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반이정 미술평론가. 갤러리 유진목공소 디렉터
목수 윤종현(1983~)의 첫 개인전 열기, 전시 제목을 ‘그녀에게’로 짓기, 그가 작업실로 쓰던 공간을 갤러리로 등록-운영하기. 이 셋이 결정된 때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2분 안에 이 모두가 정해졌다. 미술 창작에 뜻을 두고 제작한 작업 전체를 두고 보면, 특정인 ‘그녀’를 반복적으로 그린 무수한 초상화와 재료를 물량공세로 쏟아 부은 표현주의적 회화나 입체 설치물로 구분될 수 있다. 윤종현 스스로는 기량을 키워 3년 후쯤 개인전을 열고 싶어 했으나, 이제껏 완성한 작업의 중간 정리를 겸하고 신작을 더해 개인전을 여는 게 낫겠다고 제안했다. 신작은 목공이라는 전공으로 재현된 작품이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구작과 신작을 더하면 일개인의 한 시즌을 마감하는 기획으로도 의미를 지닐 만했다.
윤종현 개인전은 상반되는 두 종류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창작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녀’를 주제로 10여 년간 틈틈이 제작한 표현주의적 평면 회화로 묶일 구작과 ‘그녀’라는 모티프는 동일하되 상대적으로 절제미를 담은 입체 목조 두 점으로 묶일 신작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작가의 개인사를 간결하게 압축할 과거 사진과 해설을 추가로 삽입하는 코너도 한편에 마련했다.
일생 강박증과 정신질환으로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채로 작업을 이어간다는 쿠사마 야요이의 특이한 강박에서, 조울증으로 폐쇄병동에 네 차례 입원한 윤종현과 그가 반복하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집착이 떠오르기도 했고, 고교시절 아마추어 권투선수와 트럭 운전을 했고 헌책방에서 발견한 르 코르뷔지에의 설계 도면에 영감을 받아 공업고교만 졸업한 채 세계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 미학을 습득해서 노출 콘크리트라는 자기 브랜드를 만든 안도 다다오의 직진성과 생존력에서, 중학생 시절 아마추어 킥복싱 선수로 뛰었고 영화에 뜻을 품고 고교를 자퇴하고 영화판으로 뛰어들어 부업으로 3.5톤 탑차를 운전했던 윤종현의 지난 이력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비단 국제적인 명사와의 유사점을 애써 발견하지 않더라도, 정상인이면 일생에 한 번도 겪기 힘든 이력을 거친 인물의 개인사를 그의 작품과 병행시킬 때 작품도 더 잘 보일 거라 판단했다.
그녀에게. 창작의 원점
‘그녀’와 헤어진 직후 미술학원에 등록 했다.
2006년 수행자의 뜻을 접고 절에서 내려온 윤종현은 방황 끝에 2010년 7월 무렵 전통창호 목공 전문가 아버지 윤대오 유진목공소 사장과 현재까지 목수로 일한다. 같은 해 5개월가량 연애하고 헤어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침을 잊으려고 그림을 시작했다. 폐쇄 병동에서 그린 그림부터 줄곧 작품의 주제 대부분이 ‘그녀’로 수렴되었다. ‘그녀’는 미술 창작의 원점이고 원형이다.
해석의 단서나 은유라는 매개를 두지 않고, 창작자의 주관과 내면을 재료와 색으로 재현한 직진형 표현주의 작업. 작업과 창작자의 인성이 연결되는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이 있는데, 종래 윤종현의 작업은 어딜 보나 그 둘이 완전체로 결합된 경우였다.
‘모호한 이해 불가 상태’는 동시대 주류 미술전시를 지배하는 기운 중 하나가 된 바, 심오한 철학이 담겼을 리 만무하되 이해하기 까다로운 시각적 농담과 이를 수용하는 미술계 공동체의 묵인이 동시대 미술에 그런 기운의 존재를 허용했으리라. 이런 기운에 익숙한 내게 윤종현의 가감 없는 직설법과 표현주의는 그것의 선명성 때문에 오히려 비평하기 난처했다.
미술 현장에서 만나는 어지간한 실험엔 마음이 동하지 않을 만큼 닳고 닳은 나에 비해, 새로운 작업을 볼 때마다 소리 내어 감동하는 윤종현은 나와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점에서 윤종현 개인전은 나와 미술 전공자들에게, 미술이 창작되고 감동을 줬던 원점과 원형을 되돌아보는 시간일 수 있다.
원석
2011년 스페인 마드리드를 방문한 기억을 소환한다.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평생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매특허인 물방울무늬polka dot나 무한 망사infinity Net의 도상에 평소 호감이 없었지만 그녀의 유명세에 기울어 입장한 회고전에서 무수한 초기작을 만났고 쿠사마 야요이를 다시 보게 됐다. 미숙한 듯 미완인 듯한 초기작들과 감정과잉이 투영된 듯한 반복 패턴들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어 절제된 조형미로 다듬어진 쿠사마 야요이 세계의 프리퀄prequel같은 원석이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4C(cut컷 carat중량 clarity선명도 color색)라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감정된다. 귀금속으로 시판되는 다이아몬드의 경우가 그렇다는 얘기고, 가공 이전의 다이아몬드를 감정할 땐 4C같이 선명한 기준이 있진 않다. 원석이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학습 이전의 상태. 2013년 전후 그녀를 생각하며 윤종현이 그린 종이 드로잉 연작(‘그녀에게’라는 제목을 이번 개인전을 기해 붙였다)은 윤종현 개인의 다듬어지지 않은 주관적인 감정 몰입의 산물이다. 원근법 명암 데생 등 다듬어지지 않은 묘사로 완성된 그림들. 마름모꼴로 찍어낸 듯한 눈매와 입술 위에 외곽선을 더해 얼굴을 묘사했고, 피부는 온통 노란색으로 채색했으며, 여백은 다양한 원색으로 막아서 전반적으로 현란한 색채가 지배하는 그림, 원석이었다.
그림을 처음 시작한 2010년부터 2019년 하반기의 어느 시점까지를 구작으로 묶으면, 창작자의 자기 위로 수단과 내면의 고백이라는 미술 창작의 원점을 상기시키고 언어로 풀기 힘든 점에서 원석에 가까운 표현물이 구작에 해당한다. 2019년 11월 경 착수한 입체 목공 작업을 신작으로 묶으면, 원석을 미술의 언어가 아닌 목수의 언어로 다듬고 직설화법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추론하게 만든 시작점이 신작이라 하겠다.
원석, 미술의 언어, 목수의 언어. 모두를 체험한 윤종현은 그녀 너머에서 주제를 찾아낼 것이다 앞으론 .
추신: 유진목공소. 갤러리 유진목공소
갤러리 유진목공소는 30년째 운영 중인 유진목공소 옆에 자리한 화랑으로, ‘유진목공소’라 적힌 대형 간판 아래 나란히 있다. 14세부터 55년간 줄곧 목수로 일한 윤대오 사장이 아들 윤종현과 운영 중인 유진목공소는 KBS-TV 교양프로 <낭독의 발견> 2010년 방송 등 대중매체에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다.
목공소로 유명했던 홍은 목공거리에 재개발 바람이 일면서 목공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와중에 현재 남은 목공소 두 곳 중 한곳인 유진목공소다. 이곳은 ‘전통창호’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목공소다. 2019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방한한 첫날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배경으로 선 만찬장 상춘재의 전통 문창살 99짝의 교체를 담당한 목공소가 유진목공소다.
갤러리 유진목공소의 로고는 목공의 기본 장비임과 동시에, 재현할 대상을 어림잡아 측정하던 미술의 원초적 기교를 공히 함축할 만한 직각자의 기호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