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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승 회화: TRANS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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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오사카, 디즈니

렘브란트의 <삼손의 실명(失明)>(The Blinding of Samson, 1636)을 보고,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그림보다는 영화를 만들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극적인 사건을 한 장면 안에서 인물들의 동작과 배치에 압축한 ‘연출력’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한 영화적인 면모, 강점이 회화의 영역에서 비본질적이고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기가 있었다. 그런 주장에 동조한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겠지만, 둘다 그런 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요컨대,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회화의 유산으로부터 배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데 ‘깊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논의들이 전부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그런 주제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군가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권력의 자리에 항상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오사카 시립미술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고 감탄한 일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의 ‘대표작가’들의 ‘대표작’들이 빠짐없이, 균일하게 정렬되어 있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에 있는 미술관들은, 내가 가 본 한에서 비교하자면, 보다 논쟁적으로 편향적이랄까, 혹은 그렇게 균형에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 혹은 그런 균형에 대한 의식 자체가 별로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나의 작업 이야기로 넘어오자면, 나는 사전 계획을 세워놓고 거기에 맞춰나가기보다는, 실마리가 되는 모티프가 있으면 거기에 연관되는 것들과 관계하면서 다음 과정이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쪽이다. 이런 과정을 진행하다보면, 내가 기대고 있는 ‘회화의 유산’들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거기엔 앞서 말한 것처럼 한때 배제되었던 전통도 물론 포함되는데, 그런 ‘전통들’ 중에 어떤 것이 우선시된다거나, 그것들 사이에 위계적인 질서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상상의 미술관’이라기보다는 ‘상상의 백화점’같고, 더 비근한 예를 들자면 구글의 이미지 검색 화면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오사카 시립 미술관이, 그 무논쟁적인 균질성이 떠오르는 것이다.

내가 나의 그림에 대해 꼭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작업에 대한 나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그림들은 무언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욕망만큼이나 필연적으로 은폐될 수 밖에 없는 ‘권력의 자리’에 대해 상상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구원이나 복음의 현실태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디즈니가 생각난다.

2020.2.22.임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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