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D갤러리 초대작가전
조이경 <Image of Others>
2019. 4. 4 (목) ~ 5. 15 (수)
Opening. 2019. 4. 4 (목) 늦은 5시~
또 다른 기원을 향하는 기원들
조이경의 작품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타나는 현대 이미지의 속성이 나타나 있다. 도시에서 살고 작업했던 근대예술가들이 일찍이 감지한 파편화된 시공간 의식은 디지털 문화에서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간극과 균열이 많은 작품은 고전적인 의미의 작품(work)이기 보다는 텍스트에 가깝다. 텍스트는 수많은 맥락을 가진 또 다른 텍스트로 분열하고 합체된다. 그것은 매체가 디지털 방식으로 변화된 이후 소유보다는 공유가 일반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전시부제 ‘Image of Others’는 기성의 자료들에서 선택하여 재생산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고전적 의미의 예술작품은 주체가 창조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예술이 타자로부터 온 것들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작품이 작가와 동일시되었다면, 텍스트는 텍스트로서의 주체를 전제한다. 작품과 마찬가지로 주체 또한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먹은 것들이 내 몸을 이룬다면, 내가 지각한 것들이 내 정신이 아니겠는가.
예술작품이든 예술가이든, 강한 응집성을 가지는 동일자는 해체된다. 조이경의 탈구축(deconstruction)된 작품들은 중점적 이미지가 던지는 단일한 의미 대신에, 상호보완하고 대리하는 느슨한 비유가 있다. 작가가 기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유희했듯이, 관객 또한 작가가 재맥락화시킨 코드로 자유연상 게임에 임할 수 있다. 조이경의 작품에는 틈과 간극이 산재하며 굳이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매우 화려하다. 작가는 소비자 대중의 눈길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작동하는 스펙터클의 방식을 참조한다. 순간순간 관심을 유도하지만 전체적으로 뭘 보았는지, 무슨 내용인지 불확실한, 즉 대중이 이미지를 소비하는 산만한 방식이다. 대중은 끝없이 보려고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다. 이브 미쇼는 탈미학화된 현대의 문화예술 상황을 진단하는 책 『기체 상태의 예술』에서,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개진한 생각을 이어서 말한다.
이브 미쇼에 의하면 사진은 우리가 빠르게 지나쳐버리고 가볍게 여기며 부유하는 듯한 주의력에 호소하는 이미지들로, 사진의 도래 이후 그림은 더이상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일 수 없었고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려질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배치일 따름이다. 영상의 시대에 나고 자란 조이경은 예중과 예고를 다녔지만, 회화보다는 사진이나 영상이 먼저 문화를 통해 체득되었을 것이며, 작품의 재료로 물감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전 시대의 작품같은 아우라를 만들기 힘들 것을 안다. 이번 전시의 최종 산물은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영상, 사진, 그림, 설치 등을 어지럽게 섞어 썼던 기존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러 매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이미지는 휘발되어 잘 알아볼 수 없는 대신에 새로이 접속된 것에서 생성되는 것이 있다. 지시대상이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들은 경쾌하다.
많은 작품에서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듯한 정사각형 프레임은 시선이 통과하는 화면이기보다는 부유하는 기표들을 순간적으로 한정시키는 장치로 다가온다. 미끄러지는 관계 속에 있는 기표들은 순간적이나마 고정된다. 작품의 물리적 속성 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심리적 시선 속에서 말이다. 작품 제목 또한 의미의 방향타 정도는 제시한다. 자유로운 기표의 조합 속에서도 중력감은 보존된다. 어디선가 떼어온 이미지에도 삶의 역설은 묻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이미지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한 화면에 대비되는 삶의 이미지들이 공존, 충돌하는 작품들은 미디어의 전형적인 속성을 반영한다. 수잔 손탁의 책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는 작품 『타인의 고통』(2018)은 재현이 아니라 재현의 해체를 지향한다. 정확하게 재현된 장면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 다시금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여러 기원을 가진 기표들이 혼합되는 작품은 자연과 문화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자연은 이미지화 되면서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문화 또한 정글 못지않은 난맥상을 보여준다. 작품 『살아남은 이미지』(2018)에는 다른 작품과 달리 공백이 많다. 그것은 이미지들이 쌓이고 지워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공백은 그 위에 얹혀진 사물/이미지들을 잠식하며 바닥없는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기표의 형식으로 축약하여 조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정된 화면 속에 무한정 넣을 수는 없는 법이다. 가능한 총량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무엇인가 생성되기 위해 무엇인가는 소멸되어야 한다. 이때 문화는 자연과 같이 취급된다. 매체와 매체가 여러 차례 섞이면서 원래의 이미지나 매체가 불확실해지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영상과 사진뿐 아니라, 때로는 물감도 개입되기 때문에 화면의 이질성이나 복잡성은 매우 커진다.
여러 매체를 횡단하면서 원래의 이미지는 세탁된다. 가만히 놔둬도 시간의 흐름을 타는 대상에 작가는 시간을 가속화 한다. 마치 자연의 과정을 압축 재현하면서 실험을 행하는 과학자처럼. 전시부제 ‘Image of Others’는 작품에 사용된 소재들이 자신으로부터 기원한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소재들의 기원을 하나하나 따져 본다 한들 그 또한 다양한 기원으로부터 조합된 것이다. 10대부터 영화를 즐겨봤던 조이경이 많이 활용해 왔던 소재인 영화, 그리고 영화 전 단계의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사진 속에는 유성영화가 잠재해 있다’(발터 벤야민)--은 그자체로 이미 조합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편집자가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 구성한, 여러 자리에서 찍은 사진의 일정한 계열, 이것이 완성된 영화라고 규정한 바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과 같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거울 또한 신체의 부분들이 가상으로 봉합되는 장 아닌가.
벤야민은 회화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해석하는데, 그에 의하면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인 것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들로 새로운 규칙에 따라 조립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어법에 큰 영향을 주었던 입체파의 꼴라주는 회화가 사진이나 영상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꼴라주는 공간적 배치를 통해 가능하지만, 몽타주는 시간적이다. 시간의 예술인 영화는 시간을 매개로 이미지/단편들을 꼴라주하는 것이다. 꼴라주나 몽타주는 시공간의 재배치를 통해 작품을 바깥으로 열어놓는다. 사진과 영상을 활용하는 조이경의 작품에서 시간성은 빛과 관련된다. 일상체험에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지각의 조건은 빛이니 만큼, 빛의 조율은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시간은 기억과 관련—‘시간 이미지는 기억의 이미지’(베르그송)이다—되며, 간극이 많은 단편들을 모종의 이야기로 이끈다. 단편들의 조합을 통한 기억은 명확한 연대기를 가지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재현보다는 간극과 간극 속에서 생성되어야 하는 미지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작품은 ‘시지각적이고 음향적 이미지가 기억의 층을 가로질러 동요하는’(로도윅) 촉발지점이 된다. 사진이나 영상을 재활용하는 작가가 사용하는 ‘원본’들은 이미 해체되어 있다. 실제 상황에서 비롯되는 일회적 현존인 아우라는 사라졌다. 사진이나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단편적이다. 작가는 더이상 사진을 인화하지 않고 인터페이스에서 순간적으로 소비하는 문화를 말한다. 조이경의 작품은 하나의 프레임에 안치될 수 있는 안정성이 아니라, 부분에서 부분으로 쉼 없이 시선을 이동하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조형적 영화이다. 그러나 정확한 줄거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영화의 본질을 겨냥한다. 즉 조이경의 ‘영화’는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인용된 바처럼, ‘고정과 지평의 중심을 결여한’ 영화, 즉 ‘사물의 중심 잡힌 지각으로 나아가는 대신, 오히려 중심 없는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며 점점 더 그에 가깝게 다가가는’(들뢰즈)는 것이다.
-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