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갤러리는 2019년 첫 전시로 2월 28일부터 4월 20일까지 이교준 작가의 개인전 “Untitled”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니멀한 기하추상회화(Geometrical Abstract painting) 작가로 알려진 이교준이 1970~80년대에 집중했던 개념적 설치와 사진작업을 재구성하는 한편 90년대 이후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공간 분할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평면 회화를 함께 소개한다.
전시 소개
이교준은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를 기점으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실험적인 설치미술을 전개하면서 한국현대미술에서 주요한 전시에 참여해왔다. 1990년대 초부터 평면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 이교준은 석판화, 목탄, 아크릴, 수채 등 다양한 재료를 결합하고 이를 ‘분할’하는 시도를 하였다. 90년대 후반에부터 플렉시글라스와 알루미늄, 납판과 같은 금속 재료와 캔버스를 이용한 기하학적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회화적 독법을 이어오고 있다. 피비갤러리의 “Untitled”에서는 1970~80년대에 한국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유형을 이루었던 ‘설치’와 ‘행위’ 예술이 이교준의 작업에서 행해졌던 바를 사진작업과 함께 되짚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고 이를 현재의 작업과 연관 지어 40여년 동안 이어 온 이교준 작업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교준, Untitled, photographs, pencil on paper, 75 X 108 cm, 1997 / ⓒ Lee Kyo Jun / PIBI Gallery
이교준, Untitled, photographs on paper, 75 X 108 cm, 1997 / ⓒ Lee Kyo Jun / PIBI Gallery
이교준의 초기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 한국 미술의 경향을 간략하게 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미술계는 서구의 미술을 수용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구체적 형상에 대한 재현을 벗어나 행위성을 강조하며 두터운 질료감을 표현한 소위 앵포르멜(Informel)로 지칭되는 추상미술의 흐름이 지배적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민중미술이 유행하기 전까지의 70년대는 단색화가 주류를 이루어 한국적 정체성을 대변하였다. 한국현대미술의 큰 흐름인 앵포르멜과 단색화 시대 사이에서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아방가르드미술은 이일, 오광수 같은 모더니즘 비평가들에 의해 ‘전환기’ 혹은 ‘침체기’의 시도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술에 대한 정의와 미술행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이교준의 초기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개념미술과도 연관된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던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은 대지미술(Land Art), 환경미술(Environment Art), 오브제(Object),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등의 개념성을 강조한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미술이론과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한국 현대미술에 맞는 담론을 펼쳐나갔다. 이 시기의 많은 작가들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신체, 텍스트, 장소, 공간, 중력, 프레임 등을 미술의 구성 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사유하고 실험하는 시도들이 일어났다. 이교준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고 국제적인 조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개념미술 혹은 ‘개념으로서의 미술’을 적극적으로 의식하였다. 이 같은 상황은 70년대 중반에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1974-79)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났고 이교준은 국내 작가들뿐 아니라 대구를 방문한 일본의 현대미술가들과 교류하고 영향을 받으며 작가로서 행보를 이어갔다.
이 시기의 이교준 작업은 신체작업, 사진작업, 텍스트작업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교준, Untitled, black and white photographs, 80 X 120 cm, 1981 / ⓒ Lee Kyo Jun / PIBI Gallery
신체작업
작가는 기존 미술의 방식으로 충족되지 않는 지점을 신체와 일상의 행위를 작품의 구성요소 혹은 대상으로 삼으면서 표현한다. 신체와 행위를 나타내는 언어들을 목록화하여 사진이나 영상에 담거나 때로는 녹음된 음성으로 발성하기도 한다. 신체작업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작업과정이 드러나고, 주체와 객체가 재설정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사진작업
이교준의 사진작업은 신체작업과 직접 연관된다. 신체/퍼포먼스를 기록하기 위해 사진이 이용되었고 이때 프레임의 바깥에 여백을 남겨 인화하는 방식은 대상이 놓여지는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흐트러뜨린다. 또한 의자, 나뭇가지 등의 오브제를 사진으로 찍은 후 실제의 대상과 사진을 병치하여 실제와 개념, 프레임의 안과 밖, 그 경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텍스트작업
개념미술에서 언어는 가장 보편적인 형식으로 언급되는데, 이교준은 언어에 있어 인식의 영역과 지각의 영역을 분리하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작업을 하였다. ‘BLACK’, ‘WHITE’ 등의 텍스트를 문자와 의미가 일치하게 하거나 반대되게 하여 인식과 지각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차이를 일깨운다.
이교준의 신체, 사진, 텍스트 작업은 함께 묶어서 전시되기도 했듯이 서로 맞물리며 연결된다. 신체-사진작업이 그러하듯, 쓰여진 언어(인식)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음성의 발음을 통해 텍스트-신체작업이 상호작용하며 이어진다. 이교준이 청년시절 행했던 일련의 개념적인 실험은 현재의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어 왔는지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교준은 90년대 이후로 캔버스, 종이, 알루미늄, 납판, 목재 등 다양한 재료들을 수용하며 평면적 구조에 대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으며 90년대 후반에 와서 화면을 분할하고 색면을 통해 이를 다시 구획하는 시도가 펼쳐졌다.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캔버스로 옮겨와 최소한의 형태와 색채만으로 화면을 분할하는 작업을 추구하였고, 2000년대 중반 이후 강렬한 색감과 수평, 수직의 교차, 불규칙하게 혼합된 레이어들이 시도된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교준, Untitled, acrylic on canvas, 60 X 60 cm, 2018 (each) / ⓒ Lee Kyo Jun / PIBI Gallery
2009~2012년에 집중된 <Void>연작 회화에서는 면으로 구성된 층과 선으로 구성된 층이 겹쳐지면서 각 층마다 공간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면과 선 그 자체가 독립된 요소로 화면 안에서 균일하게 공간성을 보여주는 이교준의 작품은 평면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이것은 마치 이교준의 초기 사진작업에서처럼 필름의 프레임을 날것으로 인화하여 프레임 자체를 변형시키는 제스처나 사진 모서리에 기대는 듯한 퍼포먼스로 재료로서의 틀 자체를 부각시키려 했던 작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틀과 프레임에 대한 이교준의 사유는 40여년의 시간을 건너면서 회화의 형식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구성의 위계를 없애려는 의도는 최대한 단일한 형태와 ‘중심이 없는 병치(one another after)’라는 미니멀리즘적 외형의 형태를 따르는 가운데 면 분할을 집요하게 이어가는 데서도 드러난다. 화면에서 여백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닌 면 자체의 분할을 위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Untitled> 회화 시리즈는 2차원의 평면 안에서 기본적인 면의 구획과 이를 통한 선의 구축을 통하여 그 표면이 함의할 수 있는 (3차원적)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입체적인 효율성을 가시화한다. 이교준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면 안에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캔버스는 오히려 무언가가 꽉 채워질 듯한 무한한 가능성의 빈 공간(void space)을 담고 있다.
피비갤러리의 “Untitled” 전시는 이교준의 초기 작업들과 현재의 평면 작업이 사뭇 다른 형식적 시도를 거치더라도 동일한 개념의 결과에 닿을 수 있다는 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1970~80년대의 실험적인 작업들이 그 이전 시기 미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실천으로 행해졌다면, 2019년 현재의 이교준은 역설적이지만 회화라는 형식을 빌어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교준의 태도는 새로운 모색과 실험, 행위와 개념의 미술로 전개되었으며 앞으로 펼쳐질 작업에 대한 근간을 만들었다. 본 전시는 이교준의 예술에 대한 실험적인 정신이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교준 작업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한국 현대미술의 차원에서 재조명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 황인, ‘개념미술의 개념’, 『Lee Kyo Jun Early Works』, 2018, 마르시안스토리, 대구, pp. 8 ~9. 참조.
이교준, Untitled, black and white photographs, 40 X 45 cm (each), 1980 ⓒ Lee Kyo Jun / PIBI GALLERY
About Artist
이교준은 1955년 대구 태생으로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를 기점으로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70-80년대 한국화단의 주요 현대미술전시에 참여해왔다. 1970년대와 80년대 실험적 설치를 시작으로 90년대에는 알루미늄 금속판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평면작업을 전개하였다. 90년대 후반부터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평면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 본격적인 캔버스 작업으로 최소한의 형태와 구성, 색채만으로 본질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이교준은 1982년 대구의 수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인공갤러리, 박여숙 화랑, 리안갤러리,
갤러리신라, 갤러리데이트, 더페이지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의 “Independants” 전시(1981)를 비롯하여 관훈갤러리의 “Ecole de Seoul”(1981) 및 인공갤러리와 관훈갤러리에서 진행된 “TA.RA 그룹전”(1983)을 포함 5회의 <TA.RA>소그룹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이후 토탈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의 오늘” (1989), 국립현대미술관 “청년작가전”(1989),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현대미술가협회전”(1999), 나가사키 현대미술제(2004, 일본), 대구미술관의 “메이드 인 대구”(2011), 갤러리 스케이프의 “Captive Space”(2011), 한국현대미술초대전(2015), 성곡미술관의 “코리아 투모로우”(2016), 탈영역우정국의 “오더-디스오더”(2017)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이교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일신방직(서울), 한국가스공사(대구), 전북은행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About PIBI GALLERY
피비갤러리는 십여 년에 걸쳐 축적된 미술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역량 있는 작가들을 조명하고 현대미술의 다양한 접점들을 모색하고자 2016년 12월에 개관했다. 문화 역사의 정취 가득한 삼청동 끝자락에 위치한 피비갤러리는 작가의 잠재력에 주목하여 도전을 지원하는 한편, 아트프로젝트 기획 및 아트컨설팅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유연한 소통의 공간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기획전 방향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를 두루 소개하고 지역과 국가에 제한을 두지 않는 전시 프로그램으로 세계 각지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국내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하고자 한다. 개관 이래로 “이정배 : 잠식(蠶食)”, “Alex Katz : Small Paintings”, “이은선 : 공명(共鳴)”, “이종건 : We are Where We are Not”, “정승혜 : 마법의 갑옷과 신비의 칼을 주오”, “PIBI+_애니메이션”, “PIBI_LINK : 정승일 • 김태우”, “이정배 : Angled Straight(각진 직선)”, “이동기 : 2015 ~ 2018”을 개최했으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줄리안 오피”전시를 기획하였다. 본 전시는 아홉 번째로 조명하는 국내 작가의 전시이자 피비갤러리에서 이교준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