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심점환 개인전-기억과 사유
부산 미광화랑
2019년 10월 4일(금)~10월 19일(토) 16일간.
이번 전시는 존재가 가진 ‘기억’과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억과 사유’는 인간이 처한 (어떤) 상황과의 조우, 나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 느닷없이 틈입하는 것으로, 때로는 낯설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 시 명 : “심점환 - 기억과 사유” (초대전)
■전시기간 : 2019. 10. 4(금) ~ 10. 19(토)16일간
■전시장소 : 부산미광화랑(부산시 수영구 광남로 172번길 2)
■문 의 처 : TEL 051-758-2247 HP 010-5579-2854
기억의 피안(Beyond Memory)_Oil on canvas_91.0×116.7(cm)_2018
비상사태 이후의 회화
―심점환, <기억과 사유>(2019)
독립연구가 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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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1946)이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 1949)에 실린 것으로, 시집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여기에 실린 시들은 해방과 신생국민국가의 형성 그리고 시민들의 사회가 내는 새로운 ‘목소리’(내용)를 ‘새 부대’(형식)에 담아낸 것이었다. 새로운 내용이란 ‘식민’이라는 환경의 종결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곧바로 전지구적 냉전의 체제로 포획되어가는 상황을 직면한 젊은 시인들(김수영은 이 시를 썼을 때, 스물다섯이었다)의 언어적 감수성들로 나타났다. 새로운 형식은 기존의 서정시의 리듬이나 운율이나 이미지를 파괴한 언어의 활용으로 제시되어 해방을 맞은 일반적인 감각과는 결을 달리 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 부분
무엇을 지시하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이 시적 진술이 김수영에게 요구되어야 했던 까닭은 세계가 변화(해방)했다면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언어’를 고안해야만 이 변화가 무엇인지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생국민국가와 시민들의 합창을 ‘일본제국주의’와 ‘기미가요’를 통해서 발화할 수 없으니, 신생국민국가와 시민들의 합창은 다른 내용과 형식이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한 세계에 대해 “동무”(너=청자=관객)에게 “바로” 볼 의지를 피력하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의 이행을 손쉽게 판단하고 진단해선 안 된다는 요청이거나 요구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사물이 ‘해방’을 경유했을 때, 그것이 이전과 같은 ‘지시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8월 14일 집안에 식상하게 놓여 있는 일장기와 15일에 마루에 놓여 있는 일장기는 동일할 수 없다.
하지만 젊은 시인의 이 과감한 진단은 다소 과잉된 것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이나 세계에 깃든 시간 혹은 역사를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중요한 문제는 매 순간마다 이 세계가 일종의 ‘비상사태’(벤야민)에 처해 있다면 이 세계를 “바로 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지가 불분명해진다. 만약, 식민지든 자본주의든 간에 세계가 수시로 변화하고 이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세계가 ‘종말’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거나 매순간이 ‘종말’ 이후라면 세계와 조우하는 순수히 새로운 내용과 형식은 만족될 수 없다. 해방이 새로운 ‘조선’이면서 ‘소군정’과 ‘미군정’의 지배를 통한 ‘조선’의 상실이라는 양립불가능성을 도입하는 상황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매순간이 ‘비상사태’이거나 차라리 ‘세계가 모두 무너져 내려버린 사태’에 직면하는 것이 동시대 삶이라면, ‘역사’라는 시야를 통해서만 사물과 세계를 만날 수밖에 없고, 이런 시야를 통해서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조직하고 구성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김수영은 한국‘전쟁’을 경유한 뒤 폐허가 되어버린 동시대가 ‘역사’를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수다스럽게 강조한 바 있다(「거대한 뿌리」). 그런 점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참사’의 시대에서는 낡고 오래되고 쓸모를 찾기 어렵다고 여기거나 격렬한 변화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린 몫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퀭한 눈이 도입되어야 한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충혈된 눈’으로 세계와 만나는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90년대적 그리기가 2010년대 말에 반복적으로 그려질 때, 이를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세계가 무너지고 난 다음에 주어진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정초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형식’의 중요성을 제기한 것이 ‘혁명’을 예술에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인 미국의 신비평이 ‘정전’과 ‘우상화’를 위한 논리로 굴절시켰다면, ‘형식’이 체제 내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지배적 가치로 치환되어버린 형식 그 자신을 전복하는 ‘혁명적 힘’을 건져 올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세계’를 초래한 자본주의와 이를 자양분 삼아 증식하는 파시즘의 경향들을 비켜서기 위해선 더더욱 말이다.
2
심점환의 회화는 전지구에서 ‘하나’가 무너지는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념이나 운동의 ‘종언’이 선고(프란시스 후쿠야마)되고 서방세계의 위대한 승리가 전지구를 뒤덮는 시기와 겹쳐 그의 회화가 놓여 있다. 그는 급격하게 한 세계가 와해되는 순간에, 바라보기를 멈추고 자연으로 복귀한 다른 남성 작가들과 달리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라고 선언하면서 순수한 눈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정치적인 측면이라면, 경제적인 차원에서 그의 회화의 출발에는 IMF가 놓여 있다. 사실 상 이 두 가지 파국은 그에게 바로 보는 것을 두 가지 층위로 분리한다. 하나는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전자가 집요하게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대상의 외피를 벗겨내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작가 자신의 삶에 깃든 꿈과 환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양자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굴절시키는 상상력으로 제시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깃들어 있는 ‘환상’을 흐트러트리는 ‘파상력’으로서 나타난다. 이념과 자본이 대상과 세계와 조우하는 방식을 길들이는 것이라면, 심점환은 지배적 바라보기의 방식을 깨는 시선을 회화에 도입한다는 것이다. 즉 심점환은 개나 고등어로 보이는 동물의 몸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거나 자본주의적 일상을 덜그럭거리게 만드는 환상에 시달리는 장면을 회화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심점환의 회화는 환상을 통해서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언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리에 의해 장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파상력을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IMF라는 국민국가의 붕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시한 달콤한 ‘꿈’이 아니라 ‘깨어남’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요컨대 무언가가 종료되었다는 선언이 이루어지고 난 뒤, 또 역사(단군) 이래로 최악으로 망한 바로 그 시간 이후에,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고자 하는 (보수적, 자본주의적) ‘꿈’에 백기투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에 맞서는 ‘꿈=깨어남’이 그의 작업이 놓여 있는 자리라고 말하고 싶다. 일테면 깨어나는 꿈을 회화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들(예수, 프리다 칼로, 반 고흐, 데이빗보위 등등을 연기한 배우들)을 정교하게 ‘재현’하는 작업은 역사적 인물이 갖는 중요성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가상과 실재 사이의 식별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그는 포르노그라피를 재현하기도 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식별불가능한 시각적 조건과 환상 속으로 함몰해가는 세계를 구출하는 ‘파상력’이 회화의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심점환의 2000년대 중후반의 작업들은 이미지가 갖는 힘들과 무수한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서 확산하는 방식들에 회화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국가적 환상전략들의 선전선동 이미지들로부터 비켜서기 위해선 이미지 자체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초기부터 그의 작업이 대상과 세계와 접촉하여 그것을 뚫어지게 보는 것이 하나의 회화적 방향이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은 개나 물고기의 피부와 살을 집합적으로 보여주되 그곳이 종말의 영역이 아니라 종말 이후를 살아가는 원천이라는 것, 그리기가 비로소 시작되어야 할 장소라는 것을 의미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의 명멸이 이루어진 곳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을 때, 회화는 죽음과 그 이후를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세계를 함몰시키는 것을 피하고 그곳에서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물론 거기에는 ‘동무들’의 죽음도 펼쳐진다. “동무여 (중략)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기억의 피안2(Beyond Memory2)_Oil on canvas_91.0×116.7(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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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점환의 작업에서는 ‘동물 신체’와 ‘인간 신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동물들이 먼저 죽었다. 이 죽음의 경로 옆 자리에 인간은 왜소하게 드러나는데 압도적 환상들에 위축되어 있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는 인물의 형상이나 환영을 헤매는 인물들이 그러하다. 인간은 아직 죽지 못한다. 인간이 죽는 것은 최근 늑대에 물어뜯기는 인물(작가 자신의 이미지이다)이 등장해야 가능해진다. 달리 말해, 인간의 죽음이 찾아오는 2010년대 이후의 심점환의 작업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은 심점환에게 단순히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의 소멸이나 상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의 소멸과도 등가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검은 물결 위의 피에타>(2014)는 세월호 사건을 모티브로 그린 것으로 이 작업 이후로 ‘인간’은 왜소와 위축으로 한정되지 않고 동물이 된다. 이 이전의 죽은 동물의 이미지와 이후의 죽은 동물의 이미지는 동일하지 않다. 심점환이 ‘앎’을 회화적으로 다루어야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지각해야 할 세계가 또 다시 무너져 내렸을 때, 이를 지각할 수 있는 회화적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야 했다는 것이다. 동시대적 이미지들에 개입하는 회화적 전략은 당면한 비상사태에 대응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가 저물고 저녁이 되어 나타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절실히 요구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심점환의 회화에서 “동무들” 곧 인간들의 신체는 이미 ‘구체관절인형’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 스스로도 구체관절인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구체관절인형의 형상(광대이기도 하다)도 ‘인형’일 뿐 인간이 아니다. 차라리 인형과 인간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섰을 때, 인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려야 한다. 예컨대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인형이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 같은 것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이라면, 기존의 대화법이나 이야기는 소용에 닿지 않는다. 소 귀에 ‘경’ 읽기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경전’의 불충분함이나 한계, 곧 지난 세기의 가치들이 파국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그가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것은 기왕의 세계의 붕괴에서 그러모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 고독, 운명, 죽음, 폐허, 파괴, 우연성과 같은 키워드는 그간 그가 고전을 통해서 ‘수습’하게 된 회화적 가치 혹은 개념들이다. 그는 비상사태로 치닫는 세계 앞에서 회화가 대응하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가치와 개념을 담은 ‘이야기’를 조직하고 제시하는 것이며 이 회화적 환상을 통해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동시대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파상력으로서 환상은 회화의 자기부정까지 밀어 붙인다는 점일 터이다. 환상을 깨는 환상으로서 회화가 가 닿는 지점은 회화 자체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는 미술사에서 종종 보이는 것처럼, 회화를 종식시키는 방향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그는 회화에 대한 부정을 ‘내재적’으로 함축할 뿐, 회화가 끝났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양립불가능한 모순(환상으로 깨어나는 환상)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해소하는 순간이야말로 그의 회화의 종말이 도래하는 순간일 것이겠지만, 그런 일은 예측도 추측도 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양립불가능한 조건이 그로 하여금 인간과 동물 사이의 식별불가능성을 더 강화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가 난도질 되어 널려 있는 <바다에 누워>(2016)는 2014년 4월 16일을 견인할 수밖에 없다.
<행진>(2019)은 사육당하는 존재들로서 인간과 돼지가 등치되고 있는 우화적 작업이며 이 형상들은 낱낱이 정육되어 ‘눈 달린 고기’(2018)를 바로 옆 자리로 끌어당긴다. 동물화 된 인간은 눈 뜬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언이 들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심점환은 이런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그리고 인접한 방식으로 읽도록 제안하는 방식을 전시에 마련한다. 즉 <기억과 사유>(2019)전에는 구체관절인형-광대-돼지인간-난도질된 물고기-눈 달린 물고기와 일제 강점기 예술가의 자의식을 드러낸 시와 고도를 기다리며 주사위를 굴리는 두 명의 눈 먼 신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관객들에 의해 조합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접촉의 순간 변용되고 이행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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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돌>(2018)은 기괴하다. 태어난지 1년 된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이 아이는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은 작가 자신의 ‘기억’을 그린 것일 수 있다. 만약 이 이미지가 작가 자신을 그린 것이라면 저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첫돌에 이미 ‘소진’된 인간, 소진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비상사태의 연속들. 인간으로서 진이 다 빠지고 난 다음에 오는 그 무엇을 기다리며 이야기(세계)를 쉼 없이 중얼거리는 것, 바로 이 자리가 심점환의 회화가 현재까지 도착한 무서운 장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