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민주·인권·평화 <세계민중판화>전
2018-05-10 ~ 2018-08-12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제 3,4전시실
전 시 명 2018민주·인권·평화 <세계민중판화>전
전시기간 2018-05-10 ~ 2018-08-12
전시장소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제3,4전시실
문 의 처 062-613-7100
작 품 수 50점
참여작가 케테 콜비츠(독일), 도미야마 다에코(일본), 오윤(한국)
기 획 임종영(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주 최 광주시립미술관, 5·18기념재단
2018 민주·인권·평화 <세계 민중 판화>전
임종영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광주시립미술관은 2013년부터 5·18기념재단과 공동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공유하고자 민주·인권·평화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이번에 개최하는 <세계 민중 판화>전은 케테 콜비츠, 도미야마 다에코, 오윤 작가의 판화 작품을 통해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 오월 광주의 비극, 그리고 민중의 삶과 신명을 느껴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독일)
케테 콜비츠는 1867년 동프로이센에 위치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자유사상 운동에 일생을 바친 신학자이자 목사인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 오빠 콘라트, 그리고 의사인 남편 칼 콜비츠 등은 케테 콜비츠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평생 사회 소외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케테 콜비츠, 자화상, 1934, 석판, 20.8×18.7cm
케테 콜비츠는 1893년 베를린에서 공연된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관람한 후 큰 충격을 받고, 1893년부터 1897년까지 6점의 연작판화 <직조공 봉기>를 제작한다. 이 연작 판화는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는 직조공들의 고통과 그들의 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케테 콜비츠는 또 다른 7점의 연작 판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농민들의 참혹한 현실과 그들의 봉기를 그린 <농민 전쟁>이다. 이 연작 판화는 작가 침머만이 1804년에 쓴 ‘대농민전쟁사 개설’을 읽고 그 영향으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노예의 삶과 다를 바 없었던 농민들의 삶을 작품의 주제로 표현하였다.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1922-23, 목판, 34×40cm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은 케테 콜비츠를 반전(反戰) 미술운동가로 이끈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둘째 아들 페터가 전쟁에 지원하여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만 것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케테 콜비츠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7점의 목판화 연작 <전쟁>을 완성한다. 목판의 특징인 간결한 표현과 흑백의 강렬함이 잘 드러난 <전쟁> 연작에는 전쟁을 겪은 여성, 그리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서의 감성과 모성애가 잘 드러나 있다. 이번 전시에는 7점의 <전쟁> 연작이 모두 전시되는데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통해 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치유하기 힘든 아픔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케테 콜비츠의 많은 판화 작품에서 여성들 또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내고자 하는 주체적이고 투쟁적인 여성,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여성, 아이들을 지켜내고 아이들과 즐거워하는 여성들로 이는 50여점에 이르는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과도 같은 모습이다.
케테 콜비츠, 희생, 1922-23, 목판, 37×40cm
케테 콜비츠의 판화는 중국 문학가 루쉰과 1930년대 중국 신(新) 목판화 운동은 물론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당시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구제 받을 길 없는 이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을 위해 나의 예술이 한 가닥 책임과 역할을 담당했으면 싶다.' 라고 했던 그녀의 말처럼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인간애를 깊이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Tomiyama Taeko, 1921~ , 일본)
도미야마 다에코는 1921년 고베(Kobe)출신으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구 만주 대련과 하얼빈에서 지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중퇴한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전쟁 책임과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예술로 표현한 양심적 화가이다. 그녀는 자국 일본이 전쟁에 대해 책임 지지 않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며, 평생에 걸쳐 전쟁에 대한 일본의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그림을 그렸고,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 종군위안부 문제,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주제로 작업해 왔다.
도미야마 다에코, 광주의 레퀴엠, 1980, 실크스크린, 57.5×30.5cm,
광주시립미술관소장 하정웅컬렉션
도미야마 다에코가 한국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1971년 한국여행 때문이다. 옥중 고문에 저항하여 분신을 시도한 재일한국인유학생 서승을 면회를 통해 만나게 되었으며, 김지하의 시집 <황토>의 이미지에 이끌려 양심수 석방을 호소하고 군부독재의 인권탄압을 알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의 만행을 고발한 그녀의 작품 경향으로 인해 도미야마 다에코는 한국과 일본 그 어느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1976년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평가되는 것보다는 작가로서 발언코자 하는 내용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와 그림과 음악으로 된 슬라이드 작품을 제작하는 새로운 예술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김지하의 시를 주제로 한 슬라이드 작품이 만들어졌다.
도미야마 다에코, 광주의 피에타, 1980, 실크스크린, 41.5×56cm,
광주시립미술관소장 하정웅컬렉션
도미야마 다에코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도쿄에서 접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1980년 5월 광주> 판화 연작을 제작하였다. 이 판화 연작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 국제전시회 특별초대로 광주시민에게 처음 공개되었는데, 간결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5월 판화 연작을 짧은 기간 동안 유화가 아닌 판화로 제작하였는데, 이는 오월 광주의 비극을 전 세계에 빨리 알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는 5월 판화 연작 중 광주시립미술관소장 하정웅컬렉션 10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도미야마 다에코, 시민의 힘, 1980, 리놀륨판, 99.5×139cm,
광주시립미술관소장 하정웅컬렉션
1921년생으로 100세를 눈앞에 두고 있는 도미야마 다에코는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지 자문하면서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적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오윤(Oh Yoon, 1946~1986, 한국)
오윤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1980년대 이후 괄목할만한 예술적 성과로 인해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민중들의 한과 신명을 표현한 목판화는 그가 이룬 최고의 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서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던 오윤은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에 재학 중이었던 친 누나 오숙희와, 누나와 친분이 있었던 서울대 미학과 김지하로부터 영향을 받아 예술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초기 오윤 작품의 예술적 자양분은 멕시코 혁명미술가들과 탈춤, 판소리, 마당굿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오윤, 북춤, 1985, 목판, 31.6×25.5cm
1970년 대학졸업 후 오윤은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테라코타 소품 및 테라코타 벽화 제작 외에 특별한 가시적 예술적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1970년대 중반 목판화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을 때 그가 판화 작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오윤의 1974년 작 <기마전>은 멕시코 상류층과 부유층을 해골을 등장시켜 풍자했던 멕시코 판화가 포사다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 중국 신흥 목판화 운동에 대해서도 오윤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강한 흑백 대비, 형태의 단순성, 그리고 복제성에 의한 대중들과의 소통이 용이한 점 때문에 오윤은 목판화에 깊게 매료되었다.
오윤, 애비, 1981, 목판, 36×35cm
1980년대 접어들어 오윤은 건강문제 때문에 잠깐 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진도로 요양을 가기도 하지만 수많은 판화 작업들을 쏟아냈다. 특히 판화 작품에는 수천 장에 이르는 드로잉 작업을 통해 민중의 전형화 된 모습을 창출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오윤은 굵고 간결한 선묘를 바탕으로 건강하고 강인한 인물상을 제시하였으며, 인물의 동작 하나 하나가 지니는 상징성까지도 형상화하려 노력했다. 오윤의 판화는 1980년대 일종의 투쟁적 선전매체로 활용되었던 일반적인 민중 판화작품과는 달리 민중들의 한(恨)과 신명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윤은 민중들의 한과 신명이 배어있는 전통 춤과 소리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춤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춤의 흥은 사람들은 물론 호랑이와 도깨비까지도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1985년부터는 오윤의 판화에 도깨비가 등장하게 되는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닌 술 마시고, 춤추고, 씨름하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오윤이 표현한 도깨비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오윤, 칼노래, 1985, 목판, 채색, 32.2×25.5cm
오윤은 그의 판화작품에 에디션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소수 특권층만이 작품을 소유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평가 받기보다는 작품의 내용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오윤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시작과 함께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의 판화 작품을 기억하는 이유는 공연 포스터나 책의 표지화, 삽화 등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