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여성작가회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
두 겹의 그림자 노동
2019. 10. 2(수) - 2019. 10. 7(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 2관
Opening 2019. 10. 2(수) pm 5
강유림 고순금 고은주 고혜림 구모경 구미경 구본아 구여혜 구정선 권민경 권희연 김가빈 김가을
김경신 김경원 김경인 김경희 김귀인 김귀주 김래형 김미정 김미화 김민정 김선정 김성실 김성희
김소정 김숙경 김승희 김원경 김윤순 김은미 김은진 김은하 김은희 김인자 김정란 김정수 김정숙
김지나 김지연 김지현 김춘옥 김현숙 김혜진 김화현 김희진 남ㅁ빛 남현주 노신경 도근미 류민자
류인선 민선식 민유리 박나연 박미란 박미영 박미희 박민희 박선희 박소영 박소영 박소은 박소현
박소현 박연주 박용자 박은라 박은희 박필현 박효선 배한나 백용정 백종숙 백지혜 변영혜 별할매
복부희 서은경 서정완 성민우 소은영 손희옥 송근영 송수련 송윤주 송인혜 송환아 신봉자 신지민
신지원 안경자 안영나 안예환 안재옥 안지수 안해경 여수진 오경미 오순이 오정미 오정혜 우재연
원문자 유경화 유미선 유희승 윤수희 윤정례 윤진숙 윤형선 이명임 이미연 이민주 이보경 이상형
이선미 이설자 이세정 이숙자 이숙진 이순애 이승은 이애리 이영묵 이윤선 이윤정 이윤정 이윤진
이인실 이인애 이정은 이진아 이행순 이현미 이화자 이효순 이희정 임서령 임소형 장은우 장현재
장혜용 전성은 전은희 정나래 정다은 정문경 정미혜 정보연 정선진 정선희 정유선 정은하 정지혜
정현희 조명식 조은령 주희 진민욱 진현미 채성숙 채효진 최가영 최명자 최문아 최미연 최소영
최승미 최윤미 최지윤 최혜인 탁양지 표주영 하승희 하연수 한명욱 한상임 한수민 한은경 한현주
함순옥 허순영 허영 허은오 홍성원 홍순주 홍영주 황세은 황윤경 황인혜
주제세미나 | 2019. 10. 2(수) pm 4 - 강연자 이선영(미술평론가)
학술세미나 | 2019. 10. 5(토) pm 3 - 강연자 이선영(미술평론가)
스페이스디나인 초대전 | 2019. 10. 5(토) pm5
아트쉐어 2020展 | 2019. 10. 2(수) ~ 7일(월)
세종문화회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 T.02-399-1114
이인실, 꽃무리Ⅱ, 91x80cm, 종이 수묵 수간채색, 2015
두 겹의 그림자 노동 -한국화 여성작가회 20주년 정기전에 부쳐-
이선영(미술평론가)
1부 이론적 배경
* 평생직업인 작업
누구나 전업 예술가를 꿈꾸지만, 남성 작가들 못지않게 여성 작가들 역시 일과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술에 관련되거나 아닌 직업의 세계에서의 공식적인 일은 물론이고, 가정으로 대변되는 사적 영역에 속해 있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한 일의 세계 또한 작업하는 삶과 상호작용하면서 작품에 반영되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 상당수가 행하고 있는 사적 영역에서의 일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받을 수 없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 취급을 받는다.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은 공적 노동과 달리 평생 지속된다. 정규직이 아닌 한, 한 직업이 지속되는 기간은 점차 짧아지고 있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거의 은퇴라는 것이 없다. 여성이 맡은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인 출산과 육아의 경우, 20-30대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공백기로 지나치게 한다.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사회화와 상품화가 확장되었어도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더욱 비중이 커져만 간다.
작업이라는 것이 평생에 걸친 것이라고 할 때, 이 시기를 어떻게 ’현명하게‘ 보냈는가에 따라 작업의 지속성이 가능하다, 인생의 많은 기회들처럼 작업 또한 한번 놓은 끈을 다시 붙잡기 힘들다. 남성 작가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미술 관련의 공식적인 직업에 여성보다 훨씬 많이 진출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남성 작가들은 집안일과 화업을 동시에 잘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여성 작가만큼 받지 않는다. 심지어 부부가 같이 작가라면 여성이 양보해야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사회가 점차 합리화되면서 개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집안일로 대변되는 그림자 노동은 작업하는 삶과 상충되는 영역에 속함은 틀림없다. 더 나아가 예술 또한 무조건 헌신해야 하는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속한다. 작가이자 여성은 이 두 가지 그림자 노동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것은 이중고이기도 하지만,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 그동안 이 그림자 노동의 영역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했으며,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작업을 포기하거나 짬 날 때만 근근이 작업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김춘옥, 무위자연(無爲自然) Letting nature be, 73x91cm, 화선지 먹, 2019
그러나 여성이 흔히 직면하는 이러한 현실적 삶은 대개 억압되기 일쑤였다. 그것은 현실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주부 우울증과 관련된 사건사고를 통해서나 가끔씩 공론화될 뿐이다. 더구나 예술은 자잘한 일상적 삶을 초월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부류의 작가는 삶의 마지막 해방구에 삶의 고난이 묻어나서는 안된다고도 생각한다. 초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는 일상사에 초월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타자들에게 더 잘 보이는 이 현실을 예술은 무시할 수 없다. 예술은 초월할 수 없는 현실을 초월한 척 하면서 허공에 붕 뜬 삶과 일치될 수 없다. 여성/작가가 처한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화 여성작가회처럼 오랜 연혁을 가진 여성 예술가 그룹은 작업에 몰두하는 삶이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한걸음에 적극적으로 발언을 할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들이야말로 삶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왔던 이들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의 현실을 담아온 작품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의 동어반복 식의 단순 반영이나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관념적이고 거친 작품들로 양단된 상황은 다수의 여성이 자기의 것으로 삼기 어려운 어떤 문턱을 만든다. 한국화 여성작가회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시작되는 문제의식을 적절한 조형적 어법으로 발언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작가들이 다수 포진한 단체이다. 우연찮게도 올해 맞는 20주년은 인간의 삶의 주기로 치면 성년이다. 여성들이 가족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키워온 여성이 이제 자신의 작업에 올인해도 누가 나무랄 수 없는 상징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사적 영역을 공론화하는 이러한 주제는 한국화 여성작가회가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작업하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전시는 폭이 넓으면서도 강한 주제 의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이 담긴 작품과 관련된다. 그러한 자의식은 잔잔한 서정부터 강력한 이의제기까지 큰 폭의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송수련, 내적시선, 91x65cm, 한지에 먹, 2019
* 가족과 여성
여권주의자들이 ‘부권제의 주요제도는 바로 가족’(줄리엇 미첼)이라고 보면서 가족제도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았지만, 자아의 연장이기도 한 가족은 소중하다. 사회안전망이 부실하면 온전히 그 구성원의 운명을 도맡아야 하는 것도 가족이다. 이러한 사정이 가족을 따스하면서도 억압적인 양면성을 야기했다. 급격하게 변화 중인 현대의 인간관계의 속에서, 가족은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경향도 있지만, 일단 선택이 된 이후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그 유지와 발전에는 많은 심적 물적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공적 사회가 온전히 분담할 수 없는 미묘한 영역이 있다. 이제 전통적으로 여성이 감당해온 감정 노동 등도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전통이 여성에게 가해온 오랜 가부장적 억압이 핵가족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가족제도가 극복했는지는 의문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생태학적 사고를 주장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에도 장점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노인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특히 유리했다고 보면서, 근대의 핵가족은 늙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과 동시에 여자들을 가둔다고 보았다. 저자에 의하면 전통사회에서 여자들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가정은 경제의 중심이고 두 영역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여성 중심의 비공식적인 분야가 공식적인 분야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전통적 사회에 국한된 것이긴 하다. 근대가 아무리 비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여성 예술가 자체를 거의 낳지 못한 전통의 시대보다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진보는 지배적 질서에 취약한 계층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작동되는 양날의 칼이다. 자유로운 예술가가 어떤 시대보다 폭발적으로 많아진 근현대에 여성 예술가의 비중을 본다면 큰 차이는 없다. 작가층이 두터워야 소위 말하는 ’위대한 여성미술가‘도 많이 나오지 않겠는가.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 전통이 근대보다 더 열악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미래]가 말하듯이, 경제의 중심은 가정이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 공적인 영역은 산업화된 세계에서보다 훨씬 적은 중요성을 가졌을 때 여성의 자리는 보다 분명했다는 것이다.
홍순주, 결, 60.5×72.5cm, 한지 먹 호분, 2016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역사적 과정이지만, 사적 영역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을 드러낸다. 근대에는 공적/사적 영역의 구분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삶의 총체성은 무너졌다. 예술은 잃어버린 총체성의 복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 진보적 정치 운동과 연합했던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여성운동 또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분화와 분업을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만드는 과정의 지속이었으며, 전통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이라는 사상을 무색하게 했다. 이제 여성도 사회에 많이 진출해 있지만, 여성이 사적 영역에 머무는 선택을 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공적 영역에서의 직무 및 임금의 차별일 것이다. 특히 공적 영역만이 경제적 가치의 생산지로 강조되면, 집에 남아있는 여자들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노르베리 호지)가 된다. 여성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이후에는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며, 유일한 소통 채널은 소비자로 귀결될 때(또는 그런 소비로부터도 소외될 때),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분명했던 전통시대의 여성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여성/작가의 작품에서 가족은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낭만적 사랑‘(재크린 살스비)과 행복의 이미지부터 그것이 배반되었을 때의 고통과 고뇌, 극복 또는 포기의 과정이 드러난다. 가족과 예술이 모두 소중한데, 한정된 물적 심적 육체적 자원 때문에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을 때,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의 죄책감이나 자책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수퍼우먼 같은 완벽주의적 여성상이 추구될 때, 예술은 후 순위로 밀려나기도 한다. 아니면 어정쩡한 타협 속에 삶의 장식에 머물고 만다. 무엇이 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에 달려 있으며,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여성의 주요 미션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는 이들이 결국은 작업을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여성/작가의 의지를 존중해주지 않는 가족/사회에 희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의미는 여전히 남아있다. 가사와 작업이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 수행한다 해도 소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류민자, 환원, 116.5x50.2cm, 캔퍼스에 아크릴, 2019
* 작업과 그림자 노동
불행히도 박탈감은 더 열심히 한 사람의 몫이 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작가의 이중 삼중의 그림자 노동의 경우, 상대적 박탈감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박탈감이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경제학이 측정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여자는 덜 얻는다고 본다. 그것은 여성의 경제적 차별과 종속을 낳았다. ‘자본주의의 시대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현대’(마르크스)에서 생산은 본질적으로 다수의 타자들도 생산한다. 경제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경향이 자유를 소유로 간주하게 하였다. 이반 일리치는 비교적 최근에 확립된 인간에 대한 규정인 경제인,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패러다임이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바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예전에는 성인이 되는 일은 경제적 과정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자기 지방 고유의 말과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기능을 습득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상품화되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임금노동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일들과 이들은 주변화 된다.
경제적 발전이란 일반적으로 생산이 보다 자본 집약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반 일리치는 특히 현금경제로의 전환은 이전까지 없었던 남녀 간의 격차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경제성장이 경제적 차별을 증가시켰다는 것이 [젠더]의 주요 결론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다. 가사노동과 예술작업은 가장 불리한 국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여성/예술가는 이중의 질곡을 짊어지게 되었다. 하나만 잘 하기도 힘든 일을 도맡은 여성/작가의 작품에는 삶의 애환이 묻어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남성 작가들보다는 덜 관념적이다. 이반 일리치는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을 ‘shadow work(그림자 노동)’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그림자 노동은 ‘한 상품에 추가가치를 더해 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을 지시하기 위한’ 용어이다. 그것은 보고되지 않은 비공식 부분이지만 GNP에 크게 기여 한다. 그림자 노동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의 생산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을 개인이 해왔고, 특히 가족을 보살펴왔던 여성이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장혜용, 산으로, 40호, 캔버스에 아크릴, 2019
가사노동은 이제 공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으며, 선진국 및 선진국을 향하는 국가에서는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분담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꾸준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가부장제를 비롯한 남성 기득권은 도전을 받지 않는 한 그대로 유지되려는 관성을 가진다. 한국사회에서 그림자 노동이 공론화된 것은 여성들의 ‘출산파업’ 등,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자체가 위기에 빠지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 쌍의 남녀가 생산하는 아이의 비율이 급기야는 1명 이하로 떨어졌다는 최근의 통계가 있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감소는 자본에게 불리한 것이다. 가사노동보다 더 특수한 작업인 예술 또한 그림자 노동이지만, 그 그림자는 더욱 짙다. 예술은 무보수인 그림자 노동에 속하지만, 그림자 노동의 또 다른 요건인 사회적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술은 취약하다. 예술이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나 현금화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예술은 씨앗이지 열매가 아니다. 잠재성이지 현실성이 아니다. 하나가 현실화되기 위해 하나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즉 경제가 아무리 중요해도 경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의 발전을 이끈 동력 중의 하나인 기초과학의 예는 당장의 결과보다 먼 안목의 투자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드웨어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마땅히 채울 내용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소프트웨어의 문제뿐 아니라 하드웨어에서의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다양한 우회로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예술작업이라는 거의 무상의 행위가 다시 공적 문제로 부상한 계기는 이제 사회의 많은 노동이 그림자 노동이 되어 간다는 점에서 온다. 생산보다 소비로 방점이 옮아가는 시대에 많은 것들이 감정 노동을 필요로 하고 또 자동화로 인한 비숙련 저임금 주변의 문제가 중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소수의 문제는 다수의 것이 되었다. 여성/작가가 처한 상황은 개인적 고민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보다 집단적인 차원에서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원문자, 사유공간, 30F, 한지
* 작품의 분류
192명의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경향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악명 높은 ‘주례사’ 비평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주례사 비평의 시대는 지나갔다. 필자는 여성/작가가 처한 이중의 그림자 노동을 돌파해온 192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서술의 편의를 위해서 인간과 여성(26명), 동식물(52명), 정물과 풍경(54명), 추상(60명) 파트로 나누어 보았다. 물론 이러한 범주의 경계는 수시로 유동적일 수 있다. 이러한 묶음은 동질성 만큼이나 차이를 부각시킬 것이다. 192명의 작품 중 전시 맥락과 관련되어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림자 노동을 주제로 하는 전시인 만큼, 어떤 작품도 그림자화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짧게나마 일일이 작품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다소 기계적이면서도 나열적인 서술이 되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것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서술 방식일 것이라 생각한다. 각 작가/작품에 대한 한 줄 묘사는 평론이라기보다는 전시장을 가득 채울 192개의 작품이 무작위로 보여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분류 기준을 명시할 따름이다. 분절화는 연결을 위한 단위가 된다.
평론 또한 작업 못지않은 그림자 노동이므로 이러한 모자이크 같은 작업은 필자에게 그리 낯선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의 작품들은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만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여성/작가인 나/인간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는 공적/사적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의 문제이다. 이 여성적 주체는 공적 무대의 주인공인 ‘독립적인 남성’의 이미지와도 다르게, 스스로 타자이면서 타자와의 공감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동식물은 그러한 주체가 바라보는 대상이자 은유적 주체로서 이야기한다. 특히 꽃이 많이 등장하는데, 통상적으로 여성이 꽃으로 간주 되었다면, 이 전시의 꽃은 예술이 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열매는 아니지만 열매를 예기하는 무상의 선물인 것이다. 정물과 풍경은 주체의 대상으로 소재화되기보다는 감정이 이입된 마음의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추상은 무엇인가의 표현과 재현을 넘어 예술 언어의 자율성을 구가하려 한다. 예술이 자율적인 것이 되기 위해 자율적이지 못한 상황이 너무 많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작업에 몰입하는 것 외에 다른 돌파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숙자, 전통 암채기법의 강서고분벽화 청룡도, 116.7x90.9cm, 순지 암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