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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 탄생100주년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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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곽인식 대규모 회고전 12월 22일까지
▸ 곽인식(1919~1988, 경북 달성 출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회고전
▸ 작가의 작업 세계 한 눈에 살펴보는 작품 200여 점, 자료 100여 점 소개

대구미술관(관장 최은주)은 오는 10월 15일부터 12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순회전 ‘탄생 100주년 기념: 곽인식’을 개최한다. 

□ 이번 전시는 대구 출신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곽인식(1919~1988)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는 전시로, 지난 9월 15일까지 개최된 국립현대미술관의 ‘탄생 100주년 기념: 곽인식’ 전시의 순회전이다.

□ 국공립미술관 협력망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2019년 공립미술관 순회전시’인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작가의 고향인 대구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 곽인식은 일본 미술에서 물질의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물성(物性)을 탐구했던 작가로,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선구적인 작업세계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대규모 회고전 형식의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 및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 200여 점과 자료 100여 점을 통해 곽인식 예술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 곽인식은 1919년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 1937년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2년 귀국 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1949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개인전 50여 회를 갖는 등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 유리, 놋쇠,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실험하며 시대를 앞서 간 작업을 보여주었다. 현대미술의 ‘물성(物性)’과 관련하여 서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가, 일본에서는 1970년대 ‘모노하(物波)’가 국제적인 흐름에 조응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곽인식의 작품은 이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곽인식은 1960년대 초반부터 사물과 자연의 근원적 형태인 ‘점, 선, 원’에 주목하여 물질을 탐구했으며 1970년대 모노하를 견인한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인물(남), 1937, 캔버스에 유채, 91x7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전시는 곽인식의 작품세계를 193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 조망한다. 
  
 ○ 첫 번째 ‘현실 인식과 모색(1937년~1950년대 말)’에서는 곽인식의 초기작 <인물(남)>(1937), <모던걸>(1939), <긴머리 소녀>(1946)와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한 현실을 반영한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 1955>(1955) 등을 소개한다. 



작품 63, 1963, 유리, 72x10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두 번째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에서는 곽인식이 본격적으로 사물의 물성을 탐구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터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등과 같은 오브제를 부착하고, 이후에는 유리, 놋쇠, 철, 종이 등 재료 자체에 주목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곽인식 작품 행위의 분수령이 된 깨뜨린 유리를 붙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제시한 작품들(1961-63년)을 집중 선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 ‘봉합’으로 극복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를 반영한다. 1969년에는 종이를 ‘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자른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때 종이의 ‘원’은 평면이나 조각이 아닌 물질 자체로 제시된다. 


작품 No.4, 1980, 도기에 먹, 3.7x13x1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세 번째 ‘사물에서 표면으로(1976-1988년)’에서는 돌, 도기, 나무, 종이에 먹을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1976년 이후 작가는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손자국을 남긴 점토를 만들고,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등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을 합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후기에는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색점을 찍어 종이 표면 위에 공간감을 형성한다. 

곽인식 전시전경


□ 이번 전시에서는 또한 곽인식의 조수였던 우에다 유조(갤러리 Q 대표), 후배 작가인 최재은을 비롯하여 박서보, 김구림, 곽훈, 김복영 등 평론가,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곽인식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한국미술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은 “작가는 생전에 대구미술계와의 교류와 대구에서의 전시를 열망했다. 작가가 한평생을 추구하며 얻었던 결과의 깊은 뜻이 이번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미술계와 후학들에게 소중한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곽인식 전시전경



곽인식(郭仁植, 1919~1988)

1919 경북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출생
1937 일본미술학교 입학
1942 일본미술학교 재학 중 귀국
1949 재도일(再渡日)
1963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일본특별지부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
1988 도쿄에서 작고


주요 개인전
1986 갤러리우에다, 도쿄
1985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서울
1984 갤러리우에다, 도쿄
1982 현대화랑, 서울
1978 갤러리테, 도쿄
1977 갤러리테, 도쿄
1976 오사카포름 화랑, 도쿄
1975 오사카포름 화랑, 도쿄
1969 도키와화랑, 도쿄
1967 갤러리신주쿠, 도쿄
1966 다케가와화랑, 도쿄
1963 나이카화랑, 도쿄
1962 주오화랑, 도쿄
1961 난텐시화랑, 도쿄
1960 주오화랑, 도쿄
1959   고마쓰스토어화랑, 도쿄
1957 무라마쓰화랑, 도쿄
1956 국제관광회관, 도쿄
1955 국제관광회관, 도쿄
1942 미나카이화랑, 대구

주요 단체전
1988 《88올림픽 세계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86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9 제13회 《류블랴나국제판화비엔날레》, 류블랴나현대미술관, 류블랴나
1977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도쿄센트럴미술관, 도쿄
1976 제2회 《시드니비엔날레》, 뉴사우스웨일스미술관, 시드니
1971 《한국현대회화전》, 국제예술도시, 파리
1969 제10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시실로 마타라조, 상파울루
1968 《한국현대회화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 
1965 제8회 《일본국제미술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61 제1회 《연립미술전》, 무라마쓰화랑, 도쿄
제2회 《연립미술전》, 긴자화랑, 도쿄
1960 제12회 《요미우리 앙데팡당》,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9 제1회 《신에꼴 드 도쿄전》, 이케부쿠로 미쓰코시백화점, 도쿄
1958 제10회 《요미우리 앙데팡당》,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7 제17회 《미술문화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제9회 《요미우리 앙데팡당》, 도쿄도미술관, 도쿄
《미술단체신인선발전》, 시로키야, 도쿄
1955 제40회 《이과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4 제39회 《이과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3 제38회 《이과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2 제37회 《이과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51 제36회 《이과전》, 도쿄도미술관, 도쿄
1941 제11회 《독립미술협회전》, 도쿄부미술관, 도쿄
1940 제10회 《독립미술협회전》, 도쿄부미술관, 도쿄


곽인식 전시전경


시기별 주요 출품작 소개 

I. 현실 인식과 모색(1937년~1950년대 말)
도쿄와 대구에서 제작된 초기 작업과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이다. 곽인식은 1937년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귀국,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1949년 일본으로 돌아간다. 1950년대 주요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거의 매해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물(남)>(1937-38)은 음영의 대조가 돋보이는 초기작이다. 독립미술협회전에 출품된 <모던걸>(1939)은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기하학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배경에 기하학적 형태와 면의 분할은 작가가 새로운 미술 사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1950년대에는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신체가 왜곡되어 눈알이 강조되거나 손발 같은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과장된, 초현실 경향의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1958)의 강렬한 붓 터치와 눈알의 과장된 표현에서 이러한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물질감과 원색은 이후 모노크롬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긴머리 소녀, 1946, 캔버스에 유채, 90.0×72.7cm, 대구미술관 소장

작품 1955, 1955, 캔버스에 유채, 34x60cm, 유족 소장



II.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
곽인식이 작업에서 행위가 부각되고 물성을 드러나는 시기이다. 1960-61년에는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터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등과 같은 오브제를 부착하고, 이후에는 유리, 놋쇠, 철, 종이 등 재료 자체에 주목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곽인식 작품 행위의 분수령이 된 깨뜨린 유리를 붙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제시한 작품들(1961-63년)을 집중 선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비록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나)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봉합’으로 극복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를 반영한다. 실제로 이 시기 곽인식은 남북통일활동에도 앞장섰다. <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문화제>(1961)에 참여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계열의 미술가협회가 연합한 <연립미술전>(1961)을 기획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종이를 ‘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자른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때 종이의 ‘원’은 평면이나 조각이 아닌 물질 자체로 제시된다.


사물과 사물, 1975, 한지, 85x8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III. 사물에서 표면으로(1976-1988년) 
1976년 이후 곽인식은 돌, 도기, 나무, 종이에 먹을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곽인식은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손자국을 남긴 점토를 만들고,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등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을 합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후기에는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색점을 찍어 종이 표면 위에 공간감을 형성한다. 


작품80-M, 1980, 종이에 채색, 127×376cm, 대구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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