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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

  • 전시분류

    외국작가

  • 전시기간

    2018-12-05 ~ 2019-02-17

  • 참여작가

    치바이스, 팔대산인, 오창석, 우웨이산, 우쭈어런

  • 전시 장소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 유/무료

    유료

  • 문의처

    02.580.1653

  • 홈페이지

    http://www.s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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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 특별전 · 중국국가미술관 소장 걸작
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
似与不似:对话齐白石

팔대산인八大山人 오창석吴昌硕 치바이스齐白石 우쭈어런吴作人 우웨이산吴为山


전시기간 /  2018년 12월 5일(수) ~ 2019년 2월 17일(일) 
전시장소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 전관 (실험 · 현대 Ⅰ·Ⅱ·Ⅲ 전시실)
주    최 /  예술의전당, 중국국가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1시 ~ 오후 7시 (입장마감 : 오후 6시)   * 매주 월요일 휴관
도 슨 트 / 매일 오후 2시, 5시 (주말, 공휴일 포함)
장     소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 전관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중국문화부, 주한중국대사관, 주한중국문화원, 한국문화재청


전시 소개
예술의전당이 개관3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의 대화>展은 2017년 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한중수교25주년 기념-치바이스齊白石 -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展에 이은 두 번째 <치바이스> 특별전으로 이번에는 중국국가미술관 소장품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치바이스 걸작 80여 점과 이러한 치바이스의 예술이 있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팔대산인 주탑과 오창석의 걸작 20여 점 등 총 116점의 작품들을 시공을 초월한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다. 


전시 구성
■ 중소형신(重塑形神) : 형신을 다시 빚다
■ 사고회통(師古會通) : 옛 것을 배워 훤히 알다
■ 화오자화(畵吾自畫) : 내 그림을 그리다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팔대산인 작품 등
중국 국가 1급 문물 4건 7점 등 총 71건 116점 공개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중국국가미술관과 함께 오는 12월 5일(수)부터 2019년 2월 17일(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展을 개최한다. 한중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치바이스의 걸작 80여 점을 포함해 중국 문인화의 거두 팔대산인의 작품 7점, 오창석 14점, 인물 조각으로 유명한 우웨이산(現 중국국가미술관장)의 조소 8점 등 총 116점의 걸작들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팔대산인 <학 사슴 오리 기러기[鶴鹿鳧雁]> 4폭병, 오창석 <화훼책(花卉冊)>, 치바이스 <화훼초충책(花卉草蟲冊)>, 우쭈어런 <치바이스 초상> 유화 등 한국의 국보에 해당하는 국가 1급문물이 4건 7점이 포함되어 있다.  동아시아 서화미술의 핵심화두인 ‘필묵사의(筆墨寫意)’전통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재창조되어 오는가를 ‘치바이스와의 대화’로 살펴보는 것이 목적인 이번 전시에는 중국 문인화의 거두 팔대산인과 오창석의 진품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고학찬 사장은 “지난 2017년 경색된 한중관계의 물꼬를 트는데 큰 역할을 했던 <치바이스>展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해 우리 국민들에게 선보이게 되어 대단히 기쁘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중장기적인 한중예술교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이번 <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展을 마치고 교환전시로 내년에는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展을 중국국가미술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 입장권은 성인 5천원, 청소년/어린이 3천원이며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와 콜센터(02-580-1300) 등에서 예매 가능하다.

“팔대산인 문하의 주구”라 스스로 부른 치바이스
중국 문인화의 전설 팔대산인부터 현대미술 거장 우웨이산을 한 자리에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116점은 중국 유일의 국가미술관인 중국미술관(National Art Museum of China)이 소장한 걸작들로 모두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중국에서 조차 희귀한 팔대산인 주탑(朱耷, 1626-1705)의 작품 7점이 해외전시를 위해 한꺼번에 반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치바이스 스스로도 자신을 “팔대산인 문하의 주구”라 칭할 정도로 팔대산인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늘 전설처럼 거론되는 인물이며 명말청초 사의중심의 문인화 역사전통을 혁신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가 ‘사여불사(似與不似)’를 화두로 사의(寫意)그림의 역사전통과 창신의 맥을 ‘치바이스와의 대화 형식’으로 보여주는 만큼 위로는 팔대산인과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아래로는 우쭈어런(吳作人, 1908-1997), 리후(李斛, 1919-1975), 진상이(靳尚誼, 1934), 장구이밍(張桂銘, 1939-2014), 우웨이산(吳為山, 1962) 등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다섯 거장의 유화, 조소, 중국화와 창작 초안, 스케치 등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팔대산인 - 오창석 - 치바이스 - 우웨이산” 으로 이어지는
중국 사의(寫意)그림 역사전통과 창신의 맥을 한자리에서 짚다!

l. 중소형신(重塑形神) : 형신을 다시 빚다
‘치바이스의 인물 조형’ 섹션으로 우쭈어런, 리후, 진상이, 장구이밍, 우웨이산 등 중국 현대 다섯 대가의 유화, 조소, 중국화와 창작 초안, 스케치 등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다. 치바이스와 대화를 통해 그의 풍채(風采)와 신운(神韻)이 작가마다 어떤 창작방식과 표현기법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본다.

Ⅱ. 사고회통(師古會通) : 옛 것을 배워 훤히 알다 
두 번째 섹션은 진상이의 <팔대산인> 유화 시리즈와 우웨이산의 <오창석흉상> 조소작품을 열쇠로 삼아 중국미술관에서 소장한 팔대산인, 오창석의 걸작들, 그리고 치바이스의 화제와 화풍과 관련 있는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관람객들은 작품들을 서로 비교 감상하는 재미와 더불어 중국 예술의 주류에서 사의(寫意) 정신이 어떻게 이어지며 새롭게 창작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예술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전달되어 창의력으로 변환하는지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이다.

Ⅲ. 화오자화(畵吾自畵) : 내 그림을 그리다 
마지막 섹션은 치바이스 작품 50여 점이 회화의 소재, 표현기법, 미학적 취지 등을 고려해서 네 개의 단원으로 나누었다. 즉 인물화의 유희와 유머, 수족(水族)소재의 유유자적함과 사생(寫生)에서 사의(寫意)로의 변화, 화조초충화(花鳥草蟲畵)의 공필(工筆)과 사의(寫意)의 결합이 표현해 내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취미, 산수(山水)의 소재를 간필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영혼의 해방과 그 속에 남기는 의미 표현 등으로 꾸몄다.


작가 소개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

치바이스는 호남성 샹탄현 출신으로 일생동안 많은 자호(字號)를 사용하였다. 본명은 치우앙(齊璜), 순지(純芝)이고, 자(字)는 위청(渭青), 빈생(瀕生)이며, 호(號)는 난정(蘭亭),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노평(老萍), 아수(餓叟), 차산음관주자(借山吟館主者), 기평당상노인(寄萍堂上老人),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를 바꾸었다.

그의 전기는 유년에서 노년까지 일생 동안 드라마틱함 그 자체다. 치바이스는 1864년 중국 호남성(湖南省) 샹탄(湘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사일을 돕고 소를 치는 등 가사를 돕던 치바이스는 너무 어리고 힘이 약했기 때문에 열네 살부터 목공일을 배웠다. 목공일을 하면서도 일감이 없는 밤이면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스승을 만나 시작(詩作)지도를 받게 되었고 서른 살 이후에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시(詩), 서(書), 화(畵) 및 인장 조각 등을 독학으로 익혔다. 그런 만큼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출발은 매우 늦은 편이었다. 40대에 들어선 치바이스는 자연으로부터 영감(靈感)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경승지를 5차(1902~1916)에 걸쳐 두루 여행한다. 이 때 치바이스는 오창석(吳昌碩)과 같은 상해화파(the Shanghai School)인물들과 베이징의 첸시젱(陳師曾)과 교분을 쌓았다.

그의 그림은 우선 인물 중심의 세필화(細筆畵)를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자연의 여러 모습과 생물의 동태(動態)를 이해하고 가늠하여 수묵과 채색으로 표현했다. '사물의 겉모습만을 모사(模寫)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 '전대의 대가들의 그림을 세심하게 따라하는 것은 죽은 공부'라며 외형모사나 답습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치바이스는 97세에 작고하였는데 80살이 넘어서야 그림다운 그림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죽는 날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49년(89세) 중앙미술학원 명예교수 
1953년(93세) 중국인민예술가 칭호수여, 중국화연구회의 주석 담임 
1956년(96세) 세계평화상 수상 
1957년(97세) 베이징 중국화원 명예원장, 서거
1963년       ‘세계10대 문화거장’ 선정



주탑(朱耷, 1626-1705)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 출신으로, 자는 설개(雪個), 호는 팔대산인, 개산(個山), 여옥(驢屋) 등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17번 째 아들인 녕헌왕(寧獻王) 주권(主權)의 10세 손으로, 명말 청초의 화가이자, 서예가이다. 청나라 초기 화단의 “사승(四僧)” 중 하나이다. 1644년 명나라 왕실이 전멸하자, 주탑은 나라도 집도 다 망하는 아픔을 깊게 느꼈다. 그 후 23세에 승려가 되었다가, 54세에 환속해서 가정을 이루어 난창(南昌) 남쪽에 “청운보(青雲譜)”라는 수도원을 짓고, 주지를 맡았다. 59세에 “팔대산인”의 별호(別號)를 쓰기 시작한 그는 산수화는 황공망(黃公望)과 동기창(董其昌)에게 배웠으며, 화조화는 심주(沈周)와 진순(陳淳), 서위(徐胃)의 영향을 받았다. 60세 이후에는 자신의 풍격을 뚜렷하게 세워 중국 수묵 사의화에 있어 독립적이고 기이한 화법(畫法)을 창조했다. 그의 수묵 사의 화조화는 가장 전형적이고, 구도는 괴기하고 신묘하며, 필체는 두껍고 호탕하고, 묵색은 침울하고 호방하다. 화조의 조형은 과장되게 표현했으며 정확하여, 상징의 필체로 인격화의 특징을 표현하고, 본인 신세의 심정과 도도한 심경을 표현했다.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저장성(浙江省) 안지현(安吉縣) 출신으로 초명(初名)은 준(俊)이고, 후에 준경(俊卿)으로 개명했다. 자는 창석(蒼石), 창석(倉石), 창석(倉碩)이며, 별호가 많은데, 자주 보이는 것으로는 노창(老蒼), 노부(老缶), 부려(缶廬), 부도인(缶道人), 박과(樸果), 고철(苦鐵), 대롱(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오호인개(五湖印丐) 등이 있다. 중국 근대에 걸출한 예술가이며, 근대 화조화 주류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대 말 “후 상해파[後海派]”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쉬구(虛穀), 푸화(蒲華), 런보니앤(任伯年)과 함께 “청말 4대 상해파[清末海派四傑]”라 불리기도 한다. 오창석의 회화는 문인화를 집대성하여 전통 문인화가 근대사의 고봉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기세가 드높고, 고아하면서도 힘이 있고, 문장이 간결하고 힘찬 화법을 개척했다. 서예와 전각(篆刻)에 정통하고, 기초가 튼튼해서 서예와 전각의 행필(行筆), 조소 칼 사용법과 글자체, 구성을 회화에서 융합한 것이 오창석 예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금석기풍[金石氣]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고, 후대 화조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우쭈어런(吳作人, 1908-1997)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후이성(安徽省)이다. 쉬베이훙(徐悲鴻)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930년대에 유럽에서 유학했다. 특히 소묘, 유화, 예술교육 분야에 조예가 깊었으며, 말년에 중국 그림 분야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중앙미술학원 원장, 중국미술협회 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쉬베이훙에 이어 중국 미술계에 또 하나의 선구자가 되었다. 


리후(李斛, 1919-1975) 

본관은 쓰촨성(四川省) 다주현(大竹縣)으로, 화가이자 미술교육가이다. 쉬베이훙의 훌륭한 제자로서, 중국화의 묵필(墨筆)로 서양 화법의 사생을 견지하는 등 예술 방면에 있어 중국과 서양을 융합시켰을 뿐 아니라, 소묘의 기초 또한 탄탄했다. 리후는 중국화 회화 기법에 있어 독창적인 성과를 이룬 화가로, 수많은 야경 산수화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물 초상화에도 독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진상이(靳尚誼, 1934) 

본관은 허난성(河南省) 자오쭤시(焦作市)이다. 중국 당대 유화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미술협회 주석과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예술실천과 주장은 중국의 대부분 유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고전주의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중국 주요 3대 유화의 대표로서, 진상이는 인물화, 특히 초상화 창작을 탐색하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주제”라는 시대 명제에 대해 독특한 해답을 내놓은 예술가이기도 하다. 


장구이밍(張桂銘, 1939-2014) 

본관은 저장성(浙江省) 샤오싱시(紹興市)이다. 1964년 중국미술학원 중국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상하이중국화원(上海中國畵院)에 입학했다. 상하이중국화원 부원장과 류하이수(劉海粟)미술관 집행 관장, 중국미술가협회 중국화예위원회(中國畵藝委員會) 위원, 상하이대학(上海大學) 미술학원 객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장구이밍의 예술 창작은 서양 회화의 풍부한 색깔과 조형 구조를 융합시키는 동시에, 중국 전통 회화의 곡선과 필묵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작품의 색깔이 선명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있으며, 현대 중국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우웨이산(吳為山, 1962) 

본관은 장쑤성(江蘇省) 둥타이시(東台市)이다. 현재 중국에서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조소 예술가이다. 중국미술관 관장과 중국 조소연구원 원장 등의 직위를 맡고 있다. 그의 조소 작품은 여러 차례 국제적인 상을 수상했다. 홍콩 중문대학의 명예 원사와 한국 인제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영국 왕립조소가협회 회원, 영국 왕립초상조소가협회 회원, 러시아 예술과학원 명예 원사로 임용되기도 했다. 우웨이산은 중국 조소의 사의(寫意) 정신을 제기했으며, 날(捏)과 소(塑), 주(鑄)에서 실제 느낌과 모습 간의 균형이 정묘하게 실현되기를 추구하여, 수많은 영혼을 뒤흔든 시대 조소와 문화의 명인 시리즈를 창작했다.


전시 이해 자료

‘형신(形神)과 사의(寫意)는 중국 예술의 핵심 

 ‘형(形)과 신(神)을 겸비한다’는 것은 중국 인물조형 예술의 핵심이다. 천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형의 수단방법이 새롭게 개발되고 그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면서 중국 인문정신의 내재적 가치와 기백이 응결되고 축적되어왔다. ‘조형 속에서의 대화’란 예술적 언어 속의 형태와 정신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아가서 다른 예술 매개와 역사의 시공을 오가는 예술 창작자들 사이의 영적인 만남이다. 물론 본 전시는 감상자들을 치바이스의 예술세계로 초대하여 중국 회화 사의(寫意)의 매력과 그 생동감 넘치는 여정을 함께하는 대화이다. ‘사의’는 중국 회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예술개념이다. 특히 명(明)과 청(淸) 두 시기에는 시(詩), 서(書), 화(畵), 인(印)의 내재적 통합이 수묵사의화조화(水墨寫意花鳥畵)의 높은 경지에 오르게 하였다. 치바이스 예술 성취의 최고봉에 있는 화조화에서 그의 통달한 사의정신(寫意精神)이 구현 되었다. 

“서위(徐渭), 주탑(朱耷)은 범인과 거리가 멀고, 
오창석은 노년에 새로운 재능을 펼쳤다. 
나는 구천에서 그들의 개가 되어 
세 분의 문하에서 수레바퀴를 돌리련다.“  - 치바이스 -

치바이스는 이런 시를 썼다. “서위(徐渭), 주탑(朱耷)은 범인과 거리가 멀고, 오창석은 노년에 새로운 재능을 펼쳤다. 나는 구천에서 그들의 개가 되어 세 분의 문하에서 수레바퀴를 돌리련다.(青藤八大遠凡胎,缶老衰年别有才;我願九泉爲走狗,三家門下轉輪來)” 이처럼 명과 청의 사의화(寫意畵)대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치바이스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이 대가들 작품을 임모(臨摹)하고 학습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팔대산인과 오창석이 두드러진다. 멸망한 명 황실의 후예로서 팔대산인은 자신의 심경이나 기분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표현했다. 물고기, 오리, 새 등의 눈을 위로 치켜 떠서 하늘을 흘겨보는 형상으로 자신의 완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필묵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다. 노련하고 모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고, 맑고 탈속한 재미가 넘친다. 작품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진솔하고, 명랑하고 건강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장법과 구도도 속(俗)되지 않고 미완성의 완성을 구가한다. 치바이스는 팔대산인의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을 흠모한 치바이스는 50대에서 60대 전후에 팔대산인의 차갑고 초월한 듯한 냉일(冷逸)화풍과 단순함의 의취를 반복해서 학습했다. 해파(海派)회화의 대가인 오창석은 금석의 필획을 서화에 접목하여 당시의 새로운 취향과 융합하였다. 그는 곧 중국 사의회화의 강건하고 웅혼한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 내었다. 치바이스는 자신의 “쇠년변볍(衰年變法)”시기에 주로 오창석의 금석대사의(金石大寫意)화풍을 흡수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세필 초충(草蟲)화법과 사생(寫生)관찰, 향촌취미(鄕村趣味), 그리고 동심온정(童心溫情) 등의 개념과 결합하여 독특하고 창의적인 자신만의 특색을 형성했다.

“나를 배우려 하는 자는 살 것이요, 
나를 닮으려는 자는 죽을 것이다” - 치바이스 -

팔대산인에서 오창석까지, 치바이스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을 성공적으로 민간화가에서 문인화가로 거듭나고, 그들과 가까이 갔다가 획기적인 변신을 이루어 냈을 뿐만 아니라 옛 법을 통달하여 마음의 법칙[內在心法]을 깨우쳤다. 창신의 초석을 다지는 동시에 후학들에게 실제로 배워서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유익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배우려 하는 자는 살 것이요, 나를 닮으려는 자는 죽을 것이다”이다. 내재적인 정신은 같은 흐름으로 함께하여야 비로소 효과적인 대화와 교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같고도 다른 혼 
似與不似之魂
 
사(似)와 불사(不似)에 대한 토론은 문인화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다. 치바이스의 명언 “그림의 묘미는 사(似)와 불사(不似) 그 사이이다” 에서 ‘사’는 구조와 형태, 조형의 의미이고 , “불사”는 신명과 여운이 넘치는 묘함을 의미한다. ‘그 사이’의 거리로 중국화의 정취와 조형의 무한한 공간을 여는 것이다. ‘그 사이’는 필묵 채색 구도 등 형식을 옮겨올 수도 있고, 사실과 사의, 세필과 호방과 같은 조형 방법과 철학이나 서정(抒情)과 같은 사유적인 함의를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으며, 그 혼백의 소재지가 바로 창작자의 예술적 경지이며 심미적 이상이다. 치바이스가 추구한 ‘사와 불사의 사이’의 뿌리는 바로 ‘나의 그림을 그린다’이다. 이것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창작을 의미한다. 과거와 현재를 통달한 기초 위에 치바이스는 명청문인화의 필묵운미(筆墨韻味)를 이어 받아 민간 예술의 졸박(拙朴)한 맛과 시종 변치 않은 그의 서민 정신과 예술적 개성을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천진하게 표현했다. 청아하고 냉일(冷逸)한 문인의 정취에 발랄하고 명랑한 민간의 순수함을 한 데 섞어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현대중국회화의 참신한 면모를 창조해 냈다. 이렇게 많은 화제(畵題)의 배후에는 치바이스 사의정신의 현대적 해석의 독보적인 공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림의 소중함은 사와 불사 지간이다.”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지혜롭고 심오한 사변(思辨)의 중국사의미학을 언어의 형식으로 예리한 논리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회화의 실천으로 사의(寫意)를 현대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이니라 그 표현을 더욱 이성적이고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20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전통 회화의 형태와 정신, 사물과 자아에 대한 독특한 천명이며 부활이다. 예술은 바깥의 세상을 발견하여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며, 마음의 세계를 발견하여 자신의 성정을 풀어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맸던 중국 예술의  현대적 의미는 서방에 있지도 않았고, 외부에 있지도 않았고, 중국전통예술의 정수인 사의정신(寫意精神)에 있었다. 치바이스가  바로 20세기 중국 예술의 사의정신을 고양시킨 일대의 대종사인 이유다.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이 된 치바이스,
독학으로 기적을 이루며 존경받는 거장이 되다

치바이스는 농민화가로 시작하여 중국인민예술가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서화각(詩書畵刻) 일체의 조형언어로 ‘신문인화(新文人畵)’를 창출하여 중국 근현대미술을 혁신시킨 인물로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존재다. 장다첸(張大千)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의 서화가(書畵家)인데 대중적 인기나 예술적 경지에서 사실상 독보적인 위치로 평가받고 있다. 천문학적인 작품가격과 거장의 빛나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는 유년부터 찢어지는 가난으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받았다. 치바이스 자신도 77세에 이르러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다. 청․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오직 목장(木匠)․조장(彫匠)․화공(畵工)을 생업으로 삼았다. 치바이스의 예도(藝道)는 이와 같이 생존수단으로 시작되었고 시와 글씨, 그림은 독학과 사교육을 통해 체득하였다. 글공부는 친할아버지의 가학(家學)(4세)과 외할아버지의 서당 출입(8세)으로 시작하였고 시(詩)․화(畵)는 후친위안․천사오판 문하(27세)에서 본격화 되었다.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와 명대(明代)의 슈웨이(徐渭)와 명말청초의 팔대산인(八大山人)으로 잘 알려진 주탑(朱耷)과 같은 거장들을 평생 사숙하며 그림을 깨쳤다. 일생동안 오직 짓고 새기고 쓰고 그리면서 생존과 자아완성을 이룩해냈다. 이런 맥락에서 치바이스의 생애와 예술창작 궤적은 인간세상의 기적으로 통한다. 소몰이꾼, 시골 목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강인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고전과 자연을 교과서로 삼아 시서화각을 독학으로 마스터해냈다. 그 결과 ‘신문인화(新文人畵)’를 창출하여 중국근현미술을 혁신시킴으로써 한 세기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거장이 되었다.

시서화각(詩書畵刻) 일체의 조형언어 구사로   
동서 문명의 격변기 20세기 중국예술을 변혁(變革)시킨 장본인 

시․서․화․각 일체의 인물이자 마스터(Master)가 치바이스다. 목장에서 출발하여 대시인이자 전각가․서가․화가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생전에 첫 번째로는 시, 두 번째로 도장, 세 번째로 자(字), 네 번째로 화(畵)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치바이스 예술에 있어 시와 서예, 그림, 전각은 한 몸 같은 존재다. 각 방면의 도리와 이치를 일맥상통하게 체계적이고도 철저하게 체득하여 실존의 세계를 고전의 변법을 통해 독자적인 필묵 언어로 표출해냈다. 그 결과 동서 문명이 충돌 교차하는 20세기 동아시아미술의 정체성을 새로운 예술경지 창출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평생 수 만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세상에 남겼을 정도로 다작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대부분 작품이 최고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목격하는 태작이 많은 다작 작가의 병폐를 찾아보기 어렵다. 천재성 이전에 노력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흔하디흔한 소재를 일생에 걸쳐 무수히 반복 묘사한 결과 대상의 본질과 미의 질서를 굵고 단순명료한 필획으로 추출해낸 것이다. 특히 꽃, 새, 풀, 벌레를 ‘살아있음’ 그 자체의 생동감으로 표현하였다. 물고기, 새우, 게는 마치 화선지 속에서 뛰쳐나와 헤엄쳐 다니는 착각에 들 정도다. 게다가 푸른 산과 숲, 강은 산림과 물의 기운을 그대로 필묵언어로 형상화 하였다. 그가 그린 인물화는 해학과 풍자,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평범(平凡)에서 비범(非凡)으로
‘치바이스 컬러’와 허허실실(虛虛實實)한 공간경영
치바이스 시대와 사회, 풍자와 해학․유머로 그려내다 

치바이스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지극히 평범(平凡)한 소재 속에서 발견한 비범(非凡)함을  일도법(一刀法)과 일필(一筆)같은 독자적인 전각기법과 서법으로 형상화해냈다. 치바이스는 특히 ‘일도법’이라는 전각도법을 응용하여 한 칼로, 일필(一筆)로 침착통쾌(沈着痛快)하게 글씨와 그림까지 휘지하고 구사해낸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삶의 속살을 파헤쳐 새로운 영역의 미의 질서를 추출해내고 조형언어를 개척해냈다는 점에서 중국회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와 같이 치바이스 작품의 아름다움은 전통과 혁신이 두루 겸비된 지점에서 확인된다. 고풍스러움과 참신함, 소박함과 고고함이 공존하는 화면이 전개되고 공간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태도와 작풍은 치바이스의 모든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치바이스 예술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천진난만에 있다. 그 중에서 치바이스의 회화방면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색(色)과 필획(筆劃), 구도로 작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조형언어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바이스 컬러’라 할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대비, 장검을 휘두르듯 단숨에 죽죽 그어 내리는 직필(直筆)과 디테일한 묘사, 허허실실(虛虛實實)한 공간경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회화에서의 독창적인 행동은 예술가로서 치바이스의 담력과 패기에 근원한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平和)였다”

치바이스는 청조(淸朝) 봉건사회가 망하고, 서구문명과 민주․공산․사회주의 득세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격변하는 20세기 중국사회를 관통하면서 근 한 세기를 살았다. 그러나 치바이스는 낡은 봉건주의 관습에 얽매이거나 시세에도 영합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실존을 직시하며 정치인이나 관리들을 경계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시대와 사회를 생활 주변의 물상을 가지고 풍자와 우화로, 해학과 골계로 필묵으로 비틀고 녹여내며 예도 외길로 일관하였다. 한마디로 치바이스는 시서화각 일체 언어로 평화사상을 그려낸 거장이다. 1956년 세계평화평의회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으며 치바이스는 답사를 한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흙을 사랑하고, 대지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平和)였다는 것을” 

치바이스는 시서화각 일체의 마스터나 거장만이 아닌 것이다. 시(詩) 서(書) 화(畵) 각(刻)이라는 언어를 융합하여 새로운 평화(平和)라는 언어를 창출해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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