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전 개최
◇ 한국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 재조명하는 시리즈
◇ 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 6인의 총 134점
- 정찬영의 식물세밀화, 정종여의 드로잉 등 60여 점 최초 공개
- 파격적 형식의 근대 괘불 <의곡사 괘불도>(1938) 박물관ㆍ미술관 최초 전시
- 5월 30일(목)부터 9월 15일(일)까지 MMCA덕수궁 개최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전을 5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 재조명함으로써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을 복원하고자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시리즈로 기획되었다. 그 첫 번째인 이번 전시에서는 채색화가 정찬영(鄭燦英, 1906-1988)과 백윤문(白潤文, 1906-1979), 월북화가 정종여(鄭鍾汝, 1914-1984)와 임군홍(林群鴻, 1912-1979),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 이규상(李揆祥, 1918-1967)과 정규(鄭圭, 1923-1971) 등 6인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1998년 개관이래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1998), 《한국근대미술: 근대를 보는 눈》전(1999)을 시작으로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2)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2015) 《변월룡(1916~1990)》(2016) 등 한국 근대작가와 작품 소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화가 6인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 시기, 전후 복구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에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보여준 작가들이다. 전시명 ‘절필시대’는 당시 많은 화가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미완의 예술 세계를 주목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정찬영), 채색화에 대한 오해(백윤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정종여, 임군홍), 다양한 예술적 시도에 대한 이해 부족(이규상, 정규)과 같은 이유로 이들의 작품 활동이 ‘미완의 세계’로 그친 시대를 성찰한다.
전시는 ‘근대화단의 신세대 : 정찬영, 백윤문’, ‘해방 공간의 순례자 : 정종여, 임군홍’, ‘현대미술의 개척자 : 이규상, 정규’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 정찬영과 백윤문을 소개한다. 정찬영과 백윤문은 각각 이영일과 김은호의 제자로 ‘근대화단의 신세대’로 등장했으나 해방 후 채색화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면서 화단에서 잊혀졌다. 이번 전시에는 정찬영의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식물세밀화와 초본 일부를 최초 공개한다. 정찬영의 남편이자 1세대 식물학자인 도봉섭과 협업한 식물세밀화는 근대 초기 식물세밀화의 제작사례이다. 백윤문은 김은호의 화풍을 계승하여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냈고, 남성의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로 개성적인 화풍을 완성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대표작 <건곤일척>(1939)을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월북화가 정종여와 임군홍을 소개한다. 이들은 해방 후 1940년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월북 이후 남한의 미술사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정종여는 수많은 실경산수화와 풍경 스케치를 남겼으며 이번 전시에는 그가 월북 전에 남긴 작품과 자료를 바탕으로 남과 북에서의 활동을 함께 조명한다. 정종여가 제작한 <진주 의곡사 괘불도>(등록문화재 제624호)도 선보인다. 6미터가 넘는 괘불로 전통 불화 양식이 아닌 파격적인 채색 화법으로 그려졌다. 사찰에서 1년에 단 하루만 공개하는 그림이지만 특별히 이번 전시기간 동안 감상할 수 있다. 임군홍은 중국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자유로운 화풍의 풍경화를 남겼다. 또한 그가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아카이브를 통해 초기 광고디자인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3부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라 불리는 이규상과 정규를 소개한다. 이들은 ‘모던아트협회’,‘현대작가초대미술전’등에 참여하며 해방 후 현대미술 화단 선두에서 활동했으나 이른 나이에 병으로 타계하고(이규상 50세, 정규 49세) 작품이 적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 이규상은 1948년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1세대로 활동했으나 남아 있는 작품이 10여 점에 불과하고 알려진 행적이 없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규상과 관련된 아카이브와 제자, 동료 등과 인터뷰한 자료를 한 자리에 모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정규는 서양화가로 출발해 판화가, 장정가(裝幀家), 비평가, 도예가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회화와 비평에 국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규의 작품세계가 ‘전통의 현대화’, ‘미술의 산업화’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했으며 특히 후기에 가장 몰두했던 세라믹 벽화를 소개한다.
전시 연계 행사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형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9월 7일 개최된다. 미술사학연구회와 공동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참여 작가와 작품세계를 주제로 연구자 5인이 발표할 예정이다. 별도의 신청 없이 참석 가능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근대미술 연구와 전시로 특화된 덕수궁관의 역할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추진 중인 한국미술사 통사 정립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일반인 전화문의: 02-2022-060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대표번호)
■ 전시개요
- 전 시 명: (국문)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1: 절필시대》
(영문) 《Rediscovery of Korean Modern Artist 1: When Brushes Are Abandoned》
- 전시기간: 2019. 5. 30.(목) ~ 9. 15.(일)
- 전시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
- 출 품 작: 회화, 판화, 도자 등 134점, 아카이브 128점
- 주 최: 국립현대미술관
- 관 람 료: 2,000원(덕수궁관람료 별도)
■ 연계 학술대회
- 행 사 명: 한국 근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형학
- 행사일시: 2019. 9. 7.(토) 10:00~18:00
- 행사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세미나실
- 주 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학연구회
- 발표내용
· [기조발표] 작가발굴과 한국근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형
(김현숙 전 미술사학연구회 회장)
· [주제발표] 정찬영과 근대 채색 화조화(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백윤문의 이원적(二元的) 창작활동(최경현 문화재청)
청계 정종여의 불교 주제 회화(최엽 동국대학교)
한국 근대 미술과 종교의 역할: 이규상 작가를 중심으로 (윤인복 인천가톨릭대)
정규의 벽화,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 (조현정 카이스트)
- 참 가 비: 무료 (덕수궁관람료 별도)
참여작가 소개
□ 정찬영(鄭燦英, 1906-1988)
1906년 평양 출생으로 1920년 평양 서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이영일 문하에 입문했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련>(현재 평양 소재)으로 입선한 뒤 1937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으며 1935년 <소녀>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1930년 도봉섭(서울대 약학대학 초대학장 역임)과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했으나 1939년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고 그 충격으로 절필했다. 1940년대 도봉섭이 한국의 유독식물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자, 이를 돕기 위해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봉섭이 납북된 뒤 정찬영의 그림들은 정태현의 『한국식물도감』(1956)에 삽도로 사용되었으며 2000년 유족들에 의해 도봉섭, 정찬영의 자료집이 발간되고 윤범모의 「일제하 여류채색화의 선구」(월간미술, 2000) 논문이 발표되기 전까지 조명되지 못했다.
□ 백윤문(白潤文, 1906-1979)
향석(香石) 백희배(白禧培, 1837~1911)(조부), 임당(林塘) 백은배(白殷培, 1820~1901) (8촌 조부) 등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백윤문의 호 향당(香塘)은 백희배와 백은배에게서 한 글자씩 가져왔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김은호의 문하에 입문하여 1928년 김은호의 순종어진 제작에도 참여했다. 1927년 <춘일(春日)>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1940년까지 약 30점의 작품이 입선과 특선했다.
1942년 병으로 쓰러진 뒤 35년 동안 투병했다. 1977년 기적적으로 일어나 이듬해 《향당 백윤문 재기전》을 개최하고 이후 미국 순회전을 준비하던 중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김은호의 화풍을 이어받아 인물화와 화조화에서 세련된 필치와 부드러운 색채의 채색화로 두각을 보였다. 동시에 풍속화에서는 김은호와 차별되는 남성적이고 강건한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 정종여(鄭鍾汝, 1914-1984)
1914년 거창에서 태어났다. 거창보통학교 졸업 후 해인사에서 생활하다가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다시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웠다. 1934년 오사카미술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942년 연구과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을 오가며 이상범 문하에서 한국화를 배웠다.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후 전운이 짙어지면서 일본에 협조하는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결전미술전람회》에 전쟁화 출품, 대동아전쟁 출정자에게 나누어줄 수호불상 1천매 헌납 등). 해방 후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조선화 교육과 보급에 앞장서며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로서 인정받았다. 1988년 해금 이후 가장 먼저 개인전을 열며 큰 관심을 받았지만, 친일 이력 등으로 인해 아직까지 정종여에 대한 연구는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화단에서의 고답적인 전통 화풍을 탈피하고, 민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산수, 인물 풍속을 개척해 나간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 임군홍(林群鴻, 1912-1979)
임군홍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치과에서 기공사로 근무. 경화양화연구소 등에서 미술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입선했다. 1936년 녹과회를 결성하면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일본인 은행장의 후원을 받아 만주에서 《임군홍. 김혜일 2인 양화전》을 성공리에 개최했다. 이후 한커우에 정착하여 광고사를 운영하는 한편,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풍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 한국 화단에서 보기 드문 맑고 강렬한 색채로 중국의 이국적인 풍경을 표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광고사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렸으나 ‘운수부 월력사건’(※)으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맡았고 조선화가로 전향했다.
※ 운수부 월력사건: 임군홍은 동료화가 엄도만과 함께 1948년 철도국의 달력제작을 의뢰받고 최승희(46년 월북)를 모델로 한 달력을 제작함. 그러나 모델이 북로당 간부 최승희이며 최승희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 갓끈은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16개의 구슬. 갓 측면에는 조선을 더하여 소련 17연방을 의미하는 17개의 구슬, 최승희의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 하단에는 소련 국기의 망치와 낫과 유사한 모양 등이 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약 4개월 간 옥살이를 함.
□ 이규상(李揆祥, 1918-1967)
서울에서 가구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일본의 전위미술 운동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했다. 1948년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 결성했다. 1956년 유영국, 한묵 등과 함께 ‘모던아트협회’ 창립한 후 6회로 해산하기까지 《모던아트협회 전람회》에 참여했다. 이 시기 가톨릭 세계관에 뿌리를 둔 추상화를 그렸다. 1961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1963년 두 번째 개인전에는 더욱 단순화된 추상화를 발표했으나 당시의 추상화 경향과 달리 일체의 형상이 배제된 극도로 간결한 그림들로 화단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62년 생활고로 일본인 부인과 세 자녀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본인은 남아 가난과 병환에 시달리다 1967년 타계했다.
□ 정규(鄭圭, 1923-1971)
1923년 고성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서양화로 개인전을 열었다. 환도 후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미술사학자 최순우(당시 학예부장), 유강열 등과 교류했다. 전통 도자와 판화의 현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57년 목판화 개인전을 열었다.1959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미국 로체스터 공예학교에서 도예를 배우고 귀국했다. 1961년 경희대 요업공예과 교수로 임용된 후 도자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1963~1964년 동안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 남산 자유센터, 을지로 오양빌딩, 대학로 우석병원 정문빌딩 등에 세라믹 벽화를 제작했다.
한편 부산 피난기부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소설책, 시집, 잡지 등의 장정(표지 디자인)에 참여했고 각종 전람회에 대한 비평과 시평 등을 발표했다. 작가이면서 교육가이고 이론가. 유화, 판화, 도자기, 건축 분야를 아우른 종합 예술인이다. 특히 전쟁 후 도예, 판화 등이 현대미술로 정립되는 데 기여했다.
1부. 근대화단의 신세대 : 정찬영, 백윤문
정찬영(1906~1988)과 백윤문(1906~1979)은 각각 동경 유학파 출신의 이영일(1903~1984)과 김은호(1892~1979)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였다. 이들은 1930년대 전람회의 스타 작가로 부상했지만 개인적인 비극으로 절필을 한 뒤 화단에서 사라졌다. 이후 2000년(정찬영), 1981년(백윤문) 유족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까지 두 화가는 화단과 학계에서 사실상 잊혀져 있었다. 근래에는 일본에서 유입된 채색화풍에 사실성을 강화하고 향토성을 가미하여 1930년대 한국화단을 다채롭게 만든 화가들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찬영은 1930년 식물학자 도봉섭과 결혼을 하였다. 도봉섭은 우리나라 최초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였다. 정찬영은 도봉섭과의 결혼 조건으로 결혼 후에도 그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 <모란>과 <여광>을, 그리고 서화협회 전람회에 <공작>을 출품했다.
<공작>은 완성작과 초본이 함께 전하여 그림의 제작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공작 한 쌍은 정찬영 부부일 것이다. 공작새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인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비해 배경의 소나무는 차분하게 표현하였지만 나무 줄기에 청록색의 이끼를 그려 넣어 공작 깃털의 무늬와 통일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극도로 화려한 세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농담의 안배, 공간의 배치 등이 적절하여 우아한 격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정찬영은 1939년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었고, 그 충격과 절망으로 붓을 놓고 말았다. 매년 거르지 않던 조선미술전람회와 서화협회전람회 출품도 중단했다. 그러나 남편 도봉섭이 한국의 유독식물을 연구하는 계획을 세우자, 정찬영은 책에 들어갈 식물세밀화 제작을 맡아 다시 붓을 들었다.
근대 식물학자 도봉섭과 채색화가 정찬영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한국산유독식물》은 한국 근대식물학 연구와 교육의 초석이 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찬영의 그림들은 해방 후 정태현이 발간한 『한국식물도감』에 삽도로도 사용되었다.
정찬영, 한국산유독식물(韓國産有毒植物) 중 천도백산차, 애기백산차, 노란만병초, 흰만병초, 1940년대,
종이에 채색, 106.5×7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백윤문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에는 대부분 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중에서도 남성들의 놀이와 생업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는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 주로 미인도 계열의 여성인물화가 인기를 끌었던 화단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특이한 예이다. 백윤문은 당시 인기 있는 일본의 채색화풍을 따르면서도, 검게 그을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조선 남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조선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림의 제목인 ‘건곤일척’은 단 한 번에 승패가 걸렸다는 뜻이다. 왼쪽에 앉은 인물은 지금 막 윷을 던진 듯 손바닥이 쫙 펼쳐진 모양이다. 윷 세 개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는데 나머지 하나가 아직 공중에 있어서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은 상황이다. 곧 승패를 가로지를 윷 하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흥미롭다. 백윤문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백윤문, 건곤일척, 1939, 면에 채색, 150x165cm,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2부. 해방공간의 순례자 : 정종여, 임군홍
정종여(1914~1984)와 임군홍(1912~1979)은 월북화가들이다. 1940년대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1950년 월북을 기점으로 남한 미술사에서 삭제되었다. 정종여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전 국토를 화폭에 담고자 하였으나, 분단으로 인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임군홍은 중국을 여행하며 자유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운수부 월력 사건’에 연루되며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이후 이들은 해금조치 되었으나 여전히 이들이 남한에 남긴 작품만으로는 온전한 전시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작품과 자료를 정리하고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한 정종여는 거창에서 멀지 않은 가야산과 지리산을 수차례 화폭에 남겼다. 해방 후, 서울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정종여는 큰 가방을 매고 전국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녔다. 1949년에 열린 제 2회 개인전에 <지리산 쌍계동천>, <해인사 계곡>, <선암사의 봄> 등이 출품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남부 지방의 명산을 다니면서 산수화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1948년 초가을에 그린 것으로 구름이 가득한 지리산의 아침 풍경을 4미터에 이르는 큰 화면에 담았다. 정종여와 함께 오사카미술학교를 다닌 서양화가 윤재우는 정종여가 대작을 그릴 때면 ‘마치 전투하는 전사’와 같이 몸을 움직이며 그림과 씨름하였다고 했는데, 이 그림을 그릴 때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평소 정종여는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별을 없애고 조선의 현실을 파악해서 그릴 것을 주장했는데 지리산의 장관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그림에서 화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종여는 거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해인사에서 생활했고,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정종여는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한국에 들어와 사찰 관련 그림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정종여가 25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진주 의곡사에 전한다. 의곡사는 해인사의 말사이므로, 의곡사 괘불도는 정종여와 해인사의 인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괘불은 사찰에서 야외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하는 대형 불화이다. 보통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그림들은 ‘화승’이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제작하는데 일반화가인 정종여가 의식용 괘불을 그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정종여는 전통적인 불화 양식을 따르지 않고 동양화풍의 맑은 채색화법으로 이 괘불을 완성했다. 굵기의 변화가 크고 리듬감이 넘치는 필선, 인간미가 넘치는 부처의 얼굴 표현 등에서 전통 불화의 법식에서 벗어난 파격이 느껴진다. 부처의 머리카락에서 윤곽선을 없애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바탕색을 번지듯이 처리한 점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채색화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20대의 젊은 정종여의 패기와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종여, 지리산조운도(智異山朝雲圖), 1948, 종이에 수묵담채, 126.5×380cm, 개인 소장
임군홍이 월북 전 가족을 그린 그림이다.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 딸을 그렸다. 부인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작은 딸이 있었다. 왼쪽에 그려진 백합은 임군홍의 집 마당에 피어있던 백합을 그린 것인데, 곧 태어날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듯하다. 백합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테이블 위 도자기들은 임군홍이 수집한 것으로 임군홍이 떠난 후 이것을 팔아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위스키 병만 남아 유족에게 전하고 있다.
임군홍,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4×126cm, 유족 소장
3부. 현대미술의 개척자 : 이규상, 정규
이규상(1918~1967)과 정규(1923~1971)는 한국 모던아티스트 1세대로 불린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현대미술을 개척한 선두주자이다. 그러나 이규상은 일체의 형상이 배제된 극도의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 세상의 이해로부터 멀어졌고, 정규는 현대 판화와 현대 도자의 개척에 몰두하면서 상대적으로 화가로서 위상이 서서히 낮아졌다. 두 작가는 주류 화단과 거리를 두었기에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러왔다. 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초두(初頭)에서 적극적인 선언이나 행동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세계와 창작 태도를 모색해 간 이들의 작품 활동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이규상은 《모던아트협회전람회》와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규상은 《모던아트협회전람회》에 주로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1959년에는 <기도(祈禱)>, <화영(火影)>, <꿈>, <생동> 등을 출품한 것이 확인된다. 이 작품은 현재 ‘Composition’, 즉 ‘구성’이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있지만, 그림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종교적 심상, 염원 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어두운 가운데 밝은 빛이 뻗어 나오는 원형의 이미지에서 종교적 숭고미가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이규상 특유의 거친 마티에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규상, 구성(Composition), 1959, 합판에 유채, 65×52cm, 개인 소장
정규는 1958년 한국판화가협회를 결성하고 국제판화전을 기획하면서 현대판화의 보급에 몰두했다. 정규는 1958년 첫 번째 판화 개인전을 개최한 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3년 서양화가 이항성과 함께 《정규.이항성 이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는 정규의 목판화, 이규상의 석판화, 외국화가의 에칭 등 다양한 판화기법이 소개되었다. 이 전시에 출품한 <노란새>는 다색판화 기법을 사용하고 목판화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면서도 대상의 형태는 더욱 단순하게 표현했다. 날개를 펼친 새의 형상 주변의 대각선과 원, 노란색의 새 주변의 검은색과 흰색 등 형태와 색채의 대비로 간결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편, 목판화의 거친 칼자국을 남겨 화면에 풍부한 질감을 더했다. 정규 자신이 회화 양식에서 완성한 간결한 구조미를 판화 양식에도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정규는 1963년 경희대학교에 요업공예과 초대학장이 된 뒤 도자 산업을 이끌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옛 가마터를 답사하고 도자기 파편을 수집하며 전통도자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건축물의 세라믹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오양빌딩은 1962년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1964년에 준공되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인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로, 건물의 한 면에 정규가 거대한 벽화를 장식했다. 벽화에는 전통 가마에서 구워진 옹기, 조선시대 가마에서 수집한 도자기 파편이 사용되었다. 중앙의 거대한 원형은, 태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거대한 크기와 두께감에서 부조 조각을 방불케 한다. <오양빌딩 벽화>는 현대적인 조형성을 갖추면서도 전통 도자 전반에 관한 정규의 관심이 집대성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규는 이 밖에도 부산 해운대의 극동 호텔, 남산의 자유센터, 대학로의 우석대학교병원 정문에 세라믹 벽화를 제작하였다.
정규, 노란새, 1963, 종이에 목판화, 41×3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종여 <의곡사 괘불도>(1938) 설치 전경
정찬영의 화조도와 식물세밀화 전시 전경
임군홍의 풍경화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