 그렇지요. 세워져 있는 작은 그림 하나가 나무가 될 수도 있고, 돌이 될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어요. 이 단위들이 모여서 커다란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요. 나는 고정된 형태라는 것에 대해 불신합니다. 형태는 개인의 기억과 경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고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나무 조각들이 놓여있는 것, 그 자체가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Q. 작품에서 점차 이미지가 사라지는 과정에 어떤 의미를 담고자 하나요?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 결국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순간이나 존재하는 순간이 아름답다는 정도가 갖는 선호도의 차이일 뿐,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는 관객이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듯, 제 작품을 멍하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Q. 전시 공간 안에서 작품이 자리하며 맺는 관계는 중요히 여겨집니다. 공간과 작품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부분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나에게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조형요소이며, 표현의 장이기도 해요. 작품과 공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그러하겠지만, 내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과 맞는 상황에서 전시하려 합니다. 내 회화작품들이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 채광에서 전시되기를 원합니다. 되도록 자연광에서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요. 미메시스 아트 뮤지움은 이런 생각과 과정을 거쳐 이런 결과를 도출했다는 것을 조금 친절하게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소에요. 생각보다 빛의 변화가 적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요.
Q. <모호함>, <사라짐>과 같은 주제는 구체적인 이미지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진행되는 과정의 모든 단계가 완성이면서도 과정으로 남겨질 수 있는데요.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나요?
// 1999년 금호미술관에서의 전시 <부유하는 기억_나른함>을 위한 작품을 2~3년간 준비하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사물의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했어요. 개구리와 새 중간의 형상을 만들거나, 나무와 구름 중간의 형태를 그렸지요. 뿌연 아크릴 상자 속에 무슨 동물인지 분명치 않은 입체물을 넣어 전시하기도 했고요. 점차 그런 형태마저 지우기 시작했어요. 겉에 보이는 형태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려진 형태 위를 덮어버리면, 형태는 사라지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천착했어요. 덮인 표면 안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했던 대상들 말이에요.
Q. 작품이 비교적 밝은색이지만 잔잔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집니다.
// 내 속에는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슬픔이 있어요. 몇몇 관객들은 내 그림이 슬프거나 처음 느껴보는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어요. 슬픔이라는 감정은 단순하지 않아요. 아름다움과 연결된다고 봐요. 이를 담는 예술에 늘 관심이 있지요.
Q. 항상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드로잉에 대한 부분을 묻고 싶습니다.
// 나는 매체와는 별개의 문제로 <과정은 모두 드로잉>이라고 생각해요. 더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과정들은 모두 드로잉입니다. 내가 보여주는 사진도 드로잉이고, 덮여나가고 있는 캔버스 또한 드로잉의 과정이지요. 여전히 진행 중인 작품 중에 <알맞게 움직이다>라는 드로잉들이 있어요.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드로잉이 되는 것이 아닌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끝내는 전통 개념의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지요. 궁중무의 절제된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름답더라고요. 그 순간을 드로잉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엮어서 그어보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주체가 아니고 바람이나 나뭇가지가 주체가 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어요. 나뭇가지에 먹을 뿌리고 종이를 들고 서 있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 결과물 중 마음에 드는 몇 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파기시켰어요. 마치 도자기를 굽는 도공들처럼.
내 주위에 애착을 갖는 대상들이 내 그림에 담는 소재일 뿐만 아니라 그 대상 자체가 드로잉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나 제자가 보낸 편지들, 부모님께서 남기신 물건,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내겐 드로잉이라는 것입니다.
김태호 Kim Tai Ho, Landscape Drawing, 123x180cm, Pigment Prints, 2017
사라진 풍경 김태호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Installation view, 2017
김태호 Kim Tai Ho, variable size, mixed media drawing(detail),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