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峴 박은용 – 검은 고독, 푸른 영혼
전시기간 : 2018. 12. 6.~2019. 3.10
장 소 : 광주시립미술관 제3,4전시실
전시작가 : 석현(石峴) 박은용
개막행사 : 2018. 12. 20(목) 오후 4시
주 최 : 광주시립미술관
평생 작업에 대한 집념과 치열한 예술혼으로 적묵법(積墨法)이라는 독창적 화법을 획득한 석현(石峴) 박은용은 창조정신이 뛰어난 예술가이자 변화를 꾀한 실천가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이번 전시 “석현 박은용_ 검은 고독, 푸른 영혼”展을 통해 남도 문인화맥의 전통적인 화풍을 뛰어 넘고자 혼신을 다해 창의적 작업의 길을 걸었던 석현 박은용의 작가정신을 기리고, 실험정신으로 꿋꿋이 예술의 길을 걷는 청년작가들과 침체된 남도 수묵에 대한 관심도 함께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1기(1970년대 초~1980년대 말)
전국적인 미술대회에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박은용은 오지호 화백과의 인연 후, 적극 화가의 길로 나가고 싶다는 결심을 하면서 서라벌 예술대학 회화과를 진학했다. 궁핍한 시대였지만 대학생활은 깊은 뜻을 나눈 화우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고, 그림 지도를 한 소정(小亭) 변관식, 최영림, 안상철, 장리석 등은 박은용의 작업에 내적‧외적 영향을 끼쳤다.
새벽의 씨뿌리는 여인, 70X125cm, 1982, 농협중앙회 구례교육연수원 소장
청옥동 풍경, 97.5X188cm, 수묵담채, 1982
적벽을 닮은 풍경, 98X300cm, 수묵담채, 1983, 개인 소장
1983년 개인전(동덕미술관)을 계기로 그동안 실험해 왔던 적묵법(積墨法)을 화단에 알리게 되는데, 탄탄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한 화면의 신선함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했다. 천경자 화백과 교감을 나눴던 작품<샘>(1975) 이후 무수한 붓질의 중첩으로 완성한 <새벽의 씨 뿌리는 여인>(1982) <청옥동 풍경>(1982), <적벽을 닮은 풍경>(1983) 등 주옥같은 작품은 고도의 집중과 열망으로 이룬 역작으로, 여기 언급된 작품들은 이번 전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2기(1990년대 초~1990년대 말)
세심한 운필로 장시간 작업해야 하는 적묵법의 작풍은 박은용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더 이상 밀도 높은 화면 운용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화실을 짓기 위해 노력한 결과 90년대 초에 완성한 화순의 두강화실은 고단한 심신을 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심기일전한 박은용은 80년대의 적묵법의 운필로부터 벗어나 대담한 필선으로 대상을 단순화시켜가는 화풍으로 변화한다. 형식보다는 내면의 표현에 치중한 시기로, 삶의 풍경은 강약의 운율, 이미지의 강조와 겹침을 통하지만 여전히 소박하고 정겨운 정취는 화면에 가득하다.
추수. 157X108cm, 수묵담채, 1998, 광주시립미술관소장
기다림, 96X73cm 수묵담채, 1997, 화순문화원 소장
모녀, 109X91cm, 수묵담채, 1999, 개인소장
오랜 칩거 끝에 열린 개인전(1999)은 큰 호응을 얻으면서 재도약의 기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심리상태는 계속해서 고통으로 남았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는 개인적 상황을 그린 수묵화나 병원생활 중의 스케치들도 많이 남아있어서 박은용의 내면의 떨림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느낄 수 있다. 반면에 전시장에서 만나는 <추수>(1998), <귀가>(1999), <기다림>(1997), <모녀>(1999) 등의 작품은 평화롭고 순박한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데, 그것은 바로 순수함을 간직한 그의 시각과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반복되는 병원생활 속에서도 한결같았음을 말해준다.
3기(2000년대 초~2008)
2000년대에 이르면 더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우울증이 깊어진다. 작품 속에는 지속적으로 가족의 모습이 등장하고, 작고하기 전까지 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과 스케치를 보면, 박은용에게 가족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으로 가족을 통해 치유 받고자 한 마음이 컸음이 느껴진다. 전시 중인 2007년 작 <남도의 가을날>은 3m가 넘는 대작으로, 우리의 가을 농촌의 정겨운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아이 업은 엄마, 감을 따는 아빠, 엎드려 뒹구는 아이, 그리고 황소와 개, 추수하는 농부 등, 농촌 마을의 조감도 같은 화폭을 쭉 따라가면 동네 사람들의 갖가지 집안 풍경을 만날 듯한 기대를 갖게 한다. 박은용은 일기를 쓰듯이 불안과 고통을 스케치했지만 따뜻함과 희망을 간직한 소시민의 삶을 동시에 그림으로써 평범한 일상을 누구보다 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다.
남도의 가을날,109X367cm, 수묵담채, 2007, 개인소장
박은용이 일생동안 그려온 소박한 자연의 소재나 미감(美感)은 아름다운 들꽃 같은 고향 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민족정신의 토대 위에서 그린 일상은 정겨운 동네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전통은 계승해야 할 가치임”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정신까지 나아간다. 소설가가 절필을 선언하듯이 박은용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거두었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세월이 흐를수록 창의적 치열함과 예리함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더해간다.
- 황유정(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